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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게놈을 둘러싼 환상들

지난 2월 12일 미국 등 6개국의 합동 연구팀인 '국제 인간 게놈 연구 컨소시엄'(IHGSC)과 미국 유전공학 회사인 '셀레라 제노믹스'가 공동으로 유전자 염기 서열 지도를 발표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약 3만 5천 개에 달하는 사람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해서, 각각의 유전자가 어떤 특성에 관여하는지 밝혀 내는 연구다.

유전자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 몸 안의 모든 세포에 들어 있는 화학 물질이다. 유전자는 긴 사슬을 통해 다양한 조합을 이루며 서로 연결돼 있는 네 개의 화학 물질로 구성돼 있다. 이번 발표를 통해 인간은 약 31억 개의 염기가 있으며, 이 염기 안에 약 3만 5천여 개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해 봄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인간 유전자 지도는 인류가 생산해 낸 가장 경이로운 지도"라며 "오늘 우리는 신이 생명을 창조해 낸 언어를 배우고 있다."고 으스댔다. 또, 전 세계 언론들은 유전자 염기 서열을 해독함으로써 곧 질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질병을 예방·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지지자들은 유전병뿐 아니라 암과 에이즈처럼 인류가 아직까지 그 치료법을 알지 못하는 난치병도 "생명체의 청사진"인 게놈을 통해 유전자 정보를 파악한다면 치료와 예방의 길이 열릴 거라고 말한다.

언론은 유전자 정보를 통해 '맞춤 의학'의 시대가 열릴 것이며, 자신들이 원하는 아기를 얻을 수 있는 '주문형 슈퍼 베이비'도 가능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생명의 신비를 규명하여 수명까지도 연장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전 세계의 많은 언론들은 유전자 지도 완성을 인류의 달 착륙보다 더 커다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유전병에 관련된 유전자를 발견해 유전병을 예방·치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면 알츠하이머병, 헌팅턴 무도병, 낭포성 섬유증 등의 난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과장

그러나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대한 언론 보도는 굉장히 과장돼 있다. 클린턴의 환상과는 달리, 이번 유전자 지도 완성은 맞춤 의학이나 유전병 치료로 향하는 첫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이번에 발표된 유전자 지도를 통해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번에 밝혀진 사람의 유전자 수는 실험동물로 흔히 쓰이는 초파리의 겨우 갑절 정도였는데, 이는 고등동물일수록 유전자 숫자가 훨씬 많을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추측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생명체의 복잡성이 유전자 수나 염기서열 수와는 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많은 과학자들은 한 개의 유전자가 한 개의 단백질을 만들 뿐 아니라 한 가지 기능만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성과들은 한 개의 유전자가 여러 가지 유사 단백질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앞으로 생명공학 과학자들은 개별 유전자가 어느 곳에 존재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규명하는 지난한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과장 보도와는 달리 이번 유전자 지도 발표는 극히 일부의 유전자에 대한 해독 작업만이 완료됐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유전자는 신비에 싸여 있으며, 유전자 숫자도 3만∼15만 개 정도로 추정될 뿐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유전학 연구 민간기업인 렉시콘사 대표 아서 샌즈 박사는 "현재 10만 개 단어가 수록된 사전에서 뜻풀이의 95퍼센트가 공란으로 돼 있는 격이다. 더 열악한 것은 이 단어들이 모두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고 말했다.

인간 유전자를 완전 해독하기까지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이번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던 민간 기업 셀레라 제노믹스의 대표인 크레이그 벤터 박사조차 "게놈 지도가 완성되면 유전자로 이뤄진 수천 개의 단백질들을 규명·분류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하는데,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 = 인간?

이번 인간 게놈 연구 성과에 대한 과장된 광고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이면에 있는 이데올로기다. 많은 생물학자들은 유전자를 인간의 청사진에 비유하면서 유전자에 대한 파악이 곧 그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지난 1997년 복제양 돌리가 처음 탄생했을 때 일부 언론들은 히틀러와 아인슈타인을 여러 명 복제할 수 있다고까지 허황되게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유전자가 곧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과 같다는 생각을 함축한다. 그래서 일부 생물학자들은 현실의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억압, 소외, 차별 심지어 폭력이나 전쟁 등의 원인을 유전자의 특징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회생물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이유가 바로 '이기적인 유전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 눈동자의 모양이나 색깔은 물론이고 심지어 "신장, 콜레스테롤 흡수 능력, 성 지향, 질병 감염 능력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 몸 안에 있는 유전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게이로 태어나거나 체육적·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거나 조울증에 걸리는 것도 유전자 때문"이며,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는 것조차 유전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유전자 조합을 통해 인간의 질병을 고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육체적·정신적 특성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생물을 기계나 컴퓨터로 간주하는 기계론적 사고이다. 질병에 걸리지 않을 '우수한'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아기가 학교에 다닐 나이 때부터 유해한 환경에서 장시간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을 때 과연 유전자 덕분에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을까?

유전자 지도가 기계의 설계도나 컴퓨터의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전자가 발현되어 특정한 신체적 조건을 결정하는 과정은 기계의 원리처럼 인과론적 환원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입력과 출력이 일대일로 상응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유전자들은 상호 작용을 하면서 개별 유전자 속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더욱이 유전자의 발현 과정에서 외부 환경에서 여러 가지 정보가 유입돼 새로운 발현 과정이 창조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유전자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속성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인간이 특정 질병을 발생시킬 유전자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다른 유전자나 외부 환경과의 상호 작용 때문에 그 질병이 더 빨리 나타나거나 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 질병이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유전자는 일련의 복잡한 화학적·생물학적 과정의 일부로서만 유전자 고유의 기능을 발현한다. 게다가 이 과정은 너무도 다양한 화학 물질들 간의 상호 작용과도 관계가 있으며, 훨씬 더 넓은 환경 속에서 일어난다. 이 모든 요소들과 그러한 요소들 속에서 유전자가 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정확한 생물학적 이해의 기초가 된다.

예를 들어 낭포성 섬유증은 단 한 가지 유전자 결함 때문에 '유발'된다. 그러나 낭포성 섬유증 연구에 참여했던 일류 유전학자 스티브 로우즈(《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공저자)는 "그 유전자가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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