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경험을 계급투쟁적 맥락 속에서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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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에서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민주노총 “정치 방침”이었다. 그 이면에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깔려 있다. 한편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실패한 실험이었다고 단정한다. 그 반대편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어게인 민주노동당’(“진보대통합”)의 주술(呪術)을 건다. 두 평가 모두 일면적이다.
우경적인 한국 공식 정치 지형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 왼쪽에서 민주노동당이 건설된 것은 역사적 진보였다. 그러므로 좌파는 이 실험을 지지하며 새롭게 정치화하는 선진 노동자들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이 지혜로운 전술이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의식이 갑자기 비약하지 않으므로, 노동자 계급이 일단 떨쳐 일어나면 자신의 전통적 조직에서 자동으로 벗어나 혁명적으로 바뀔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다.
그와 동시에, 민주노동당은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제공할 수 있고 지배계급이 양보할 태세가 돼 있는 것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아무리 좌파적 개혁주의일지라도 이런 개혁주의의 한계 때문에 노동자 대중의 변화 염원을 한동안 효과적으로 표현하다가 갑자기 지지를 잃을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부침은 이를 보여 준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민주노동당의 등장 배경
민주노동당은 2000년 1월에 창당됐다. 더 거슬러 가면 1999년 8월 창당 발기인대회가 실질적 창당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당시 국제적 규모로 등장한 급진좌파 운동의 일부였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분출했다. 이 운동들의 정치적 표현은 급진좌파였다.(급진좌파는 사회민주주의 좌파에서 혁명적 좌파까지 아우르는 국제 운동의 용어다.)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집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시장에 굴복하고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자, 대중의 환멸이 커졌다. 이런 환멸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한편에서는 우파나 극우파 정당들이 성과를 거뒀다. 그 반대편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일부가 더한층 왼쪽으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정치적 공백을 메우려고 급진좌파 정당들이 등장했다. 영국의 ‘리스펙트’, 스코틀랜드사회당, 독일의 ‘노동과 사회 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이후 민주사회당과 통합해 좌파당이 됐다), 포르투갈의 ‘좌파블록’,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 브라질의 ‘사회주의와자유당’ 등등. 이 정당들의 프로젝트는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배신과 개혁 파탄으로 생겨난 왼쪽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한국판 급진좌파 정당이라 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36년 동안 지속된 일당독재에 대한 대중적 반감 덕분에 당선했지만, 그 정부는 자본가 계급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까지도 지속된 과정이었다. 이로 인해 그 왼쪽에서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한 공간이 열렸다.
민주노동당 등장의 직접적 계기들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1996년 12월부터 1997년 1월에 이르는 민주노총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 이후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국민승리21’을 결성해 그해 12월 대선에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후보로 출마시켰다. 권 후보는 30만 표를 득표했다.
둘째, 1997년 11월 금융 공황과 IMF 관리 체제 도입은 파업 못지 않게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여기에 2000년대 들어 새로 부활한 저항 운동 — 호텔롯데·사회보험 노동조합과 국민·주택은행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 투쟁,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중학생 압사 사건 항의 운동,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반신자유주의 운동 등 — 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의 왼쪽 공간을 메울 필요성과 압력을 창출했다.
민주노동당이 이 공간을 부분적으로 메웠다. 혁명적 강령에 근거해서 그런 게 아니라 개혁주의적 강령에 근거해서 그럴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어떤 정당이었는가?
민주노동당은 의회를 통해 민주·사회 개혁을 법제화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염원을 표현한 것이자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의 공식 정치 참여 염원을 표현한 것이었다.
요컨대,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을 매개로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의 조직적·재정적 지원에 결정적으로 의존했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결정했다. 당시 구체적 맥락에서 “배타적 지지” 방침은 조직 노동자들 대부분이 더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에 정치적으로 의탁하지 않고 자체의 정당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압도 다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었다. 선거 자금의 상당 부분도 민주노총이 댔다. 민주노총은 2004년 총선 기금으로 20억 원가량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동당의 투표 기반도 압도적으로 노동자 계급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주로 노동자 계급 밀집 지구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2000년 총선 때 울산과 창원에서 30퍼센트가 넘게 득표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총 조합원 가운데 72.2퍼센트가 민주노동당에 투표했다. 2004년 총선에서 지역구 당선자(권영길·조승수)가 나온 곳도 노동자 도시인 창원과 울산이었다.
