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의 잠 못 이루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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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칸쿤 승리 1년 되는 날인 9월 10일 WTO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약 5년 전에도 미국 시애틀에서 WTO에 반대하는 시위가 성공적으로 벌어졌다. 이 시위는 세계적 반자본주의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미국 사회주의자 섀론 스미스가 시애틀 시위와 그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불러일으킨 반향을 소개한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1960년대 말 이후 미국에서는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99년] 11월 30일 시애틀에서 반(反)WTO 시위대는 경찰이 쏜 최루가스를 들이마시며 그렇게 외쳤다.
3만 명의 노동조합원과 환경운동가 들이 “기업 흡혈귀들”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거나 팻말·배너를 들고 시애틀 도심을 행진할 때 그들은 미국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들끓는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서로 팔짱을 낀 수천 명의 시위대가 WTO 관리들이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회의 시작을 몇 시간 동안 지연시켰을 때 그들은 조직된 대중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호텔 방에 갇힌 코피 아난은 연설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당시 미 국무장관]도 예정된 연설을 할 수 없었다.
시애틀 항만 노동자 수백 명이 하루 파업을 호소하고 WTO 회의장 출입문을 봉쇄했을 때 그들은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11월 30일 서부 연안의 항만 노동자 9천여 명이 시애틀의 노동자 형제들을 지지하는 연대 파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미국 노동자들이 반격할 수 있고 반격할 것임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그런 아래로부터의 연대에 직면한 워싱턴 주(州) 주지사가 비상 사태를 선포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60년대에 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이 이 정부에 들어 와 있다.”고 뻐기곤 했던 시애틀 시장 폴 셸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주방위군을 끌어들였다.
그는 WTO 회의장 주변의 도심 지역을 “시위 금지 구역”으로 선포하고 오후 7시 통금 시간 이후 그 지역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겠다고 선언했다.
파업
WTO 회의가 끝난 12월 3일까지 사흘 동안 시애틀 시를 전쟁터로 만든 것은 시위대가 아니라 정부 관리들이 부추긴 경찰 폭력이었다.
경찰은 수천 명의 시위대를 겨냥해 고무총탄과 사과탄, 최루탄을 쏘아 댔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갑차들이 밤늦게까지 주택가 전 지역에서 최루탄을 쏘아 대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회의 이틀째까지 6백여 명의 시위대가 체포·투옥됐다. 현장을 목격한 대학조직센터의 빌 캐포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주택가에서는 새벽 1시까지도 경찰들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최루탄을 쏘아 댔고 …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지역 주민들과 나이든 사람들, 그리고 이 광경을 창문으로 내다보며 경찰들에게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아이들의 눈과 목은 (최루 가스 때문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12월 1일 경찰의 소탕 작전 당시 체포됐던 수백 명의 시위대―노동조합원들, 학생들, 다른 활동가들을 포함해―는 이틀 뒤에도 석방되지 않았다.
경찰은 시위대를 잡아 가둔 버스 안에도 최루탄을 던져 넣었다. 시위대를 태운 버스가 감옥에 도착하자 경찰은 몇몇 활동가를 골라 독방에 감금했다.
함께 잡혀 온 다른 사람들은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이 풀려날 때까지 법정 신문을 집단적으로 거부했다. 한편,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감옥 밖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는 자생적으로 분노를 터뜨렸다.
WTO 회의 마지막 날에도 시위대는 여전히 석방되지 않았으며 [AFL-CIO 산하] 킹 군(群) 노조협의회는 “시위 금지 구역”인 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고 호소했다.
시애틀 시위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시애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미국 전역의 신문들은 시위 사진들을 1면에 크게 싣고 본문 기사에서 “시위대는 자유 무역과 세계 자본주의가 인권과 환경을 희생시킨 대가라고 생각한다.” 하고 보도했다.
신문들은 WTO가 비판받는 증거들을 보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단순한 뉴스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값싼 AIDS 치료약이 “제약회사들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WTO가 남아공의 AIDS 치료약 생산을 금지시켰으며, WTO의 자유 무역 사상은 아동 노동과 혹사 노동을 인정하고 있으며, 기업들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위험한 유전자 조작 식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 등을 말이다.
사람들은 노동자와 학생, 노동조합원과 환경운동가 들을 단결시킨 대중 시위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TV 뉴스들은 시위 진압 장비로 무장한 경찰이 평화적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쏘고 그들을 구타하는 장면이나 맥도날드와 갭 상점이 약탈당하고 유리창이 깨지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시애틀 시 관리들은 “훌리건들”―상점 유리창을 깨뜨린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경찰의 실제 표적이 아나키스트들이 아니라 수천 명의 평화적 시위대였다는 신문 기사들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이들 시위대가 WTO 관리들의 발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카고 트리뷴〉은 이렇게 보도했다.
“3만 5천여 명이 에메랄드 시[시애틀의 별명]의 거리에 모여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시작하자, 시위 진압 장비로 무장한 경찰이 회의가 제 시간에 열릴 수 있도록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했다.…처음에 경찰은 약탈자와 파괴자들이 회의장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멋대로 거리를 휩쓸고 다니게 내버려뒀다.”
클린턴 자신은 WTO 회의 연설에서 폭력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비난하는 것은 폭력적인 [시위대]일 뿐, 다른 시위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클린턴이 이렇게 말한 동기는 분명히 의심스럽지만, 그가 시위의 정당성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평범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갑자기 경제 쟁점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따분한 학자나 “전문가” 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에 대해서 말이다.
심지어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앤드루 코엇도 이 점을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시애틀 시위는 저임금을 받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시카고 트리뷴〉의 칼럼니스트 메리 슈미치는 더 솔직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WTO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당연히 이 작자들이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그들이 정말로 우리 몰래 세계를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경제 뉴스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동 노동이나 환경 파괴, 그들이 지도에서 찾지도 못하는 나라들의 저임금 문제 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WTO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주류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화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항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를 운영해 온 미국 지배계급이 자신의 뒷마당에서 바지가 벗겨진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시애틀 전투는 많은 교훈을 남겼고, 그것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