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인들의 저항은 여전히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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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인들의 저항은 여전히 정당하다
이라크 저항 세력의 무장 저항은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낳기도 한다. 이번에 김선일 씨의 불행한 죽음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이 무고한 민간인을 노리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항 세력의 공격 대상은 대부분 민간인이 아니라 점령군과 이에 부역하는 세력이다.
미군에 대한 매복 기습이나 폭탄 공격은 점령의 주된 측면인 군사력에 물질적․정신적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꼭두각시 임시정부의 요인을 포함해 경찰과 치안군에 대한 공격은 미 제국에 부역하는 세력이 조직되기 전에 공격한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최근 북부에서 남부까지 동시다발로 발생하고 있는 송유관 공격은 미국의 중요한 전쟁 목적 중 하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공격 덕분에 미국의 위선적인 ‘주권 이양’의 의미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됐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에 결정적인 균열이 생겼다. 이 때문에 저항 세력은 이라크인들로부터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전 세계 반전 운동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저항 세력 중 일부는 이번 김선일 씨 살해처럼 의도적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기도 한다. 이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잔인한 테러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를 냉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충격과 공포’
저항 세력이 택하고 있는 가장 잔인한 수단조차 미군이 먼저 사용했다. 처형된 사람의 모습을 방송으로 보여 줘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이라크의 전통적인 투쟁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미 점령군이 먼저 시작했다. 미군은 작년 8월 후세인의 두 아들을 사살한 후에 총알로 벌집이 된 시체를 며칠 동안 방영했다. 이후로 비슷한 방송이 반복됐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충격과 공포’, 즉 본보기를 통해 이라크인들을 “신체적․감정적․정신적으로 굴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은 이 원리에 충실했다. 미군은 알자르카위가 실제로 있건 없건 결혼식장․주택가․붐비는 시장을 폭격했다. 실제 저항에 개입했느냐에 상관 없이 아무나 잡아들여서 아부 그라이브에 감금하고 고문했다.
이러한 전략의 결과는 끔찍했다. 최소 1만(이라크 바디 카운트 추산)에서 최대 5만(메드 액트 추산) 명의 이라크인들이 미군에 의해 살해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 세력 중 일부는 미군처럼 민간인에 대한 보복을 꾀했다. 이미 지난해 10월에 〈인디펜던트〉의 세계적 기자인 로버트 피스크는 이라크인 중 일부가 “미군 따라하기”라는 새로운 전략을 택했다고 지적했다. 근본적인 책임은 점령을 유지하기 위해 끔찍한 방법을 사용한 미국 점령군에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저항 정서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을 지지할 수는 없다.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테러는 당사자에게 비극이다. 희생자는 김선일 씨처럼 부시와 럼스펠드가 이라크에서 저지른 만행에 분노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방법의 더 큰 문제는 점령에 저항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오히려 테러를 당한 민간인의 국내 반전 대중과 이라크 저항 세력이 서로 멀어지게 만들 수 있고, 국제 반전 운동 대열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각국의 지배자들은 이러한 분열을 철저하게 이용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 평화단체처럼 모든 종류의 무장 저항을 거부하는 식의 또 다른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이라크는 분명히 군사적 점령 상태에 있고, 이라크인들은 효과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 거기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국제 반전운동의 의무는 비록 선의에서라도 지배자들의 위선적인 평화 공세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인들의 정당한 저항을 지지하는 국제 반전운동을 건설하는 데 있다.
김용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