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환 신임 정책위의장의 사회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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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환 신임 정책위의장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에 결코 이를 수 없는 미로
김인식
민주노동당 새 정책위의장으로 당선된 주대환 씨는 스스로를 “정치사상적으로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는 “유권자들”이 “남한의 보수 정당들과 영국 노동당을 비교하”고 있지, “영국 노동당과 어디에 존재하는지 잘 모르는 이상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과 비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같은 진보 정당을 만들고 스웨덴 같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www.kdlp.org 당원 게시판에서).
따라서 “지금 우리는 우선 눈에 보이는 봉우리[사회민주주의]로 올라가고 있”고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만 해도 너무나 아득해서 차라리 소원”이라고 말했다(www.happo.kdlp.org).
보수 정당들을 혐오하는 많은 사람들이 서유럽 진보 정당들을 동경하는 것은 거의 자연스럽다.
그리고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 같은 정당들과 영국 노동당은 물론 다르다. 이 정당들이 자본가와 상층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당이라면 영국 노동당은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당이다. 영국의 노동조합들은 매년 9백만 파운드(180억 원)를 노동당에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주대환 의장은 영국 노동당의 정책이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토니 블레어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해 군대를 보냈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열렬하게 옹호하고 있다.
주대환 의장이 모델로 삼고 있는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민당은 ꡐ제3의 길ꡑ 또는 ꡐ신중도ꡑ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고 있는 대표적인 당들이다.
신자유주의는 한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지했던 복지국가(사회보장제도)를 해체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골자는 국가가 물러나고 그 자리를 시장이 메우도록 하자는 것이다.
서구에서 이 과정이 한 세대 이상 지속됐고 그 누적 효과가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심각하게 뒤흔들고 있다.
우리 민주노동당이 강령에서 “사회민주주의 한계를 극복”하겠다고 밝혔던 것도, 적지 않은 당원들이 사회민주주의에 비판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목표
주 의장이 옹호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민주노동당 강령)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않고도 노동계급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리고 좀더 규제된 자본주의 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지향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시장 변동에 따라 개개인의 삶이 나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 이 체제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복권 같은 삶을 강요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매우 낭비적인 체제다. 경제 위기는 인간과 물적 자원을 쓸모 없게 만든다. 체제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계적으로 수십억 명이 잉여 인간이다. 이들은 절망적인 가난으로 내몰린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비민주적이다. 한줌의 기업 이사들이 중요한 경제적 결정을 내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나 광범한 대중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지난 5월에 〈조선일보〉와 갤럽이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6.6퍼센트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문제 있는 체제”라고 답변했다.
이런 반자본주의 정서가 민주노동당을 대중 정당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규제한다고 해서 이런 체제의 결함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개혁적인 운동을 통해 자본주의에 가한 제약들은 이윤의 필요에 따라 내팽개쳐지곤 했다. 이것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진행된 케인스주의 복지국가의 점진적 해체가 주는 교훈이다.
물론, 좀더 규제된 자본주의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해서 국가에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공 서비스가 공격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방어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서비스를 확대하고 개선하기 위해 국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조세 개혁을 통해 공공 서비스를 공급하고 뒷받침하도록 해야 한다. 부자들의 재산과 소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해야 한다.
현 체제의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것은 완전히 옳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와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 대안은 바로 사회주의다. 오늘날 이 말은 스탈린주의의 실험 때문에 평가절하돼 있다. 또, 당내 좌파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그 내용과 수단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탈린주의의 경제적 본질은 관료적으로 중앙집중화한 지령 경제다. 사기업 자본주의가 시장 경쟁을 통해 자원을 배분했다면, 스탈린주의는 명령으로 자원을 배분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질곡 극복”에 필요한 중요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사회주의 사상의 주요한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는 생산 자원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기업화에 맞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대기업주들은 경제적 소유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지적 재산권을 위해 매우 공격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라.
우리가 이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요한 생산 자원을 민주적으로 사회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꺼려서는 안 된다.
수단
주대환 의장은 “그[사회민주주의] 봉우리에 올라서면 비로소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진짜 정상이 보일지도 모릅니다.”(www.happo.kdlp.org) 하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 기착지가 아니다. 둘은 완전히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다.
20세기에 여러 서유럽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정부들이 등장했지만, 그 나라들은 사회주의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를 향해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증거도 없다.
오히려 사회민주당 정부들은 사회주의 투쟁을 고무하는 것은 고사하고 개혁을 위한 투쟁조차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
1920년대 말 영국 맥도널드 정권의 대실패, 1930년대 초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와 히틀러의 등장, 1930년대 민중전선과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드골의 집권으로 이어진 프랑스 연립정부의 파산이 그런 경우였다.
사회민주당들이 한사코 기존 사회 제도를 개혁 성취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그 실패는 필연적이었다. 그들에게는 파업과 시위 같은 의회 밖 투쟁 방식도 결국 의회 같은 기성 채널을 통한 사회 변화를 보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도전하려는 시도에 완강히, 때로 폭력적으로 저항했다. 부자와 권력자들이 경제 권력을 실제로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하면 칠레의 9․11을 보면 된다. 1973년 칠레에서 미국이 지원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했다.
따라서 근본적 사회 재편을 위한 운동은 의회 내 투쟁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폭력적 저항에 대처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런 준비는 투쟁 속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고, 그 지지를 조직하는 것이다. 작업장과 지역사회 단체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운동이 탄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닐수록, 사회 운영 능력을 갖출수록, 그 힘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는 사회와 유기적 연관성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