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마르크스주의 - 억압에 맞선 투쟁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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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마르크스주의 - 억압에 맞선 투쟁과 연대
콜린 바커
자본주의 체제의 근저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계급 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ABC이다. 하지만 알파벳은 3자가 넘는다.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 지배는 다른 많은 종류의 인간 억압과 뒤엉켜 있다. 이것이 바로 피착취자들이 서로 분열하는 바탕이다.
빼앗긴 집단들은 “다르다”는 이유로 억압당해 왔고, 그 때문에 이에 맞서 싸워 왔다.
종교의 차이는 언제나 분열을 조장하는 구실을 했다. 마찬가지로, 인종 차별적 억압도 자본주의 “문명”의 역사 전체를 일그러뜨렸다. 여성 억압과 동성애자 억압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억압받았고, 이민자들도 억압받았다.
억압 문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언제나 피억압자들과의 연대였다. 레닌의 유명한 말을 빌리면,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온갖 형태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인민의 호민관”이어야 한다.
이것은 계급 투쟁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다. 노동자 운동이 성장해 사회 전체의 지도부를 자처하려면 억압받는 농민, 박해받는 유대인이나 무슬림과 항상 함께해야 하고, 여성 차별과 동성애 혐오, 인종 차별에도 반대해야 한다.
온갖 종류의 불평등을 참고 받아들이는 노동계급은 결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피억압자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억압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2001년에 브래드퍼드·번리·올덤에서 나찌의 깡패들이 미쳐 날뛰자 아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경찰이 개입하기는 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단호하게 조직하고 반격한 아시아인들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아시아인 청년들이 “폭도”로 낙인찍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연히 사회주의자들은 그 “폭도들”을 옹호했다.
인종 차별
경찰은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편들지 않는다. 스티븐 로렌스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명백한 인종 차별 살인 사건을 조사할 때조차도 “제도화된 인종 차별”이 정의를 압도해 버린다.
조직적 저항은 피억압 집단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도전할 수 있는 수단이다. 집단 행동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 변한다.
1950년대 미국 여성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미워했고 오히려 남성들을 좋아했다.
여성 운동의 빛나는 성과 하나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자부심이었다. 이제 그런 자부심이 노동계급 운동을 변모시키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여성 운동은 흑인 공민권 운동에 고무됐다. 흑인 공민권 운동은 1960년대의 위대한 혁명 슬로건, 즉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탄생시켰다.
버스 탑승 거부 운동과 연좌농성, 행진과 도시 반란으로 점철된 그 “길고 뜨거운 여름”을 통해 그 사상은 진정한 의미를 얻었다. 백인 인종 차별주의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1969년 미국 뉴욕의 스톤월 바에서 경찰 탄압에 항의하며 동성애자들이 일으킨 폭동은 동성애자 해방 운동을 촉발했다.
오늘날 수많은 남녀는 더 자유롭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옹호한다. 섹슈얼리티는 모든 자유의 필요 조건이다.
이 모든 투쟁이 오늘날의 노동 운동을 강화해 주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 됐다. 인티파다가 없었다면 그들은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계속 침묵을 강요당한 채 억압받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줄지도 않았을 것이고, 희망이나 자부심도 사라져버렸을 것이며, 전 세계의 동맹 세력도 없었을 것이다.
인티파다는 더 중요한 점을 보여 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때때로 그 “폭력 행위”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자행하는 국가 폭력이 훨씬 더 심각하다.
이스라엘의 폭력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방에서 날마다 발생하는 공공연한 살인 행위만이 아니다. 강요된 빈곤과 경제적 삶의 파괴 역시 폭력인 것이다. 높은 아동사망률은 무장 헬기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인티파다
억압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흔히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그렇게 한다. 그들이 끊임없는 퇴보를 거부할 때만 연대의 가능성이 생긴다. 온유한 자들은 세상을 물려받지 못한다.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 모두에 환호하는 것만이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인가?
억압에 대응하는 어떤 방식들은 자기 패배적이다. 인종 차별적 억압에 대한 초기 대응 중의 하나는 “톰 아저씨”(Uncle Tom)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것은 흑인들이 자비를 베풀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인종 차별적 권력 구조에 입증하려는 노력이었다. 억압자들의 관점에서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무력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반대인 듯한 방식인 테러 역시 자기 패배적 전술이다. 테러 전술은 대중 행동이 아니라 영웅적 소수의 헌신에 의존한다. 테러 전술도 흔히 절망감에서 비롯한다. 최악의 경우는 평범한 노동계급 대중을 공격함으로써 오히려 반동 세력을 강화할 수 있다.
때때로 여러 투쟁이 뒤엉켜 복잡한 전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1960년대에 브리스톨에서는 시크교도들이 버스에서 터번을 두르는 것에 반대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파업을 조직했다.
그러나 시크교도 노동자들이 임금과 근로조건에 관한 플래카드를 들고 피켓라인에 가담하자,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파업은 낭패에 빠져 붕괴했다. 계급 연대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피억압자들의 투쟁 방법에 항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자에 맞서 싸우는 최선의 방법을 둘러싸고 노조 내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과 원리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연대에서 출발해 전략과 전술에 관한 논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