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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의 또 다른 의미”에 대한 응답
문명주 씨가 지난 호에 쓴 독자편지 “동북공정의 또 다른 의미”는 분명히 좋은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논증이 좋지 않게 나타날 수 있다. 왜냐하면 문명주 씨는 동북공정의 핵심이 ‘간도 영토분쟁’을 겨냥하고 있다는 한국 민족주의 사학자, 그리고 이명박과 같은 우익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와 전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간도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한국의 우익 이데올로그들이 오히려 간도문제를 ‘영토분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묵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기획기사의 제목은 “우리 땅 우리 혼,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독도와 간도는 물론 대마도와 연해주 지역까지 자신의 영토로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날의 칼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는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 즉 외부를 향한 물리적 행동의 선포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부를 향한 주장 ― 대체로는 계급 분열을 은폐하는 민족적 단결을 주장하는 ― 일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한국 측의 대응은 이런 점에서 동전의 앞뒷면일 뿐이다.
문명주 씨는 이 점을 과소평가하거나, 혹은 너무 진지한 나머지 비약이라는 우를 범하는 듯하다.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통일한국’이 정말로 “영토분쟁”을 일으켜 “연변의 조선족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편입시켜 중국을 체제 존립의 문제로 몰아갈 수 있”을까? 이쯤 되면 그것은 동북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제국주의 질서가 완전히 재편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은 영토분쟁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전통시대 왕조국가의 영역·국경 개념이 현대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국경은 매우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고, 또한 비연속적이었다. 이른바 간도문제의 출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에서 문명주 씨는 좀더 신중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문명주 씨는 ‘지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에서 왜 하필 국경이 분명히 그어진 지도가 18세기 이후에나 등장하고, 또한 압도적으로 서양에서 제작된 것인지에 대한 해명은 없다.
‘지도’ 그 자체는 매우 정치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제작자의 의도와 맥락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않는 이상, ‘영토판명’용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덧붙이자면, 왜 한국 측에서는 간도를 ‘우리 땅’으로 표현한 지도가 없는지도 해명해야 한다. 그런데 문명주 씨의 글에서는 간도가 초역사적으로 한국의 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자유의 공간
조선 후기까지도 조선의 북방방어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경계에서 크게 후퇴해 있다는 점과 심지어 동해안 일부 지역에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을 제쳐두고라도, 간도는 한국 땅이라는 식의 주장은 그 자체로 매우 성립하기 힘들다.
간도가 한국 땅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지역이 고조선·고구려·발해 이래 “한민족”의 영역이었다는 것과, 청조 이래 이 지역은 “임자 없는 땅”이기 때문에 선점하는 쪽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근거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고조선·고구려·발해와 같은 고대 왕조들을 “한민족”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 상상을 인정한다 해도, 발해 이후 이 지역이 북방 여러 종족의 영역이었음은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로, “임자 없는 땅” 논리는 한국의 우익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독도의 경우 일본에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이 바로 이 논리로 독도를 최초로 근대적 국토로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거듭된 비약을 인정해서 간도에 대한 1909년 협약이 문제가 된다고 해도,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북한과 중국이 1962년에 맺은 협약으로 현재의 국경은 압록강-두만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간도지역은 청조의 ‘봉금조치’(출입금지 조치) 이후 한족(漢族)과 조선인의 출입이 매우 엄격해진 지역이었다. 이것은 청조의 일방적 조치는 아니었고, 조선 정부 역시 조선인이 이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매우 엄히 다스렸다. 이 조치는 숙종대에 들어 훨씬 강화됐는데, 예를 들어 이 지역으로 3번 넘어갔다 걸린 자는 목매달아 죽이고, 해당 지방관도 처벌받았다.
이 때의 월경은 농토개간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도망, 채집·수렵, 그리고 종종 청인 농민에 대한 약탈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 때까지 간도는 청-조 양국의 지배력이 닿지 않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청나라의 봉금조치가 해제된 것은 19세기 들어와서였다. 이 조치는 중원 지역의 토지 압박과 러시아의 팽창에 대한 대응이었다. 청나라는 봉금을 해제하면서 변경의 비어 있는 지역을 내실화하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족, 그리고 나중에는 조선인의 이주를 용인했다. 간도지역으로의 조선인 이주도 문명주 씨의 주장과는 달리 19세기 들어와 본격화한다.
