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로 본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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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공회 당인리 대안정책발전소 연구위원(사진)이 맑시즘2014에서 강연한 “마르크스주의로 본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를 녹취한 것이다.
피케티의 이 책이 영어로 번역돼 출간된 게 올해 3월입니다. 지난해에 먼저 프랑스어로 나왔고, 나온 직후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가지고요. 피케티는 가히 ‘록 스타 경제학자’가 되었습니다.
피케티는 프랑스 파리 출신이고, 22살에 박사학위를 받아, 승승장구를 하다가 LSE와 비슷하게 파리에 경제대학교에 ‘파리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를 만들어 거기 교수로 있습니다. 좌파 성향에 〈리베라시옹〉의 칼럼니스트고요.
마르크스하고 관계가 재미있는데, 일단 피케티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시면 《자본론》에 대해서 상당히 언급을 하고, 마르크스에 대해서 호되게 비판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적이 없다”면서 인터뷰한 사람에게 “그럼 너는 《자본론》을 읽었느냐” 하고 물으면서 넘어가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마르크스를 호되게 비판을 합니다.
피케티의 논의
그럼 《21세기 자본》 요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일단 여기에 나오는 그림들은 전부 다 피케티가 만든 것에서 따온 거고요. 이 사람은 친절하게 자기가 쓴 데이터나 그래프를 인터넷에 공개해서 거의 그대로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피케티는 1970년대 이후에 소득불평등의 심화(자본주의에서 소득불평등은 항상 있어서 그래서 심화라고 했습니다)를 문제삼습니다.
[그림1]을 보시면, 1940년대부터 국민소득 중에 상위 10퍼센트가 가져가는 몫이 일정하게 유지가 돼요. 그러다 언젠가부터 급격히 증가하지요. 미국 같은 경우, 35퍼센트에서 유지되다가 1970년대부터 치솟습니다. 상위 10퍼센트가 가져가는 몫이 2010년에는 거의 50퍼센트 가까이 되고 있죠. 2013년이 되면 거의 50퍼센트가 됩니다. 영국 같은 경우에는 미국이랑 비슷하고요. 나머지 유럽은 오히려 1940년대부터 1970년까지 조금씩 떨어지는 추세에 있죠.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다시 올라갑니다. 즉 1970년대 중반쯤부터 뭔가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상위 10퍼센트가 35퍼센트를 가져가는 것은 괜찮은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일단 지금은 1970년대 중반쯤부터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얘길 하는 것이니, 잠시 이 문제는 접어두기로 하죠.)
사실은 중간에 수많은 논의들이 있는데 다 거두절미하면, 피케티는 소득불평등 심화의 원인으로 ‘r(자산수익률)이 g(경제성장률)보다 높다’는 것을 꼽습니다. 피케티는 ‘r〉g’ 부등식을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표현합니다. r〉g 라면, 경제가 일정한 비율로 성장을 하는데 자산수익률은 그거보다 높아요. 그러면 경제성장률에 따라 나오는 것이 GDP인데, 여기에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가는 몫이 점점 켜지겠죠.
[그림2]는 조금 주의하셔야 하는데요. 한 점이 1000년이에요. 예를 들어, ‘서기 0년부터 1000년까지 평균적으로 연간 자산수익률이 4.5퍼센트 정도다’라는 것이죠. 사실 이것이 엄밀한 수치는 아닙니다. 이런저런 사정들을 참조해 가정하는 것인데, 하여튼 피케티의 논의를 따라가자면 역사를 통틀어서 꾸준히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상회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산은 쌓이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GDP 대비 자산이 커질 수밖에 없겠죠. [그림3]이 GDP 대비 자산 크기를 보여 주는 건데, 대체로 1950년부터 국민소득에 비해서 자산이 더 빠르게 축적된다는 걸 보여 줍니다. 주의할 점은 2010년이 중간에 있습니다. 2010년 이후는 추정한 겁니다. r〉g 부등식하고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이 추세대로 가면 2100년쯤에는 총자산이 GDP에 7배 정도 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요. [그림4]는 피케티가 엄청난 자료를 모아서 유형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와 지역마다 불평등의 정도를 구별하는 거예요. 최근의 미국은 ‘높은 불평등’에 해당하고, 흔히 ‘벨에포크’라고 불리는 1910년의 유럽도 그렇습니다. 즉, 현재 미국과 100년 전의 유럽이 비슷한 상황이라는 거죠. 그래서 피케티가 현재 상황이 옛날에 아주 나빴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을 내놓습니다.
