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60주년:
제국주의와 평화는 양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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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참혹한 열전으로 바뀐 사례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개입과 이에 따른 중국군(과 일부 소련군)의 참전으로 곧 강대국 간의 전쟁이 됐다. 한때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미군과 한국군은 중국군의 반격에 밀려 다시 후퇴해야 했다. 1951년 초 전선은 38선 근처를 중심으로 다시 교착했다.
양쪽 진영 누구도 상대방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어렵다는 게 드러나자 1951년 6월부터 전쟁중단 협상이 시작됐다. 근본적으로 미국과 소련 모두 이 전쟁이 제3차세계대전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우려를 공유했다. 한반도에서 수백만 명의 피와 죽음을 재물삼아 힘을 겨뤄 본 것으로 일단 만족한 것이다.
그러나 정전 협상은 무려 2년을 더 끌었다. 양대 강대국들이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에서, 최대한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면서 ‘우아하게’ 전쟁을 종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전 협상과 가장 추악하고 잔인하고 소모적인 전투가 병존했다. 특히 미국은 ‘협상 종료시까지 전투 지속’을 내세우면서 전쟁의 양상을 더욱 야만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협상 종료 직전까지 겨우 한 뼘의 땅을 더 차지하려 병사 수십만 명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미국은 협상 교착 타개를 명분으로 핵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위협했다. 또, 북한 전역에 무차별 공중폭격을 가해 1백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 완수’를 외치며 정전을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과 통치가 남한에 그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 민중은 이 끔찍한 전쟁의 종결을 원했다.
결국 전쟁은 강대국 간의 협상으로 종결됐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온갖 폐허와 인명살상, 분단고착과 상시적 전쟁 위험을 남겼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한반도]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력행위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협정이 체결됐다는 사실이 평화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정전협정은 체결되자마자 종이조각이 됐다. 예를 들어 정전협정 13항에는 국외로부터 무기 반입과 신무기 증강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지만, 양측은 군비증강을 재개했다. 특히 미국은 1957년 북한의 미그 전투기 반입을 빌미로 이 조항을 아예 일방적으로 무효화시켜 버렸다.
핵무기
그러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 조항을 무력화시킨 실제 이유는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우파의 거짓말과 달리 우리에게 ‘핵을 머리에 이고 살’도록 제일 먼저 강요한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이 이 조항을 폐기해 버림으로써 한반도에서는 고삐 풀린 군비경쟁이 본격화했다. 이러한 군비경쟁은 남북한 민중의 복지 희생과 고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정전협정의 ‘비무장지대’ 규정은 비무장지대(DMZ)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지뢰밭이 됨으로써 희화화됐다. 군사분계선상의 무장 충돌과 후방 침투 행위도 끊이지 않았다.
남한 지배자들이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와 그 ‘만행’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북한이 1950~99년까지 파견한 남파공작원의 숫자는 6천4백46명이다.
반면 남한은 최소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전까지 실제 북파를 수행한 ‘북파요원’이 1만 1천2백73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7천8백여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베트남 파병 한국군 사망자(5천여 명)보다 많은 숫자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과 민간인 수천 명이 살해된 건 물론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NLL(북방한계선) 문제도 애초 북한에 대한 남한 측의 공격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남한 해군은 빈번히 북한 항구를 공격한 바 있는데, 미국이 이를 저지하려고 임의로 그은 선이 NLL이었던 것이다.
사실 한미군사동맹과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자체가 정전협정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한반도 통일과 외국군 철수를 위한 정치협상을 진행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1953년 체결된 한미군사동맹과 이에 따른 주한미군의 상시주둔 체제는 1954년에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을 시작부터 공허하게 만들어 버렸다. 또, 팀스피리트 훈련 등 주기적인 대규모의 대북 적대 훈련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상시화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역시, 모든 종류의 해상봉쇄를 금지하는 정전협정 위반이었다.
게다가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래 한반도에서는 대규모 전쟁의 위험도 빈발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조성된 전쟁 위기,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때의 전쟁 위기, 그리고 1994년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시도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