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항의 또 다른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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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항의 또 다른 미국
[편집자] 영국 교원노조(NUT) 일링지부 사무국장 닉 그랜트가 8월 29일 뉴욕 시위 현장에서 소식을 보내 왔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프랭크는 “또 다른 참전 군인이 이 전쟁을 반대한다!” 라고 쓴 플래카드(팻말)를 들고 “미군은 철수하라! 지금 당장 철수하라!” 하고 외쳤다.
그의 아내가 든 팻말에는 “부시를 캠프 엑스-레이[아프가니스탄 전쟁 포로들이 수감된 쿠바 관타나모 기지의 수용소]에 처넣어라” 하고 적혀 있었다.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 수천 명이 오늘 시위에 참가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과 그 가족들도 참가했다.”
수많은 9·11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 그들은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조지 부시의 공화당이 처음으로 뉴욕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한 목적이 자신들의 슬픔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위 참가자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50만 명이 참가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8월 29일의 반(反)부시 시위가 전당대회에 항의하는 시위로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주최측이 예상한 25만 명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그 전 날 브루클린에서 시작된 여성 행진에 놀랍게도 2만 5천 명이나 참가했을 때 이미 주최측의 예상을 뛰어넘을 것임이 확실했다.
50만 명
시위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이라크 전쟁에 분노를 나타냈다.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1968년에 내가 베트남에 있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징병제가 실시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와 마찬가지로 부잣집 자식들은 군대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유럽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이 전쟁만은 아니었다. 브루클린에서 온 27세의 제이슨 커플랜은 시위 참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부시의 전쟁 거짓말 때문만은 아니다. 부시가 동성애자인 나의 권리를 박탈하려 하는데 가만히 집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펜실베이니아 출신인 28세의 줄리아나는 뉴욕으로 이사온 뒤 여섯번째 시위에 참가했다. “나는 아주 많은 것에 분노하고 있다. 부시가 망쳐 놓은 환경 관련 법률들, 시민권, 애국자법, 경제 정책, 고용 문제 등등.”
타는 듯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오전 10시부터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니언 스퀘어에서는 ‘낫 인 아워 네임’(Not In Our Name : 9·11 유가족단체-편집자)이 설치한 무대 위에서 주요 반체제 컨트리 음악가 스티브 얼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동적인 저항의 메시지는 그 전날 감옥에서 녹음된 흑인 정치수 무미아 아부 자말의 목소리였음이 밝혀졌다.
정오가 되자 평화정의연합(UfPJ)의 배너(펼침막)를 앞세우고 제시 잭슨과 마이클 무어가 맨 앞에 선 행진 대열이 7번가를 따라 행진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행진을 했다. 우리 주변에는 손수 만든 재치있는 팻말과 배너를 흔들며 활기차게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다양한 복장으로 꾸민 시위대와 “부시를 위한 억만장자들”처럼 분장한 거리의 배우들이 웃고 떠들어댔다.
북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가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공화당 전당대회 장소] 앞에 이르자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공화당 대의원들이 계단에 나와 능글맞게 웃으며 “창피하다, 창피해”, “우리는 너희들 환영 안 해” 하고 외쳐댔다.
사실, 공화당 대의원들의 다수는 그 시간에 브로드웨이에서 공짜 연극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6천만 달러[약 6백90억 원]짜리 파티인 전당대회 행사의 일부였다. 2003년 유아사망률이 6퍼센트나 상승한 도시에서 공화당은 그렇게 돈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