‘높은 불평등’ 상태에서는 소득 상위 10퍼센트가 국민소득의 50퍼센트를 가져갑니다. 그 다음 40퍼센트가 소득의 30퍼센트, 나머지 50퍼센트가 20퍼센트밖에 못 가져간다는 거죠. 그래서 그 결과 지니계수는 0.5에 가깝게 커지는 거죠.(지니계수는 클수록 불평등한 거고, 가장 불평등하면 1입니다.) 미국이 현재와 같은 추세로 가다 보면 20년 정도 지났을 때, ‘아주 높은 불평등’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불평등 논의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피케티만 한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그림5]는 미국 의회예산처에서 만든 겁니다. 1979년부터 2007년까지 30년 사이에 실질 세후소득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소득순위에 따라 20퍼센트씩 나누었는데요, 주의할 것은 상위 20퍼센트는 별도로 1퍼센트와 나머지 19퍼센트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첫째, 소득이 낮을수록 소득 증가율도 낮다는 겁니다. 제일 낮은 20퍼센트의 1979년 대비 2007년 소득이 20퍼센트 정도 증가했죠. 30년 동안 1년에 1퍼센트도 못 되게 증가한 거잖아요. 그 다음은 더 조금씩 증가하지만 미미하게 증가합니다. 당장 이것만 보더라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둘째, 99퍼센트까지는 등차수열 비슷하게 올랐는데, 제일 꼭대기인 1퍼센트의 증가율은 거의 300퍼센트로 훨씬 크게 오릅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인데, 특히 최상위 1퍼센트가 더 많은 이득을 본 거죠. 다시 말해, 지난 30년간 일어난 경제 성장의 과실을 거의 전부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독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림6]도 [그림5]와 같은 보고서에 있는 것인데요, 총 소득에서 각 집단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 줍니다. [그림5]에서 나타났듯, 지난 30년간 경제성장의 과실은 최상위 1퍼센트가 몽땅 가져갔는데요, 그 결과 총소득에 대한 각 집단소득의 비중은 최상위 1퍼센트를 제외하곤 모두 줄었습니다.
[그림7]은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림1]과 유사하지 않나요? 이 그래프는 노동생산성과 소득의 증가율을 나타내는 것이에요. 1947년부터 소득이 생산성과 거의 같은 속도로 증가한 것이 여기 나타납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는 생산성은 예전이랑 비슷한 추세로 올라가는 데 반해, 가계소득은 생산성 증가보다 낮게 증가합니다. 생산성 증가에 비례해 생산도 증가했을 것인데 노동자들의 임금이 그에 맞춰 오르지 않았다면 생산의 증가분은 누가 가져간 것일까요?
어쨌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피케티와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1970년대 초중반부터 무엇인가 달라졌다[소득불평등이 심화했다]는 것을 얘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에 대한 진단들이 조금씩 다릅니다. 진단이 다양하다는 것은 처방도 다양하게 된다는 거죠. 예를 들면, [그림7]은 노동생산성과 가계소득의 격차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단을 하면 이에 대한 처방도 비정규직화나 노조 약화를 막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을까요.
또, 금융화를 불평등의 원인으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뒤메닐·레비나 미국의 그레타 크리프너는 ‘신자유주의 시기라고 부르는 1970년 중반 이후에 총소득에서 금융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을 관찰합니다. 이렇게 보면 금융소득이 많은 사람들이 소득 상승률이 더 높겠죠. 이렇게 진단을 한다면 그 처방은 아마 ‘금융화를 더 늦춰야 한다’가 될 겁니다.
세습 자본주의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위와 같은 방식들로 불평등을 논하는 최근의 논자들과 피케티 사이엔 매우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의 논의들은 대체로 194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를 관찰합니다. 이는 선진국이라고 해도 그 이전의 거시경제 자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있더라도 불확실한 게 많고요. 그러다 보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를 일종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의 불평등 심화를 ‘정상으로부터의 이탈’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피케티는 20세기 초, 나아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자료까지 씁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는데, 바로 이렇게 장기적으로 보니, 1970년대 이후의 불평등 심화는 ‘정상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기존의 정상으로의 복귀’로 보인다는 것이죠. 달리 말해, 자본주의 발달을 장기적인 시계에서 보니 오히려 이상한 것은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가 되더라는 겁니다.