이 지역에 대한 당시 청-조 양국 간 분쟁의 맥락도 현대와는 다르다. 분쟁의 핵심은 이주한 조선인에 대한 관할권(핵심은 조세수탈권) 문제이지, 근대적 맥락의 국경분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분쟁의 맥락은 거꾸로 뒤집혀 있다. 즉, 조선에서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해석 문제(즉, 경계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사후 추인 과정에서였지 그 반대가 아니다.
간도 이주 조선인들에 대한 관할권 마찰 때문에 2백 년 가까이 아무 문제도 없었던 백두산 정계비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서간도 지역에서는 대체로 청나라의 관할권이 인정됐다. 다만 북간도 지역은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도 지방행정 구역으로 편입시켜 서로 관할권을 주장했다.
간도문제에 관해 역사적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있다. 그것은 19세기 흉년과 정부의 가혹한 수탈을 피해 목숨을 걸고 이주한 조선 농민들을 악착같이 쫓아가 조세를 수탈하려 했던 조선 정부와, “간도는 우리 땅” 운운하지만 정작 조선족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권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동정도 베풀지 않는 현대 한국의 지배자들은 그 역겨움에서는 꼭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한규한
송두율 교수 석방은 피억압자 운동의 승리
서울고등법원은 7월 21일 송두율 교수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송두율 교수가 1991∼1994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난 점은 유죄 판결했지만, “지도적인 임무를 수행”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검찰의 공소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판사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검찰의 핵심 공소 내용이 “증거가 미흡하다”며 무죄 판결을 내리자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은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검사석에 앉아 있던 검사의 표정은 아연실색 그 자체였고 계속 침울한 표정이었다. 검찰은 징역 7년을 선고한 “1심 형량도 너무 낮다”며 징역 15년을 구형한 바 있다.
우익들은 급진화하는 사회 분위기를 냉각시키고 우리 운동을 위축시키려고 송두율 교수를 마녀사냥해 왔다. 심지어 MBC PD수첩이 송두율 교수 특집 방송을 내보내는 것조차 막으려고 갖은 압력을 행사했다. 옳게도 MBC노조는 “사장 퇴진”을 경고하며 방송을 강행했다.
송두율 교수의 석방은 우리 운동의 승리다. 이제는 국가보안법을 실제로 폐지하기 위해 더 전진해야 한다.
조승희(재판 방청객)
경기침체의 원인을 노조에 전가하는 모건스탠리
미국의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전 세계적으로 경기둔화와 물가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으며 “특히 한국이 가장 취약한 상황”이라며 짐짓 걱정하는 체 했다(〈한국경제신문〉 2004년 7월 14일치).
기분 나쁜 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의 가장 큰 원인이 “경기둔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강성 노조들이 [무리한] 임금인상을 요구해서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로 역겹고 가증스러운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소위 ‘강성노조’의 임금인상 요구는 기업주들이 올려놓은 물가로부터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행동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그 역은 결코 아닌 것이다.
도리어 물가인상은 경쟁적 이윤추구가 낳은 세계적·국내적 차원의 구조적 경기침체 때문에 나타났던 것이다. ‘규제 없는 금융시장’ 같은 무계획적인 자금흐름이 물가인상을 부추기고 경기불안을 가속시켰다.
모건스탠리 아시아태평양 수석이코노미스트인 앤디 시에는 “한국이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했다.
한편, 시에는 중국의 자산 버블의 지속 현상을 지적하면서 국가의 ‘강력한 조치’, 언뜻 들으면 케인즈주의적 방식 같은 것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연합인포맥스 2004년 7월 19일치).
경기순환의 저점과 고점 사이에서 돈을 풀든지 묶든지 양자택일 하는 것밖에 대안이 없는 이 자들이 양념 삼아 용도 폐기된 케인즈주의적 시장개입을 들고 나왔다고 해서 뭐 새로울 것은 없다.
어차피 모건스탠리가 쌓아온 ‘투자 상담과 시장 활동에서의 탁월함에 기인한 세계적 명성’은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의 희생에 기반해서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늘상 말해 온 데에 있기 때문이다.
