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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원의 활자가 남긴 한국 노동자의 고민

[편집자 주] 이 글은 국제민주연대가 발행하는 《사람이 사람에게》(2001년 1·2월호)에 실렸던 것으로, 학생 그룹이 발간한 《아셈 반대 투쟁 평가》를 서평한 것이다. 필자와 국제민주연대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재수록 한다.

흔히 인쇄된 글자를 활자(活字)라고 한다. 살아 있는 글자라는 뜻이다. 원래 활자는, 아주 작은 금속막대기 끝에 볼록하게 글자를 새긴 것을 가리킨다. 지금 쓰이는 컴퓨터조판시스템(CTS)이 활성화하기 이전에는 주로 납 활자를 이용해 인쇄를 했다. 활판이라는 틀 속에, 원고에 맞춰 활자를 하나하나 집어넣은 뒤, 이를 이용해 판을 만들고 종이에 찍어냈던 것이다. 그래서 활자라는 말이 의미확장 과정을 거쳐 이런 과정을 거쳐 찍혀나온 인쇄물에도 따라붙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책에 인쇄된 글자를 '활자'라고 부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쇄된 글자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글자'가 되라는 의미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살아 있다'니, 글자가 말이라도 한다는 것일까?

책에 쓰인 글자들이 하는 일들을 보자. 이 글자들은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한다. 또 한 사람이 느낀 감동을 다른 많은 이들이 함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뿐인가. 책에 쓰인 글자는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역사를 증언하기도 한다. 글자가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살아 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1년 동안 필자의 책꽂이도 이런 '활자'들로 몸피가 늘어났다.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전기, 탈북자들의 고난한 삶을 그린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정토출판) 등 북한과 관련된 책들,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비판한 하랄트 뮐러의 〈문명의 공존〉(푸른숲) 등 인류가 나아갈 길을 큰틀에서 제시하고 있는 사회과학서들 ….

한해를 넘기면서 새로 불어난 책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려본다. 모두 내 손에 들려 읽힘으로써, 지식을 주고 감동을 주면서 '활자'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들이다. 이번 호에는 이렇게 지난해 여러 인연으로 만났던 책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값이 싼(값이 싸다고 내용도 값싸게 취급돼서는 안된다) 책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800원짜리인 이 책은 '활자'라는 뜻을 여러모로 짚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이 펴낸 〈세계의 반자본주의 운동과 아셈 반대 투쟁 평가〉다.

'에이파이브(A5)'의 작은 크기에 부피도 총 48쪽에 불과한 〈…아셈 반대 투쟁 평가〉의 주된 내용은 지난해 10월 20∼21일 서울에서 열린 아셈 회의 때 우리나라 시민단체 및 노동진영의 투쟁을 평가해놓은 것이다. 〈…평가〉는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이 펴낸 책답게 평가의 중심에 '민주노총'을 놓는다. 이 작은 책은 "아셈 반대 투쟁 집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 "다른 나라들의 아셈 집회 등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이 시민단체(NGO)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우리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가〉는 이와 함께 민주노총이 '우왕좌왕'했던 모습도 꼬집는다. 정부를 의식한 탓인지, 민주노총은 아셈 반대 집회 장소가 여러 차례 바뀌는 데 일조했고, 좀더 힘있는 투쟁을 꾸려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평가들에 대해서는 크게 논평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책의 판매 방식이다. 필자는 이 책을 지난해 11월초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의 분신 30주년'을 기리는 민주노총 주최 노동자 집회에서 샀다. 그렇다고 거창한 판매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판매는 주로 학생들이 집회에 참가한 노동자 사이를 오가며 이루어졌다.

필자도 집회장 주변에서 이런저런 유인물을 모으다 한 여학생에게서 이 책을 샀다(유인물 모으기는 필자가 집회에 가서 하는 '오래된 취미'의 하나다. '금서'가 많았던 80년대에는, 집회장에 뿌려진 유인물들은 꼼꼼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 이후로도 필자는 어떤 집회건 참석하면 우선 유인물들을 꼼꼼히 챙긴다).

민주노동당 학생위원장 이원재(28)씨는 이렇게 해서 팔린 〈…평가〉가 약 700권이라고 밝힌다. 그렇게 많지는 않은 수치다. 이는 이들의 기관지격인 〈열린 주장과 대안〉이 1천 500부 가량 나가는 것과 비교할 때도 그렇다. '1천 500'은 현재 민주노동당에 등록한 학생 당원 숫자와 일치한다. 이들은 일반인 당비 1만 원의 절반인 5천 원의 당비를 매달 민주노동당에 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원재 위원장은 학생 당원 숫자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700이라는 책판매 숫자에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노동자대회에서 책 한권 한권을 팔 때마다 책의 내용에 대해 알리고, 때로는 토론도 벌였다고 밝힌다. 그럼으로 해서 800원짜리 작은 책 하나가 아셈 투쟁 때 함께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 투쟁의 의의와 한계를 함께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는 것이다.

그 의도는, 적어도 필자의 경우에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사실 많은 시민단체와 노동단체들이 준비했던 아셈 반대 투쟁에 대해 세세하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개인적인 사정을 좀 얘기하자면, 필자는 당시 선거중이었다. 필자가 입후보했던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신문 지부장 선거가 아셈 서울 회의 직후인 지난해 10월 23일 치러졌다. 선거를 준비하느라 다른 것들에 크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평가〉는 이런 나에게 그 당시 아셈 서울 회의를 놓고 진보진영 내부에서 벌어졌던 여러 논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더욱이 정상적인 출판을 통해서라면 접할 수 없었을,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의 의견을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도 기쁨의 하나다(이는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가〉는 그 분량(A5 48쪽), 시기 ― 〈… 평가〉는 아셈 회의가 열린 지 2∼3주 안에 발간되는 신속성을 보였다 ― 등을 종합해볼 때 일반 출판사의 상업적인 출판물로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700권이라는 판매 숫자는 작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와 같은 '활자' 경험을 했던 사람이 700명 이상이나 될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올 한해 필자의 책장을 채울 책들은 어떤 것들일까. 어떤 것인들 소중하지 않은 책이 있을까마는, 필자는 〈…평가〉와 같은 책자를 많이 만나고 싶다. 시장에 나오기에는 조금은 벅찬,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활자'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그런 책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