이러한 관찰로부터 피케티는 현재 우리가 19세기 식의 ‘세습 자본주의’로 돌아가고 있다는 매우 끔찍해 보이는 결론을 내놓습니다. 상위 10퍼센트의 사람들이 주로 가져가는 소득의 형태는 자산소득이 많은데, 자산은 세습되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세습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형태라면 1940년부터 1970년까지가 이상한 건데,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는 질문을 피케티가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세금에서 찾습니다. 조금 전에 자본주의가 불평등한 이유가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 자산수익률을 인위적으로 낮출 수 있다면 자산가들이 가져가는 몫이 작아질 테니, 불평등이 완화될 수 있겠죠. 그리고 실제로 피케티가 관찰했듯이 그 불평등이 좀 완화가 됐고요.
[그림8]에서 빨간색 점선이 세전 자산수익률입니다(피케티는 자산과 자본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일단 자본에 세금을 매기면 수익률이 떨어지겠지요? 때마침 전쟁이 벌어져 자본이 파괴되면 수익률은 더 떨어지겠죠? 1913년부터 1950년 사이에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 결과 5퍼센트에 이르던 자산수익률이 1퍼센트 선으로 급격히 떨어지죠. 그러는 사이에 경제성장률이 다소 높아져, 결과적으로 r〉g라는 부등식의 부등호 방향이 바뀌고 불평등이 완화됩니다. 이후 기간(1950~2012년)에는 전쟁이 없었으니 수익률은 좀 올라가나 경제성장률이 높아 여전히 부등호가 역전된 상태가 지속됩니다. 그러나 피케티는 이런 상황이 미래에도 지속되리라고 보진 않습니다. 바로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세율을 인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50년쯤 되면 [자산에 대한] 세율이 거의 0이 되지 않겠냐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r〉g 부등식이 회복되어 불평등이 다시금 증가하고, 자본주의도 옛날 같은 세습 자본주의로 돌아갈 것이라는 게 피케티의 주장입니다.
[그림9]는 최고 소득세율인데요, 1915년을 전후해서 주요 선진국들에서 보편적인 소득세를 도입합니다. 그와 동시에 최고 소득세율이 치솟는데, 그 이유는 제1차세계대전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금 떨어지다가 다시 올라갑니다. 이는 다시 제2차세계대전 때문에 오르는데, 특히 영국이나 미국 같은 경우에는 90퍼센트 이상, 영국의 경우에는 100퍼센트 가까이 최고 소득세를 물리게 되죠. 그리고 이런 상황이 1970년대 중반까지 가게 됩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에 영국에서 대처가, 미국에서 레이건이 세금을 내립니다. 상속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피케티는 소득세나 상속세 같은 대표적인 부자에 대한 세금이 강화됐기 때문에 불평등 감소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이상과 같은 논의 끝에 피케티는 오늘날 다시금 점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과세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은 무엇보다 자산소유의 불평등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소유로부터 얻는 소득뿐 아니라 실제 일한 것과 무관하게 높은 연봉도 규제되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소득세의 누진성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처방들은, 제대로 실현되기만 한다면 오늘날 불평등 문제를 완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케티의 주장에 힘을 실어줘야 할까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제일 중요하고 또 가장 이론적인 것인데, 앞서 봤듯이 피케티는 자산수익률을 거시 지표인 것처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r(자산수익률)을 거시 지표로 간주하고, 한 국가는 물론 세계경제에 대해서 r을 계산하고 g(경제성장률)와 대비시킵니다. 하지만 사실상 불평등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미시적 차원의 문제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미시적 차원에서는 거시적 평균치로서의 r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더 쉽게 말해 보면, 예를 들어 제가 빌딩 하나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전 세계 r(자산수익률)은 5퍼센트예요. 그렇다고 제가 5퍼센트 수익을 얻을 수 있나요? 그건 전혀 장담할 수 없죠. 제가 가지고 있는 자산의 형태라던가, 그 자산이 어디에 있는가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수익은 영향을 받을 거예요. 물론 요즘에는 과거에 비해서 자산이 다양한 형태로 유동화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1700년도에는 의미가 있었을까요?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r〉g 부등식이 국민경제나 세계경제 차원에서 성립한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더 발달함에 따라 자산 소유자들이 더 이득을 본다고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자산 소유자들은 이득을 보겠지만, 다른 자산 소유자들은 g보다 낮은 수익률에 만족할 수밖에 없거나 또는 망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동학을 r〉g 부등식으로 요약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겁니다. 마르크스 같았으면 ‘공허한 추상’이라고 했을 겁니다.