박 종 남(전국법원노조(준)대의원)
‘금융화’ 테제도 일리 있다
〈다함께〉 33호에 실린 정성진 교수의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기사의 비판 대상인 장하준, 유철규, 전창환 교수들의 주장에 나도 동의하지 않는다.
1997년 이전 한국경제가 건실했으며, 위기는 금융자유화라는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거나 지금의 경제적 이행의 성격에 대해 ‘금융화’, ‘금융주도 축적체제’라고 규정하는 것 등에 특히 그렇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선 정교수가 이들을 비판하려다 다소 간과한 부분이 있지 않나 싶다.
정교수는 “사실 ‘금융화’란 1997년 이후 위기 자본시장의 자유화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 확대의 다른 말일 뿐”이며 따라서 “이윤이 이자나 배당 등의 형태로 금융부문으로 유출되는 현상…비금융기업의 유형자산 대비 금융자산의 비중이 증가하는 현상, 비금융기업의 채무가 증가하는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일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간과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 그리고 설사 그러한 수치들이 이전과 별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현재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전(경기 호황기)과 동일한 효과만을 가질까?
한국 주식시장의 외국인 투자비중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5월 말 기준으로 우리 나라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는 주식 규모 3백47조 원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들의 비중은 43.1%에 이른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핵심 우량기업들의 외국인 지분 비율은 이미 50%를 훌쩍 넘긴 지 오래다―삼성전자(59.0%), SK텔레콤(49.0%), 국민은행(75.9%), 포스코(68.6%).
이들 자본의 상당수는 투기성 단기자본이다. 이들의 특성은 시세차익이 기대될 때 들어왔다가 충분히 이익을 챙긴 다음 더 챙길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털고 일어선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대체로 기업 설비투자 같은 것보다는 오히려 배당이나 자사주를 매입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 보통이다.(최근 대한 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증권거래소 2백대 상장기업 가운데 12.9%가 외국인 주주들로부터 경영 간섭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이 가운데 47.6%는 설비투자 대신 배당을 늘리거나 자사주를 매입하라고 요구받고 있다고 한다.)
빠져나감
이러한 결과로, 올해 3월 증권거래소 상장 주식회사들이 주주들에게 나눠준 배당금은 모두 7조 2천2백66억 원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 가운데 37.4%에 이르는 2조 7백44억 원을 챙겼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밖에도 지난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기업 인수와 증권투자를 통해 챙긴 이익은 모두 7조 5천억 원에 이른다. 1998년부터 따지면 모두 1백10조 원이 빠져나간 셈이다.
지난해 1월, SK텔레콤이 2조 4천9백억 원 규모의 설비투자 계획을 발표했다가 외국인 주식 투자자들이 주식을 투매해, 주가가 폭락하면서 몇 시간 만에 투자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은 이러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기업 설비투자는 지난해 1.5% 줄어든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0.3% 줄어들었다.(올해 18개 기업집단의 투자활동을 위한 순 현금유출은 지난해보다 무려 33%나 줄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이윤율 저하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투자를 기피하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또한 위에서 든 과정(배당이라는 형태의 잉여가치의 유출 압력)이 투자를 부분적으로 저해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부채 문제를 보자. 김상조 한성대 교수의 말에 따르면, 국내 제조업 기업의 설비투자 자금 가운데 외부자금 비율은 1993년∼1997년 72.3%에서 1998년∼2004년 29.0%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을 수 있는 것은 기업이 더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는 것이 주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제조업 기업의 현금 보유고는 65조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이러한 현금의 상당수는 주가 방어와 주주들의 단기적 이익 실현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5월 말 기준으로 대기업 대출금리는 급기야 5.7%까지 떨어졌었다.
이자라는 측면도 살펴보자. 지난 7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삼성·LG·한진·롯데·현대 등 14개 그룹의 2003년도 회계연도 이자비용은 모두 3조 7천4백억 원, 이자수익은 1조 8백억 원으로 집계돼, 이 둘을 뺀 순 이자비용은 2조 6천5백억 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매우 급격한 감소로,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 때문에 두 가지 모순된 효과를 낳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국내외 금리가 모두 낮았다는 점(기존의 부채 상환과 연관된 이자비용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과 기업들이 돈을 벌더라도 투자를 하기보다는 일부를 예금이나 머니마켓펀드(MMF) 등 단기상품에 맡겨 놓고 있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에 비추어볼 때 실물부분에서 금융부문으로의 잉여가치의 유출은 경제 위기 국면이라는 현재에 비추어볼 때 상당한 부담이며 그 효과 또한 실물경제에 실제적인 주름을 지게 할 만큼 파괴적이라는 점 또한 강조하고 싶다.
