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의 잠 못 이루던 밤
〈노동자 연대〉 구독
3만 명의 노동조합원과 환경운동가 들이
서로 팔짱을 낀 수천 명의 시위대가 WTO 관리들이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회의 시작을 몇 시간 동안 지연시켰을 때 그들은 조직된 대중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호텔 방에 갇힌 코피 아난은 연설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시애틀 항만 노동자 수백 명이 하루 파업을 호소하고 WTO 회의장 출입문을 봉쇄했을 때 그들은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11월 30일 서부 연안의 항만 노동자 9천여 명이 시애틀의 노동자 형제들을 지지하는 연대 파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미국 노동자들이 반격할 수 있고 반격할 것임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그런 아래로부터의 연대에 직면한 워싱턴 주
그는 WTO 회의장 주변의 도심 지역을
파업
WTO 회의가 끝난 12월 3일까지 사흘 동안 시애틀 시를 전쟁터로 만든 것은 시위대가 아니라 정부 관리들이 부추긴 경찰 폭력이었다.
경찰은 수천 명의 시위대를 겨냥해 고무총탄과 사과탄, 최루탄을 쏘아 댔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갑차들이 밤늦게까지 주택가 전 지역에서 최루탄을 쏘아 대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회의 이틀째까지 6백여 명의 시위대가 체포
12월 1일 경찰의 소탕 작전 당시 체포됐던 수백 명의 시위대―노동조합원들, 학생들, 다른 활동가들을 포함해―는 이틀 뒤에도 석방되지 않았다.
경찰은 시위대를 잡아 가둔 버스 안에도 최루탄을 던져 넣었다. 시위대를 태운 버스가 감옥에 도착하자 경찰은 몇몇 활동가를 골라 독방에 감금했다.
함께 잡혀 온 다른 사람들은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이 풀려날 때까지 법정 신문을 집단적으로 거부했다. 한편,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감옥 밖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는 자생적으로 분노를 터뜨렸다.
WTO 회의 마지막 날에도 시위대는 여전히 석방되지 않았으며
시애틀 시위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시애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미국 전역의 신문들은 시위 사진들을 1면에 크게 싣고 본문 기사에서
신문들은 WTO가 비판받는 증거들을 보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단순한 뉴스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값싼 AIDS 치료약이
사람들은 노동자와 학생, 노동조합원과 환경운동가 들을 단결시킨 대중 시위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TV 뉴스들은 시위 진압 장비로 무장한 경찰이 평화적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쏘고 그들을 구타하는 장면이나 맥도날드와 갭 상점이 약탈당하고 유리창이 깨지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시애틀 시 관리들은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경찰의 실제 표적이 아나키스트들이 아니라 수천 명의 평화적 시위대였다는 신문 기사들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이들 시위대가 WTO 관리들의 발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카고 트리뷴〉은 이렇게 보도했다.
클린턴 자신은 WTO 회의 연설에서 폭력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이 이렇게 말한 동기는 분명히 의심스럽지만, 그가 시위의 정당성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평범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갑자기 경제 쟁점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따분한 학자나
심지어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앤드루 코엇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시카고 트리뷴〉의 칼럼니스트 메리 슈미치는 더 솔직했다.
WTO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주류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화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항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를 운영해 온 미국 지배계급이 자신의 뒷마당에서 바지가 벗겨진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시애틀 전투는 많은 교훈을 남겼고, 그것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