따라서 r〉g 부등식을 불평등의 ‘원인’으로 볼 수도 없어요. 그건 이미 벌어진 불평등을 거시적 차원에서 확인해 주는 것뿐이에요. 따라서 피케티가 r이 g보다 크다는 게 자본주의의 핵심 동학이고 불평등의 핵심 원인이라고 하면서도 증명을 못 해요. 관찰만 해요. 이게 피케티의 중요한 결점입니다. 그러나 이럴 수밖에 없는 건 이게(r〉g) 불평등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리적으로는 증명할 수 있을 텐데, 그 역시 공허한 추상이 되겠죠.
그런데 제가 방금 이 자본가는 어떻고 저 자본가는 어떻고 했는데, 이게 뭡니까. 바로 경쟁입니다. 개별 자본 간에 수익률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포착하는 개념이 경쟁입니다. 그런데 경쟁 때문에 상이한 자본 사이의 수익률 차이가 좁아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하겠죠. 그리고 그중에서 일정한 수익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몰락시키기도 하겠죠.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산가들 사이에 부가 집중되기도 하고, 분산되기도 할 거예요. 이런 분배 경쟁이 사회 전체 불평등에 한 계기를 이루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케티는 특히 1970년도 이후에 소수에 의한 부의 점증하는 독점이라는 현상을 곧장 ‘세습사회’로의 회귀로 해석합니다. 이는 경쟁을 무시한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합니까? 부가 소수에 집중되고 있을지언정, 그 소수는 결코 고정돼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 잡지 〈포브스〉에서 조사하는 부자 랭킹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매번 바뀌어요. 그게 의미하는 게 뭡니까. 바로 경쟁이 작동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피케티가 의미하는 고정성이 없다면 세습 자본주의로의 회귀는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럼 불평등이 여기에서 끝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경쟁을 얘기하다 보면 생산을 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피케티는 애초부터 “나는 분배 이론을 다루겠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피케티가 불평등을 해명하고, 분배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도 생산을 봐야 해요.
특히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분배 영역에서 자산 소유자 간에 투쟁(경쟁)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사실 원리상 분배는 생산 없이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건 그 생산을 중심으로 다양한 자산소유자들이 위계적으로 구조화돼 있을 겁니다. 직접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가치를 분배 받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특히 신자유주의 이후부터 그 분배 받는 양상이 달라지겠죠. 이를테면 금융자산가들이 더 많이 가져간다던가, 덜 가져간다던가 하는 식으로 분배 양상이 변할 겁니다. 이런 위계가 자산 소유자 간에 분배 투쟁을 결정하겠죠. 그래서 자산 소유자 간에 분배 경쟁을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생산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여태까지 노동자가 안 나옵니다. 자산 비(非)소유자가 안 나와요. 이들은 어디 있을까요. 생산 영역에 있습니다. 생산 영역에서 자산 소유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 생산 영역에서 생산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고, 그 생산 영역에서 자산가들과 비자산가들, 즉 자본가와 노동자는 경쟁 혹은 투쟁하고 있을 겁니다. 사실은 착취죠. 생산이라는 건 양자 간에 분배를 1차적으로 규정할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피케티는 분배 이론을 내놓고자 자신의 논의를 분배 영역으로 한정시켰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적절한 분배 이론도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게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고요. 피케티가 분배 이론을 구성하기 위해서라도 생산 영역까지 포함했더라면, 분배상의 불평등 심화의 원인을 좀 더 복합적으로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논의도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1 대 99’와 계급투쟁
피케티에 대한 비판 둘째는 피케티가 최상층의 1퍼센트, 그리고 더 들어가면 0.1퍼센트, 0.01퍼센트를 이론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1 대 99’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접근이 나쁜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불평등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핵심은 불평등은 언제나 계급적인 문제였고, 계급적인 문제니까 당연히 생산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생산은 언제나 빈곤, 도농격차, 제국주의 등 이런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그런데 피케티는 소득불평등 문제를 거시적 소득 분배로 단순화해 버렸다는 문제를 갖습니다. 따라서 그의 논의는 기존에 마르크스주의의 자장 안에서 배양되었던 불평등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속에 함께 융화됨으로써 상호간에 발전의 계기들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피케티는 1915년부터 1970년 사이에 불평등의 완화를 고율의 세금 덕분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 시기는 노동운동의 융성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도 있겠죠. 자본수익률이 과연 세금 때문에 낮아졌는지, 아니면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낮아졌는지 이걸 한 번 우리가 따져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걸 쉽게 답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피케티는 이것에 대해서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죠.