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자본주의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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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자본주의의 변화
정성진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이 글은 필자가 5월 22일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원문은 http://iss.gsnu.ac.kr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큰 변화를 겪고 있는데, 그 방향은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의 기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상당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진보진영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견해는 이를 “금융화” 또는 “금융 주도 축적체제”로의 이행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장하준, 유철규, 전창환, 크로티, 뒤메닐 등은 그 대표적인 논객들이다.
이들은 1997년 이전의 한국 경제는 견실했으며, 자본축적의 근본 모순이 아니라 금융자유화라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1997년 위기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또 이들은 IMF와 김대중,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금융화”를 가속시켜 경제위기를 더 심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케인즈주의적 “금융 억압”을 실시하여 재벌의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분리할 것을 대안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회주의 정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개혁 자본주의의 입장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1997년 위기를 전후한 한국자본주의의 구조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1997년 위기는 단순한 금융위기가 아니라 자본축적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한 결과다. 둘째, 1997년 위기 이후의 사회 변화의 기본 성격을 “금융화” 또는 “금융 주도 축적체제”로의 이행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셋째, 1997년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의 핵심은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한 국내외 자본의 공세이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와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
이윤율의 저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설 때, 자본주의 경제의 변동을 설명하는 핵심적 지표는 경제 전체의 평균이윤율의 추이이다.
〈그림 1〉에서 보듯이 제조업 부문의 이윤율이 1970년대 초반의 16퍼센트에서 1980년대에는 8퍼센트로, 1996년에는 4퍼센트로 하락했다. 특히 1997년 위기 이전인 1986∼1996년 동안 이윤율은 1986년 9.2퍼센트에서 1996년 4퍼센트로 하락했다.
이런 사실은 1997년 이전 시기의 실물 부문의 수익성 저하, 이른바 “펀더멘탈”의 악화를 부인하는 “금융화” 논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준다. 이윤율은 1996년에 바닥을 친 다음 1997년 위기 이후 회복하기 시작했지만, 2000년에도 이윤율은 5.7퍼센트로, 1970년대 이윤율 수준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 경제가 21세기 들어서도 지난 세기 말에 시작된 구조적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한국 경제가 투자와 고용의 증대를 수반하는 새로운 호황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윤율이 적어도 1987년 이전 수준을 회복해야 하지만, 한국 경제의 현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몽상처럼 보인다.
〈그림 1〉은 또 1997년 위기 이후 경기 회복을 가능하게 한 이윤율의 상승이 1982∼1986년 경기회복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윤몫의 증가, 즉 착취율의 증가에 전적으로 기초했음을 보여 준다. (이윤율(P/K)=이윤몫(P/Y)×자본효율 (Y/K)) 이윤몫은 1996년 28.9퍼센트에서 2000년 42.5퍼센트로 증가했다.
이와 같은 이윤몫의 가파른 증대는 자본효율의 하락을 충분히 상쇄하여 이윤율 상승에 기여했다. 1997년 위기 이후 착취율 상승은 1997년 이전까지 나타났던 노동자계급에 대해 우호적인 추세들, 예컨대 국민소득에서 임금몫의 증가 추세, 소득 분배의 불평등의 개선 추세, 노동시간의 감소 추세 등이 중단되거나 역전되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장하준, 유철규, 크로티 같은 경제학자들은 1997년 이후 경제 추세의 특징은 “금융화”나 “금융 주도 축적체제”로의 이행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금융화”가 1997년의 위기뿐 아니라 현재 한국 경제 위기의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산업자본은 생산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반면 금융자본은 투기적이고 기생적이라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들에 따르면 “금융화”란 이윤이 이자나 배당 등의 형태로 금융 부문으로 유출되는 현상, 또는 이와 같은 금융 부문으로의 이윤 유출을 고려한 이윤율이 이를 고려하지 않은 이윤율보다 높았다가 낮아지는 현상, 그래서 후자에 수렴하는 현상, 비금융기업의 유형자산 대비 금융자산의 비중이 증가하는 현상, 비금융기업의 채무가 증가하는 현상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현상들은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일시적이었다. 〈그림 2〉에서 보듯이 비금융기업의 영업이익 대비 이자·배당·임대료 등 금융 부문으로의 유출액의 비율은 1980년대 이래 50퍼센트 수준으로 안정적이었다.
