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영화 〈설국열차〉:
열차를 멈추고 뒤엎을 수 있는 힘은 노동계급에 있다
〈노동자 연대〉 구독
영화 감독들은 반란을 이렇게 저렇게 은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무척 추상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속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다가올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준비하는 것이다. 끝을 모르고 깊어만 가는 경제 위기, 세계 곳곳으로 점차 번져 가는 반란의 불길 속에서 이 과제는 점점 더 중요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
경제 위기가 깊어감에 따라 위기에 따른 고통을 전가받는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의 분노도 커져 가고 있다. 상업 영화는 이처럼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사회적 불만과 분노를 민감하게 담아내 대신 분출해 주곤 한다. 〈도가니〉, 〈부러진 화살〉, 〈레미제라블〉 등의 영화들이 그 같은 맥락에서 흥행할 수 있었고, 〈설국열차〉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더 테러 라이브〉 역시 갖가지 방식으로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목숨을 잃은 이들의 억울함과 분노가 러닝타임 전체에 꽉 채워져 강렬히 울리는 영화다.
이 같은 시기적 맥락에서 개봉한 〈설국열차〉는 반란에 관한 이야기다. 비록 이 영화가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있는 ‘반란’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가 닿고 있는지, 관객들이 얼마나 이 영화를 반란에 관한 이야기로 독해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하워드 진의 명언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열차를 통해서, 봉준호 감독은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인간을 희생하는 체제인지, 왜 우리가 이 체제를 단순히 고쳐서 쓸 수 없으며 반드시 체제를 멈추고 해체해야만 하는지, 혁명을 중간에서 멈추는 것이 어떤 처참한 결과를 낳는지, 또한 체제가 반란의 지도자들을 어떤 식으로 포섭하려 시도하며, 혁명적 과제를 중도에서 멈추고 타협하려는 개량적 지도자들이 체제의 유지·지속에 어떤 구실을 하는지에 대해 그 스스로가 나름대로 이해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주제들에 대한 영화의 관점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껏 개봉한 비슷한 주제의 다른 상업 영화들에 비해 이 영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방식에 대한 훨씬 구체적인 은유를 시도했으며 그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점은,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열차와 현실의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핵심적인 부분에서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엔진
영화의 은유가 가장 핵심적으로 실패하는 부분은, 현실의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엔진은 저 머나먼 열차 맨 앞 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노동자들이 매일 땀 흘리며 숨쉬는 작업장에 있다는 점이다. 열차를 멈추고 뒤엎을 수 있는 힘이 이미 노동자들의 손아귀 안에 있기에, 혁명에서 중요한 부분은 엔진에 도달하기 위한 영웅들의 분투가 아니라 단결해서 탄압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대오에 있는 것이다. 소수의 영웅들을 엔진으로 보내기 위해 피억압자들의 단결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억압자들의 단결을 지켜내기 위해 영웅적 투사들이 어떻게 역할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에도 노동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열차 뒷칸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앞 칸으로 불려간 이들은, 열차의 중간 칸에 머무르면서 열차 앞칸의 승객들을 위해 야채를 재배하거나, 물고기를 기르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영화에서 이들의 숫자는 매우 적게 묘사될 뿐만 아니라, 피억압자들의 반란군이 열차 앞칸으로 진군할 때 이들 노동자들은 무기력하게 방관하며 기존 체제에 협조할 뿐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이 같은 영화 속 노동자의 묘사는, 혹시나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는 체제에 포섭되어 복무할 뿐이라는 관점을 반영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비현실적인 것은 정작 열차의 엔진은 약간의 유지 관리를 제외하면 별다른 노동 없이도 저 혼자 잘 돌아간다는 것이다. 현실에 저런 열차가 있다면 하다 못해 수십 년씩 멈추지 않고 달리기 위한 연료를 만들고 공급하는 데만도 막대한 노동이 필요할 것이다. 당연히 이 노동은 열차 내 사회 전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노동이기 때문에, 열차의 지배자들은 이 노동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쉴틈없이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들 것이다.
이 같은 일상적인 충돌과 갈등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이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학습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이렇게 각성하고 훈련된 노동자들이 반란의 핵심 주역으로 일어서는 것이 바로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무임승차자
반면 영화 속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지배자들로부터 소위 ‘무임승차자’들로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열차를 움직이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열차 맨 뒷칸에 버려져 굶주리고 더러 팔다리를 잃은 비참한 이들이다. 이들의 비참함과 분노가 영화 속 반란의 원동력이 된다.
현실의 자본주의에서 ‘가장 비참한 이들의 분노’는 체제 변혁을 위한 반란에서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체제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배제된 이들은 오히려 진정한 적을 분명히 깨달을 기회를 갖기 어려우며,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노동조합, 이주자, 소수자 등을 적으로 여기게 되기 쉽다. 가장 비참한 이들만이 싸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싸움을 이끌려는 지도자가 굳이 한 팔을 잃는 초인적 인내와 자기희생을 통해 비참한 이들과 동등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또 한 가지 비현실적인 부분은, 열차 내 식량과 자원이 한정돼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배자들이 이 ‘무임승차자’들을 몰살하거나 내쫓지 않고 상당한 인구의 사회를 갖추게끔 그냥 내버려둔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이들이 인구의 핵심적 비중을 차지하거나 조직을 갖춰 반란을 일으킬 힘을 갖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같은 혁명적 역할을 하는 사회 집단은 바로 노동계급, 특히 조직된 노동계급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은, 열차는 현실의 자본주의의 일부 측면을 은유하는 데 탁월한 도구일 수 있지만, 어쨌든 현실의 사회는 열차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현실에는 계급이 존재하지만, 계급 간의 장벽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은폐되어 있으며 각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구별 없이 뒤섞여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중간계급과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노동계급만의 혁명, 혹은 그 반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영화에서처럼 맨 뒷칸의 빈민들이 겪는 비참함이 중간 칸의 승객들에게 전혀 목격되지 않는 일은 벌어질 수 없으며, 빈민들만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진군할 때 중간 칸의 승객들이 그들에게 공감하지도 반감을 갖지도 않으면서 그저 방관하는 일도 벌어질 수 없다.
혁명은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계급, 사회 집단들의 다양한 불만과 분노를 안고 출발할 것이며, 그 과정 전체에서 갖가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다양한 주장과 토론하고 때로는 맞서야 할 것이다. 혁명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은 모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호민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혁명은 우리 시대의 현실이기 때문에,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자 하는 혁명가들에게는 혁명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벌어질 것인지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 의미 없지 않을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의 표현을 가능케 하는 상업영화는 때로 혁명적 상상력을 돕는 촉매가 될 수 있다. 영화 속에 묘사된 혁명과 실제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영화를 감상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