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세르주는 어떻게 러시아 혁명의 불길을 존속시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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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세르주

빅토르 세르주는 혁명적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1919년에 러시아로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했다. 세르주는 20세기 전반기의 혁명적 경험들을 담은 많은 글과 책과 소설을 썼다.
세르주는 1890년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러시아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벨기에로 망명 온 집안이었고 매우 가난했다. 그의 부모는 민중주의 테러리스트 운동단체인 나로드나야 볼랴
세르주는 이렇게 썼다.
세르주는 가족이 겪었던 빈곤에서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그의 동생 라울은 9살에 영양실조로 죽었다.
세르주는 벨기에 사회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했다. 그러나 벨기에 국가가 아프리카의 한 지역을 공식 병합하는 것을 벨기에 사회당이 지지한 1908년에 세르주는 벨기에 사회당을 탈당했다.
벨기에 사회당의 보수성에 넌더리가 난 세르주는 제1차세계대전 개전 전 벨기에에서 노동계급 운동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주요 조류였던 아나키즘에 끌렸다.
아나키스트들은 주류 사회를 거부했다. 그들은 출세하거나 의회 정치에 참여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세르주는 비타협적인
세르주는
권위
1917년에 출소한 세르주는 스페인으로 갔다. 러시아 2월 혁명에 고무된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아나키스트들이 이 봉기를 이끌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권위를 모두 거부했으므로 권력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지배계급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마침내 봉기를 짓밟았다.
세르주는 내전이 한참 벌어지고 있던 1919년 1월 혁명 러시아에 도착했다. 다섯 달 뒤 그는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세르주는 볼셰비키당이 혁명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 왔음을 알았다. 볼셰비키는 혁명을 지키고 지배계급을 분쇄하기 위해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적군을 창설해 백군에 맞서 혁명을 수호했다. 반혁명 세력은 아주 악랄한 수단까지 이용하며 옛 차르 시절의 지배계급을 복원시키려 했다.
세르주는 백군과 백군을 지원한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혁명을 지키려면 억압적 조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세르주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혁명은 커다란 어려움에 부딪혔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이중의 의무
적색 테러가 증가했다. 공산당 관료들의 권력이 커졌다. 그들의 부패와 특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현실을 보며 세르주는 혁명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이끌어 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는
혁명가들은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혁명이 생존하려면 선진국들로 혁명이 확산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산업이 크게 발전한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은 1918년에 제1차세계대전을 끝냈다. 그 뒤로도 혁명은 계속됐다. 세르주는 독일로 갔다. 1923년 10월 말에 봉기가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독일 공산당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봉기가 실패한 바로 그 주에 독일의 고위 장관과 장성들은 독일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주최한 10월 혁명 기념 연회에 참석했다!
똬리 틀기
세르주는 당시 상황이 크게 모순됐다고 느꼈다. 한편에서는 연속혁명이 전개되고 있었다. 연속혁명은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확산시킨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관료들이 어떤 사상을 키우고 있었다. 그 사상은 사회주의가 한 나라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
레닌은 관료들이 위험한 세력이 됐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1925년 세르주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은 이미 죽고 없었다. 세르주는 반대파에 합류해 트로츠키와 함께 혁명의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혁명가들은 1928년 관료들
1936년 세르주는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는 벨기에와 프랑스를 거치며 트로츠키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들은 곧 사이가 틀어졌다. 하지만 세르주는 그
세르주의 묘비명은 그의 시
아나키스트들에게 혁명에 함께하자고 호소하다
빅토르 세르주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그 소책자에서 세르주는 이렇게 말했다. 아나키즘이
세르주는 아나키즘이 혁명 운동에 이론적으로 중요하게 기여한 바를 아나키스트들에게 상기시켰다. 국가에 대한 적대, 애국주의 반대, 지배계급 생산수단의 몰수 같은 것들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돼 있던 주류 노동자 정당의 무기력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있던 사람들은 볼셰비키였다. 비록 볼셰비키가
세르주는 아나키스트들에게 혁명 바깥에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 혁명을 지키고 나머지 유럽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도우라고 호소했다.
인간 동기의 역학을 밝히는 소설
세르주는
《툴라예프 사건》에서 세르주는 스탈린이 정적을 체포하고 살해할 구실로 삼았던 살인 사건을 다뤘다.
《정복당한 도시》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겨울의 페트로그라드를 그렸다. 세르주는 당시의 극심한 궁핍과 그런 궁핍 속에서도 살아 있던 사람들의 익살을 담았다.
세르주는 위나니미슴
위나나미스트들은 문학의 새로운 임무는 인간의 집단적 의식을 추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나니미슴은 공통의 역사적 힘의 영향을 받은 운동 속에서 움직이는 다양한 사회 집단의 모습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