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진보 언론인이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에 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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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보적 인터넷 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한상봉(5면 하단 사진) 주필이 맑시즘2014에서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한상봉 주필은 강연 중엔 가톨릭 교회 교종을 줄곧 “교황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렀지만, 〈노동자 연대〉는 존칭을 생략하는 관행에 따라 그냥 “교황”으로 표기했다. 가톨릭 신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는 찬사도 많이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인기 스타가 된 교황이다’ 하는 말도 합니다. 때마침 방한하시기 때문에 더욱더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제는 저한테 언론사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어요. 그만큼 관심이 뜨겁지만 또, 그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 별로 없다는 거죠.
사실은 이것이 한국 가톨릭 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예요. 한국 교회에서 교황 방한에 대해서 좀 더 비판적으로 논평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 봤을 때, 두세 명 정도예요. 물론 신부 중에도 더러 있기는 한데 사제들은 공적 발언을 하는 데서는 조심스럽다 보니 그런 사람이 별로 없죠. 그만큼 교회 안에 진보진영이 상당히 오랫동안 위축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발언 중 여러분이 아는 발언이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그중 하나는 ‘교회는 안온한 성전에 머물지 말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 거리에서 상처받고 멍들고 더러워지는 교회를 나는 원한다. 교회는 야전병원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론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교황이 다른 식으로 교회를 표현할 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말을 써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이건 지금 한국 교회 현실과는 정반대예요. 한국 교회는 중·상층 이상을 위한 중·상층 교회거든요.
교황의 이 말은 한국 교회 지도자한테는 매우 도전적인 발언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할 뿐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부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그들을 위해 살려면 오히려 교회가 가난한 교회가 돼야 한다는 얘기예요.
여기서 “야전병원”이라는 말과 연결되는데, 야전병원이 대형 병원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야전병원은 천막 치고 하는 거예요. 즉, 교황의 말은 ‘내가 원하는 교회는 천막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는 당장 응급 환자들을 위해서 최소한의 장비를 갖고 그들과 함께 있어 주는 거예요.
이를테면, 광화문 광장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과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제들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단식농성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냥 지금 상처받고 고통받고 안타까워하고 억울해 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니까 함께 있어 주는 거예요. 그런 걸 ‘동행한다’고 해요.
사실은 그분들이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보다는 염수정 추기경이 대통령을 만나든지, 아니면 명동성당에서 대규모로 미사를 하면서 정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면 그게 훨씬 효과가 커요. 염수경 추기경이 명동성당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미사를 직접 한다면 전국의 사제 4천 명 중 1천 명 이상이 모일 거예요. 지난번에 4대강 공사 반대 서명을 한 신부가 전체 사제의 절반이었어요. 전체 가톨릭 사제의 45퍼센트 정도가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더라도 비교적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 사제가 1천 명이 모인다면 평신도는 가톨릭 교회의 특성상 수십만 명이 모일 거예요.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은 나서지 않을 거예요.
‘빌어먹는 교회’
이것과 관련해서 나오는 얘기 하나는 교회가 ‘벌어먹는 교회’가 아니라 ‘빌어먹는 교회’여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교황의 교황명은 다들 알다시피 프란치스코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13세기 초 아시시의 수사로, 프란치스코회 창립자]의 가장 특징적인 태도가 ‘탁발’이에요. 즉, 자기가 어디 가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빌어먹고 다니는 거예요. 여기저기 동네 다니면서 선한 사람에게서 빌어먹는 거죠.
빌어먹는다는 것이 뭐죠? 그 사람이 나에게 매력을 느끼거나 호의를 느낄 행위를 내가 하지 않는다면 밥 한 톨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못 얻어먹어요. 즉, 자기가 빌어먹어야 될 상대에게 충분히 봉사하고 자기를 내주어야만,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그들이 내가 먹을 빵과 우유와 물을 주게 돼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에요. 일종의 수행이죠. 내가 있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도 가난한 사람의 하나가 돼서 그들과 함께 동반해서 사는 것. 이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야기한 거고, 이게 바로 ‘빌어먹는 교회’의 특성이에요.
