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먹튀와 진보의 대안 논쟁:
‘부자에게 세금, 노동자에게 복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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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에 이어 박근혜의 복지 공약 먹튀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대선 공약이던 ‘저소득층 가구의 12개월 영아까지 조제분유 및 기저귀 지원’ 사업과 ‘경로당 냉·난방비 지원 사업’ 예산도 전액 삭감됐다.
기초연금도 실제 입법예고된 법안은 발표한 내용에서 더 후퇴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소 수급액은 10만 원인 것처럼 말해 놓고 실제로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기초연금 인상 기준을 ‘물가’로 바꿔 기초연금의 실제 가치는 점점 떨어질 것이다. 결국 24년 뒤에는 최고 수급액이 현재 가치로 따져 10만 원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반면 평생을 공주처럼 산 박근혜는 지금도 월급으로 1천6백만 원을 받고, 퇴임 뒤에는 현직 대통령 월급의 95퍼센트를 연금으로 받을 것이다. 4대강에 세금 수십조 원을 쏟아부은 이명박도 지금 매달 1천만 원이 넘는 연금을 받고 있다.
이런 자들이 난방비가 없어 옷을 아홉 겹이나 껴입고 목장갑까지 끼고 자다가 얼어 죽은 채 5년 뒤에 발견된 할머니의 삶을 이해할 리 없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슬픔과 함께 괜한 불안감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의 심정도 말이다.
박근혜는 불만이 확산되며 지지율이 급락하자 복지 공약 ‘폐기’는 아니라며 증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국민대타협위원회를 만들어 복지와 증세를 연동시키는 방안도 논의하겠다”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번 세법 개정안에서 드러난 것처럼, 박근혜가 내놓을 증세안은 십중팔구 노동자 증세가 될 것이다. 워낙에 소득 양극화가 심하고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돼 있는 조세 제도 때문에 ‘보편적 증세’도 실제로는 노동자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울 것이다.
진보정당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박근혜에 맞서 부자 증세 등 여러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는 “재벌과 고소득층에 대해서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경제 위기 심화 속에서 세출은 늘어나고 세수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판과 폭로뿐 아니라 분명한 대안 제시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돈은 어디에서
그 점에서 진보진영 일부가 제시하는 ‘보편적 증세’ 대안은 부적절하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오건호 공동위원장은 “지난번 박근혜 정부의 세제개편안은 부족하지만 감세 기조를 처음으로 증세 기조로 전환했다는 의미에서 큰 방향에서는 바람직한 결정”이라며 “중산층부터 누진 동시 과세를 시작해야 부유층을 압박하며 부자 증세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가 나서서 기업주·부자의 세금을 줄여 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편법·불법으로 세금을 떼 먹고, 나아가 수백조 원을 해외에 빼돌리는 상황에서 ‘중산층부터 과세’가 얼마나 효과를 낼까.
박원석 정의당 의원도 최근 사회복지세 신설 법안을 발의했는데, 먼저 2016년까지는 소득세를 1천만 원 이상 내는 고소득자들(전체의 3~5퍼센트)과 법인세액 1백억 원을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 중과세하는 부자 증세안이다.
그런데 박원석 의원은 2017년부터는 모든 소득세액의 10퍼센트를 사회복지세로 걷는 증세 계획을 제시했다. 또 연간 4천5백만 원을 넘는 소득 초과분에 대해 5퍼센트의 근로소득공제를 해 주는 것을 폐지하도록 했다. 노동자 일부에게도 세금 부담을 늘리는 것이다.
법인세 인상에 소극적인 태도도 있다.
예컨대 시민경제사회연구소 홍헌호 소장은 “막연하게 대기업이 더 내야 한다는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며 법인세 인상은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는 ‘법인세 인상이 기업의 투자 감소와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신경쓰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선진국들에 견줘 법인세율이 크게 낮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삼지만, 노인빈곤율 1위, 자살율 1위인 나라에서 법인세율이 높아서 안될 까닭이 없다.
게다가 “10대 재벌 그룹이 이익 가운데 배당이나 투자를 하지 않고 사내에 유보한 규모가 2012년 현재 4백5조 원에 이른다. 그중에서 당장 현금으로 동원 가능한 현금성 자산도 현재 1백23조 7천억 원이다. 세금 더 내고 나면 돈이 없어 투자 못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소장)
단결을 위한 요구
오늘날처럼 경제 위기가 장기화하는 시대에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이 아니라 기업주·부자에게서 재원을 가져와야 실질적인 재분배가 가능하다. 박근혜의 ‘증세 없는 복지’가 파산한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자본가들도 어느 정도 복지가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예컨대 전염병 예방을 위한 시스템, 일정한 교육, 최소한의 주거, 출산율을 유지하기 위한 서비스 등은 자본가들도 대부분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런 것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생산에 차질이 생겨 이윤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보편적 대학 교육, 충분한 노후연금, 노후에 큰 부담이 되는 질병에 대한 의료 서비스 등 말이다.
오늘날 같은 장기 불황에서는 자본가들에게 이처럼 노동자들이 바라는 복지를 위한 투자는 그 우선순위에서 한참 아래에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오늘날 복지를 확대하려면 노동자들이 단결해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요구가 필요하다. 투쟁이야말로 이런 요구를 성취할 가장 현실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투쟁에 나설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만들거나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대안은 현실에서 큰 도움이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자에게 세금을, 노동자에게 복지를’이라는 한국 진보진영의 전통적인 요구는 여전히 유효하고 적합한 요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