문명주
반론에 대한 답변
[편집자 : 우리가 정성진에게 문명주의 편지를 보내 주자 그는 즉시 답변을 보냈다.]
문명주 씨의 독자편지는 〈다함께〉 33호에 발표한 나의 글에 대한 반론이라기보다는, 최근 기업의 투자 부진의 원인에 대한 “금융화” 논자들의 주장을 반복한 것이다. 나는 그 글에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이른바 “금융화” 혹은 “금융주도적 축적체제로의 이행”이라는 최근 우리나라 진보적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통념”으로 되어 있는 가설을 이윤율 분석을 중심으로 실증적으로 비판했다.
문명주 씨의 반론은 이와 같은 나의 비판을 전혀 뒤집지 못한다. 문명주 씨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자본의 지분 증대와 이로 인한 외국자본으로의 이윤 유출(배당)의 증대가 최근 기업의 투자 부진과 경제위기의 주 요인이라는 “금융화” 논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문명주 씨가 주목한 이와 같은 현상은 “금융화” 혹은 “금융주도적 축적체제로의 이행”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라기보다, 나의 글에서도 중요하게 분석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심화되고 있는 경제적 종속의 한 양상으로 이해돼야 한다.
아울러, 문명주씨와 “금융화” 논자들이 강조하는 외국자본으로의 이윤 유출의 증대는 최근 기업의 투자 부진의 단지 한 요인일 뿐이며, 이윤율의 추이와 전망이 투자를 결정하는 데서 여전히 결정적임을 환기하고 싶다.
정성진
자아도취에 빠진 탐욕스런 ‘영웅’의 드라마
지난 7월 5일부터 MBC에서 ‘영웅시대’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제작진은 정주영과 이병철을 모델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던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그 중심에 있었던 기업인들의 삶을 통해 조명해 보”기 위해 드라마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또한 드라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로 이명박을 모델로 한 ‘박대철 의원’을 내세웠다.
드라마 제작진은 ‘오랜 기간의 군사독재’와 기업인들의 ‘타협’을 인정했지만, 드라마 초반의 극 전개에서 이런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주영을 모델로 했다는 ‘천태산’은 원산의 탄광에서 의열단 단원을 만나 모종의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정주영과 이병철은 자본가 계급의 영웅이어도, 동시대를 살아온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는 ‘영웅’일 수 없는 자들이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 시기는 전태일을 비롯한 소위 ‘공순이’ ‘공돌이’의 시대이기도 했다. 1970∼80년대 한국 제조업 노동자들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0시간이 훨씬 넘었다. 잔업 때문에 하루 10∼12시간 노동은 보통이었고, 밤샘작업이 다반사였다. 매주 쉬는 날이 없어 의류노동자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복용하며 ‘잔업’을 해야 했다. 1976년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미국과 영국의 5배, 일본의 15배였다. 이런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노동환경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제조업 평균임금은 생계비 수준의 50∼60%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노동법은 노동자들에게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래서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정주영이 만든 현대중공업은 “배의 설계 단계부터 배 한 척당 평균 사망자의 수를 계산하여 건조비를 책정하는” 비정한 기업이었다. 이병철도 생전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던 반노동자적인 인물이었고, 그가 세운 삼성은 지금도 ‘무노조주의’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경제위기가 심화하고 반기업 정서가 상당히 높은 지금, 기업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시대’를 본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순수하게 드라마의 극적인 내용만으로 이 드라마를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유쾌한 점은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 ‘장길산’이 ‘영웅시대’를 시청률(20.1% 대 14.9%)에서 앞섰다는 점이다(닐슨미디어리서치). 한 스포츠 신문이 지적한 대로 ‘의적이 재벌을 누른’ 셈이다.
김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