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크루그먼 같은 사람도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는 책에서 노동운동의 융성을 하나의 중요한 이유로 꼽고 있을 정도니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세제의 의의에 지나치게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그가 주로 참조하는 자료가 과세자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제의 변화에 따른 분배상의 변화가 두드러져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 피케티가 20세기 역사에서 노동운동을 경시하기도 하지만, 20세기 세제사도 너무 단순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보편적인 소득세제나 고율의 최고 소득세율의 도입은 세계대전 같은 전쟁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다시 떨어지죠. 그러나 이렇게 도입된 세금 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강력한 노동계급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 고율의 소득세는 산업의 국유화, 사회화와 한 묶음으로 진행된 거예요. 이건 한국에서 거의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에요. 심지어 이 당시에는 케인스조차 금리생활자를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얘기하던 때입니다. 불로소득에 대한 적대가 상당히 강화되고 있었을 때고, 노동계급 입장에서는 바로 그 불로소득을 사회적으로 수거하는 — 일차적으론 정부가 수거하겠죠 — 정책적인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 도구가 고율의 소득세제라는 거죠. 그리고 고율의 소득세제에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기업 이윤을 개인에게 분배하지 못하게 막는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기업이윤이 개인에게 분배가 안 된다는 것은 한편으론 불평등의 원인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기업 내부에 자금이 쌓여 기업이 안정적으로 장기투자를 단행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자본주의를 잘되게 하자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장기적으로는 이런 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화함으로써 사회적 부에 대한 공공적 통제를 급진적으로 가져가자는 비전을 가지고 진행됐던 거죠.
결국 피케티는 고율의 소득세제의 실현 가능성을 역사에서 실제로 봤을 뿐이지, 그것이 어떤 환경에서 실현 가능했고, 또 어떤 의의를 가졌는지는 전혀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안의 현실성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거죠. 강조하건대, 피케티가 오늘날 불평등의 해소책으로 내세우는 대안들이 20세기 역사속에서 잠시나마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강력한 노동자계급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그러한 뒷받침이 없다면 그의 대안은 헛된 외침이 되기 쉽습니다.
피케티는 최상위 1퍼센트를 공격합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나머지 99퍼센트의 옹호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1퍼센트 바로 뒤의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부자인) 9퍼센트나 19퍼센트의 입장에서 1퍼센트를 공격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가장 가난한 50퍼센트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피케티는 어느 쪽일까요? 불행히도 피케티나 그로부터 자극받은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비참한 대다수의 민중에는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피케티의 경제학은 99퍼센트를 위한 경제학이 아니라 9퍼센트를 위한 경제학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물론 9퍼센트 대신 19퍼센트라고 써도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때 나머지 90퍼센트 또는 80퍼센트의 노동대중들이 이러한 문제에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저 부자들끼리의 다툼에 들러리를 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럴 경우 이 세계의 불평등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는 피케티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투철한 계급의식을 가져야 함을 일러줍니다.
정리발언
제가 ‘데이비드 하비의 피케티 비판’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질문이 있었는데요. 제가 하비를 비판한 것은 그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옳은 얘기를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비는 마치 “마르크스는 그런 식으로 말 안 했는데, 피케티가 그런 식으로 말했으니 틀렸어” 하는 식인 거 같다는 거죠. 하비의 비판이 더 적절한 비판이 되려면 그전에 매개들이 몇 가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연 때도 말씀 드렸듯이 제가 봤을 때 핵심은 “분배의 영역에만 있으면 피케티가 하고 싶은 걸 못해”라고 비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을 봐야 되고, 생산을 보려면 자본을 봐야 돼” 라고 한 거잖아요. 적어도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야 비판이 되지, 그냥 “자본 개념이 틀렸다” 하고 말하는 건 적절한 비판이 아니라고 보고요.
그리고 다른 한 분은 과소소비론을 말씀하셨는데, 기본적으로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과소소비론자라고 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피케티 얘기를 많이 하는 분 중에 정태인 선생이 있는데요, 이분도 피케티가 말하는 세제 개편만 가지고는 안 되고 여기에 소득주도 성장이 맞물려 가야 한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사실 소득주도 성장론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 과소소비론의 변형인데 만약 여기까지 연결이 된다면 좀더 피케티를 과소소비론적으로 볼 수 있는 맥락들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녹취 송조은, 이재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