그런데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빌어먹는’ 게 아니라 ‘벌어먹겠다’고 나선 거예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서울교구의 ‘평화드림’이에요. 강남 성모병원에 가 보면 거기 주차장을 평화드림이 운영합니다. 장례식장도 평화드림이 운영합니다. 거기 있는 커피숍, 빵집 등 모든 시설을 다 평화드림이라는 주식회사가 운영합니다. 그 평화드림의 이사장이 서울대교구 신부예요. 서울대교구 학교유지재단, 가톨릭학원 유지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평화드림이어서 교회에 들어오는 팩스 용지부터 모든 기자재가 평화드림을 통해서만 들어오게 돼 있어요. 예전에는 일반 회사나 개인들이 하는 회사와 연계해서 납품을 받았어요. 그 사람 중에는 신자도 있고 신자가 아닌 사람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걸 다 차단하고 너희가 가톨릭 교회에 납품하려면 평화드림에 소속돼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평화드림이 창립되자마자 자회사와 지점이 엄청나게 많아진 거예요. 예전에 개인적으로 사업하면서 납품하던 회사들이 전부 지점이나 자회사로 들어온 거죠. 안 그러면 납품이 안 되니까요. 한마디로 밥줄을 잡고 기업 확장을 한 거예요.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물품은 다 가톨릭 교회에 떨어지게끔 한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아까 말한 대로 소기업들을 자기 회사에 종속시키는 형태로 확장을 했어요. 재벌들이 많이 쓰는 합병 방법으로 회사를 확장했고, 그래서 교회가 이제는 충분히 벌어먹고 살겠다는 거죠.
충분히 벌어먹고 살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죠? 대중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내가 돈이 있고 내가 돈을 벌어서 쓰는데 누구 눈치 볼 게 없죠.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그럴 때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서울교구는 전체 교구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교구이지만 가장 보수적인 교구이죠.
교황 방한의 효과
지금 교황 방한의 효과가 무엇일지 여러 논란과 질문이 있어요.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지금 한국 교회는 교황 방한이 결코 달갑지 않다는 거예요.
지금 교황은 비유럽계 교황인데,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교황이 순방지로 맨 먼저 간 곳이 브라질이에요. 그다음이 한국이에요. 그리고 알바니아에 갑니다. 다음이 스리랑카이고, 다음에 필리핀에 갑니다. 전부 제3세계 나라들이에요.
특히 브라질은 상징적인 곳이에요. 해방신학의 못자리죠. 그래서 유럽 교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 브라질 교회예요.
알바니아는 대부분의 국민이 무슬림이에요. 이런 나라에 교황이 가는 거예요. 한국은 분단 국가이고 정전 상태인 국가죠.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예요. 필리핀은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이지만 매우 가난한 나라예요. 전부 아시아 지역이고, 분쟁지역이나 타 종교가 장악한 나라예요. 굉장히 어려운 곳에만 가는 거예요. 미국은 안 가요. 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죠. 앞서 교회를 어떻게 보는지와도 관련이 있는 거예요.
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 교황은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사실, 중요한 국책사업인 강정 해군기지, 쌍용, 밀양 여기에 다 누가 있나요? 가톨릭 교회의 진보적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깊숙히 참여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톨릭 세력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이곳도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그런데, 가톨릭 교회의 진보적인 사제나 수도사들은 한 번 물면 안 놔요. 끝까지 가요. 미사를 한 번 시작하면 매일 죽 하죠. 큰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질기게 끝까지 가요. 이게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이 사람들에게 영적 지지를 제공하는 주교가 있죠. 강우일 주교입니다. [이분을 포함해서] 지금 한국 교회에서 진보적 주교가 네 분 있어요.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는 의식이 굉장히 깨어 있어요. 의정부교구 이기헌 주교, 춘천교구 김운회 주교도 비교적 진보적인 분들이에요. 교구가 너무 작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정의구현사제단 전통이 약해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요. 아무튼 이런 분들은 지금 주교회의 안에서 힘이 없어요. 아주 소수파죠.
보수적인 주교들이 예뻐하는 신부는 모두 서울 강남 안에서 돌아요. 왜 그럴까요? 강북지역은 전체 주민대비 가톨릭 신자 비율이 5~15퍼센트예요. 평균 10퍼센트라고 보면 돼요. 강남은 주민 대비 신자 비율이 25퍼센트예요. 대치동은 30퍼센트입니다. 전체3명 중 1명이 가톨릭 신자인 셈이에요. 그리고 강남 지역의 충성도는 거의 70퍼센트에 육박해요. 신자가 되면 굉장히 충성스럽게 성당에 나와요. 왜 그럴까요? 입맛에 맞으니까. 그러면 강남에 있는 신부는 어떻겠어요? 이건 진정한 교회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복음의 기쁨》 등[교황의 권고문]에서 교황이 교회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시는데, 그 잣대를 들이대면 한국 교회는 대부분 바로 해체돼야 해요. 특히 서울교구는 정말 심각해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지금 교황을 맞이할 자격이 있는가를 질문하는 거예요.
