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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북한 핵 비판 논쟁:
북한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깎아내리지 말아야

이 글은 송하나 씨의 “장한빛 동지의 오해 혹은 오독에 대한 반론”에 대한 장한빛 씨의 재반론이다.  

이 기사를 읽기 전에 “[독자편지] 북한 핵 비판 논쟁: 장한빛 동지의 오해 혹은 오독에 대한 반론”을 읽으시오.

송하나 동지는 내가 “본인이 머릿속으로 설정한 상대에 대한 반론”을 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송 동지 자신이다.

송하나 동지가 비판한 김영익 동지의 글 제목은 “제국주의가 진정한 위협이다”였다.

그 글에서 김영익 동지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 글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한반도 긴장 고조의 진정한 책임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있다. 그동안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북한을 고립·압박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게 한 근본적 책임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에 있다.”

따라서 김영익 동지와 나는 “반제국주의적 맥락 없이 핵에 대해 도덕적, 추상적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김영익 동지와 나의 관점 속에서 “북한이 동북아 군사적 긴장의 주범이 되고, 제국주의 국가는 북한에게 끌려가는 존재”가 됐다거나, “북한의 핵이 제국주의 압박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지 북한 지배계급의 이해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규정”됐다는 송동지의 주장은 심각한 곡해가 아닐 수 없다.

논점을 분명히 하자. 송 동지와 나의 차이는 반제국주의를 우선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것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북한 지배계급의 핵무장을 분명히 비판할 것이냐 어정쩡하게 침묵할 것이냐의 차이다. 북한 핵을 단호하게 비판하면 반제국주의가 되기 힘들다는 것이야말로 송동지가 그렇게 싫어하는 우익의 양자택일 논리다.

우리는 혁명적 반제국주의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북한 지배계급의 핵무장을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다. 마치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장서 반대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용인?

송하나 동지는 자신이 “북한 지배계급과 민중을 구분”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 그 체제에 맞서 저항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의지를 지배계급 자체와 동일시하거나 아예 소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도 말했다. 이런 관점이 일관된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송동지의 글에서는 미국 제국주의의 압박이라는 이유 때문에 북한 지배계급과 민중의 분단선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송 동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북한은 지금껏 민중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핵 개발에 민중은 어떤 대중적 저항도 시도하지 않았다”,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했고 북한 민중이 그것을 용인한 상황”, “세계로부터의 고립과 제국주의의 압박으로 인해 [북한 민중은] 국가에 의탁하고 있다” 등.

심지어 송 동지는 “지금 북한 민중이 원하는 것은 강력한 전쟁 방지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북한 민중이 핵을 용인한 정도가 아니라 원했다는 식으로까지 읽힌다. .

이것은 명백히 북한 지배계급과 북한 노동계급의 적대적 이해관계를 흐리는 서술이다. 송하나 동지는 북한 민중의 저항을 바란다면서도 “북한 민중이 저항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도 조직도 없어 보인다”(첫번째 글)하고 비관에 빠진다.

이것은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송 동지의 이해가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분석하는 것은 남한과 똑같이 착취당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계급이 자신의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송하나 동지의 주장대로 변화는 “그 나라 민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송 동지처럼 아직 “민중의 대규모 저항”이 없다는 점 때문에 제국주의적 외압이 사라진 뒤에야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역사상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민중 반란과 혁명을 보면 이런 관점은 설득력이 없다.

구 소련은 1928년 이후 60여 년 동안 제대로 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 민중이 소련 체제를 ‘용인’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구 소련 몰락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리아 대통령 바사르 알 아사드는 29년간 집권한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민투표에서 97.2퍼센트 찬성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2007년에는 97.6퍼센트 찬성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도 이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아랍 민중이 이런 부조리한 사회를 ‘용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제국주의적 압박이 사라지기는커녕 바로 옆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이곳에서 혁명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혁명들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의 제국주의 질서가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처럼 아랍 혁명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제국주의가 개입하고 있고, 수십 년간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나라에서는 당장 민중 저항이 일어나기는 힘들다’는 송 동지의 주장은 더더욱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송하나 동지는 또 “만약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북한이 민둥산과 재래식 무기에 의존해 베트콩들이 했던 것처럼 십 수 년 간 미국을 전장에 붙잡아 두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수십 년 간 미국의 군사적 수단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냉전의 긴장 관계는 해체됐다”고도 주장한다.

맞다. 세계 최강의 중무장한 강대국을 북한 같은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상비군과 재래식 무기로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핵무장이 미국과 싸워서 살아남으려는 불가피한 수단이 되는가? 아니다. 핵무장은 제국주의를 없앨 수도 전쟁을 방지할 수도 없다. ‘무장을 통한 평화’론은 전형적인 군비경쟁의 논리다.

제국주의는 군사력으로 이길 수 없다. 오로지 피억압 민중의 전인민적 저항과 국제적 연대가 결합될 때만 이길 수 있다. 이것이 베트남전의 진정한 교훈이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은 2001년 10월 7일에 시작돼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미국은 2003년 3월 20일에 이라크 침략전쟁을 시작해 2011년 12월 15일에 종전선언을 했다. 이 두 전쟁에서 미국 제국주의는 지정학적 패배와 재앙을 겪으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반제국주의의 주체

송하나 동지는 “북한의 민중에게 핵은 생존을 담보할 장치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핵과 무기에 대한 투자는 미국의 대북 압박을 줄이기는커녕, 북한 민중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북한 지배계급에게서도 독립된 아래로부터의 일관된 제국주의 반대 입장에 서야 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이고, 따라서 반제국주의가 이 세계체제의 꼭대기에 있는 미국 지배계급에 반대해서 그 세계체제의 일부인 북한 지배계급의 문제점에 침묵하는 것을 뜻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의 입장은 이렇게 되는 것이 옳다. 첫째까지는 송동지가 정리했던 것과 내용이 같다. 그러나 송동지의 이어지는 주장은 첫째 주장과 모순을 일으키며 어긋났다. 따라서 내가 정리한 내용은 둘째부터 송동지와 달라진다.

1. 핵과 북한 사회를 바라봄에 있어 북한 지배계급과 민중을 구분해야 한다.

2. 현재 북한의 조건과 미국의 군사력으로 볼 때, 오로지 북한 민중의 아래로부터 투쟁과 국제적 노동계급의 연대만이 제국주의를 패퇴시킬 수 있다.

3. 이런 국제적 반제국주의 투쟁의 건설은 그 누구도 아니라 북한 민중과 남한 민중, 전세계 노동계급의 몫이다.

송동지가 진정으로 “북한의 민중을 세뇌된(우매한) 존재, 혹은 폭력에 지배당하는(불쌍한) 존재”로 보지 않고자 한다면 ‘반제국주의 투쟁의 과제는 북한 민중의 몫이 아니다’라고 봐선 안 된다. 북한 노동계급은 북한 지배관료를 타도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남한·국제 노동계급과 더불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설 우리의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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