금융화?
이 비율은 1997년 위기 다음 해에 거의 100퍼센트 급상승했지만, 2000년에는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또 한국의 경우 1980년대 이후 금융 부문으로의 이윤 유출을 고려한 이윤율은 이를 고려하지 않은 이윤율보다 항상 낮았다.
그리고 비금융기업의 유형자산 대비 금융자산의 비중도 1970년대에 40퍼센트에서 1980년대에는 65퍼센트로 증가했지만 199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금융기업의 채무는 1997년 위기 이후 오히려 감소했다.
실물 부문에서 금융 부문으로 잉여가치의 유출은 1997년 이후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이른바 “고부채” 모델인 한국 경제에 고질적인 특징이었다. 더욱이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이른바 “금융주도적 축적체제”를 성립시켰다고 보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신자유주의는 안정적 “축적체제”의 성립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시장경제의 사회적 조절”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에서 나타난 주된 특징 중의 하나는 “금융화”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종속의 심화다. 사실 “금융화”란 1997년 위기 이후 자본시장의 자유화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 확대의 다른 말일 뿐이다.
경제적 종속의 심화
지난 1980년대 한국사회 성격 논쟁에서 한때 한국자본주의의 자립화론, 종속 약화론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종속은 1997년 위기 이후 다시 심화하고 있다. 이는 주식시장의 외국인 지분 40퍼센트 돌파와 같은 금융 부문에서의 종속 심화뿐만 아니라, 수출 의존의 심화, 국내 산업연관의 약화, 생산수단의 수입 의존의 심화, 가치의 국외 유출 증대 등과 같은 실물 부문에서의 종속 심화에서도 확인된다.
GDP 대비 수출 비중은 1970년 13.8퍼센트에서 1987년 39.7퍼센트로 증가한 후 그 뒤 약간 감소했다가 1997년 이후 다시 증가하여 1998년 49.7퍼센트로 치솟았다. 하지만 GDP 대비 투자의 비중은 1997년 35.1퍼센트에서 2002년 26.7퍼센트로 급락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국내 산업연관이 약화되어 수출 증가는 생산 증가를 유발하기보다 수입 증가를 유발하고 있다.
즉 수출 증가의 생산 유발계수는 1990년에 1.99에서 2000년에 1.87로 감소한 반면, 수출 증가의 수입 유발계수는 1993년에 0.28에서 2000년에 0.37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경제적 종속의 정도를 측정하는 핵심 지표인 생산수단의 수입 의존도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심화되고 있다.
〈그림 3〉에서 보듯이 제조업 부문 민간고정자본형성 가운데서 수입품의 비중은 1990년대 초까지는 감소하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시 증가하여 1993년 31.3퍼센트에서 2000년 42퍼센트로 급증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종속의 심화 결과 기술사용료와 외채 이자지불 및 이윤송금의 합으로 계산한 가치의 국외 유출액은 1994년 40억 달러 수준에서 1998년 110억 달러로 급증했다.
이상의 사실들은 1997년 위기 이후 한국의 자본축적의 추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타당성을 확증해 준다.
즉 1997년 위기는 단순한 금융 위기가 아니라 자본축적의 구조적 모순의 심화 결과다. 이런 사실은 1997년 위기 이전의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서 입증되었다.
또 1997년 이후 한국 경제 변화의 기본 성격은 “금융화”라든지, “금융 주도 축적체제”라는 용어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도 판명되었다. 비금융기업 이윤의 금융 부문으로의 유출 증가 등으로 정의되는 “금융화” 현상은 1997년 이후 한국의 사례에서 입증되지 못했다.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이행의 본질은 오히려 이윤율 회복을 위한 국내외 자본의 공세이며 이 과정에서 격화되고 있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와 경제적 종속의 심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