그러나 소수이긴 해도 어떤 분들은 이번에 교황이 오시면 한국 교회에 영적인 힘으로 크게 작용할 거라 생각해요.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주장하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공박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이 점이 교회 운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이데올로기 투쟁이잖아요. 이데올로기 투쟁할 때 진보세력이 선점할 수 있는 거죠. ‘교황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하면 [교계의 보수파들은]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교황이 갖고 있는 영적 권위가 있거든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제들의 정서는 진보적으로 진화하고 있어요. 진화되고 있기 때문에 교구장의 생각에 따라 아주 쉽게 바뀌지는 않아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보면 나름대로 희망적이라고 봅니다.
시복식
시복식 관련해서 잠깐 말씀 드리면, 제 글에서도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시복식이 열리는 장소가 광화문이에요. 광화문은 굉장히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거기에는 국가 권력의 핵심 기관들이 다 모여 있어요. 그리고 옛날 형조와 의금부가 있던 장소예요.
조선 봉건 정부에 의해 학살당한 순교자들은 국가가 공인한 성리학을 존중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사악으로 몰려서 처형당했잖아요.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면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억압당한 거예요. 시복식은 그 사람들을 국가적으로 범죄자가 아니라 복자이고 의인이라고 확인하는 거예요. 기존 국가 권력에 의해서 [부당한] 혐의가 씌워진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복권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시복식을 여는 것은 큰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번에 그 장소의 중앙에 누가 있나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계세요. 이분들의 자녀가 왜 죽었죠? 국가가 죽음을 방조한 거죠. 세월호 유족 농성장이 바로 시청광장에서 광화문 광장 카 퍼레이드 하는 그 중간에 있어요. 그럼 당연히 교황이 유족들을 만나게 돼 있어요. 교황은 세월호 가족들에게 이미 위로의 말을 전했고, [문제를] 잘 알고 있어요.
시복식은 국가 폭력에 의해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위하고, 복자, 죽은 순교자들을 위한 자리예요. 시복 선언은 이미 3월인가 2월에 교황청에서 했어요 그걸로 끝난 거죠. 그런데도 시복식을 하는 이유는, 시복식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잔치이거든요. 그렇게 본다면 그 자리는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잔치의 장소인 거죠. 이 점에서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교황이 다녀가시고 나서 한국 교회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노예의 종교’
시몬 베이유가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다’라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그 발언은 시몬 베이유가 처음 한 게 아니라, 니체가 했던 말이에요.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이미 엥겔스도 이야기했고, 마르크스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해방 신학자가 한 말 가운데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그리스도인이 공산주의를 비판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공산주의 이념은 가장 복음적이기 때문이죠. [사도행전에 따르면, 시초 교회는] 내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모두 사도 앞에 내놓고 모두가 필요한 만큼 나눠 썼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말씀이거든요. 물론 그런 공산주의가 가능하냐 아니냐는 문제는 방법과 관련된 다른 문제예요.
마태오복음서에서 ‘왼 빰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라’, ‘네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나요? 굉장히 높은 도덕적 가치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아무런 규범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거냐? 그럼 그냥 없던 걸로 하자고 할 수 있느냐? 없어요. 즉,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규범적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구분되는 것이죠. 즉, 이건 거룩하고 영원한 갈증인 거고,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것을 향해서 가야 할 지향점이에요. 멀리 그물을 치는 것이죠. 사실, 그리스도교가 노예들의 종교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리스도교의 원천은 이집트 탈출기[출애굽기]이에요.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에요. 그들을 해방하시는 분이죠.
그런데 지금 노예들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그분을 [교회 주류가] 잊고 있다는 것이 문제거든요. 지금 그들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사실상 복음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가 실제로 노예들의 종교이고 “억압받는 자들의 한숨”[마르크스]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다행스러운 거예요. 이 세상을 해방시키는 것은, 억압받는 자들이 해방되는 과정을 통해서 인류 전체가 해방되는 것이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는 한 부자들도 결코 해방될 수가 없어요. 무엇로부터 해방?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거요. 이게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예요. 부자들이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가난한 자들이 해방되는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는 부자들을 해방시키려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가난한 자들이 해방되면 부자들은 자동으로 해방되니까요. 그래서 교황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돼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부자들을 잘 구슬려서 그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촉구해 왔단 말이에요. 그게 되나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교황은 첫 단추를 정확히 꿰자는 거예요. 교회는 야전병원이니까 큰 건물을 지으려고 생각하지도 말고 거지처럼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서만 싸우라는 것이죠. 그리고 필요하다면 정치적으로 투신하라는 거예요. 이런 게 하루아침에 안 되겠죠. 시간을 갖고 해야 해요. 교황이 이런 말을 했어요. “개혁은 천천히, 굉장히 더딜 것이다. 천천히 갈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끝까지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