민주노동당 내 포퓰리스트들은 당의 노동자 계급적 성격을 벗어 던지고 싶어 했다. 당명에서 “노동”을 빼고 싶어 했다. 중간계급의 마음에 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노동자 정당이냐 국민 정당이냐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적 급진화와 정치 운동의 성장, 여전한 산업 전투성의 압력 때문에 포퓰리스트들의 국민 정당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듯 민주노동당이 과거의 진보 정당들(민중당 등)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당의 사회적 구성과 기반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체제에 결박돼 있었다. 당의 핵심 지도부는 자본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신성불가침 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2005년 심상정 의원은 “민주노동당은 반기업 정당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또, 당 지도자들은 의회 민주주의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계급 조직의 지원을 받는 친(親)자본주의 정당이었다.
변화하는 계급세력균형과 민주노동당의 부침
일부 좌파들은 이데올로기적 잣대만으로 민주노동당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한 당의 역사를 쓰는 것은 특정 각도에서 계급투쟁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의 성쇠를 올바르게 분석하려면 해당 시기 계급세력균형을 이해해야 한다.
2000년 창당부터 대략 2004년까지 민주노동당은 현란한 속도로 발전했다. 19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만 표를 얻었다. 2000년 창당 직후 총선 득표율은 1.18퍼센트였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1백34만 표(8.1퍼센트)를 획득했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97만 표(3.9퍼센트)를 득표했다. 2004년 총선에서 2백77만 표(13퍼센트)를 득표해 마침내 10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창당 4년 만에 제3당으로 원내에 진입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당원 수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99년에 7천6명 → 2000년 1만 1천69명 → 2001년 1만 6천4백95명 → 2002년 2만 4천6백82명 → 2003년 3만 4천9백40명 → 2004년 5월 5만 2천4백99명. 창당 4년 만에 4배로 성장한 것이다.
이 시기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한층 심화하는 대중의 급진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대중 급진화의 원동력은 노동자 투쟁이었다. 2000년대 들어 호텔롯데와 사회보험 노동자들을 필두로 한국통신과 국민·주택은행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2001년 초에 비록 대우자동차 파업이 패배를 겪긴 했지만, 노동자 운동은 자신감과 사기가 심각하게 꺾일 만한 결정적 대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2003년 10월 ‘열사 정국’에서 노동자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민주당의 노무현 탄핵에 반대하는 거대한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건재한 노동자 운동과 대중의 급진화 덕분에 “진보 정당에 대한 시각 변화”가 나타났다.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온 노무현 탄핵 반대 운동 같은 대중 투쟁이 사회 이데올로기를 왼쪽으로 이동시켰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속도만큼 빠르게 위기가 찾아 왔다. 민주노동당 위기의 근저에는 바뀐 계급투쟁 상태가 있었다. 2004년 4·15 총선을 전후해 투쟁 수준은 매우 높았다. 그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기대 이상의 의석을 확보했다.
총선 뒤에도 민주노동당은 대중 투쟁을 고무하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2004년 6월 김선일 피살 국면과 그해 말 국가보안법 반대 투쟁에서 그랬다.
그러나 2005년부터 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으로 노동자 대중은 환멸을 느끼며 사기 저하를 겪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대중 투쟁으로는 안 된다는 잘못된 교훈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 지도부는 대중 투쟁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제 당 지도부는 ‘데모하는 정당’, ‘반대만 하는 정당’, ‘운동권 사회단체’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6년 지방선거 뒤에 열린 당대회는 중소기업 육성론을 당의 핵심 사업으로 결정했다. 당의 주요 정책이 부유세 같은 계급 간 분배 정책에서 중소기업 육성론으로 예리하게 이동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내 최대 평등파 그룹이었던 ‘전진’이 사회연대전략을 제출했다. 정규직이 사용자들에 먼저 양보하자는 양보 정책이었다. 바로 직전 지방선거에서 ‘전진’ 소속의 서울시장 후보가 ‘사회주의’를 선전한 것을 떠올려 보면 그 변화는 꽤 심각했다.
그러나 대중 투쟁보다 의회 활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내달을수록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더욱 심화했다.
당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둘러싼 논쟁도 격화됐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에 대한 태도, 북한 문제, 노동조합 관료주의 문제 등이 뜨거운 쟁점이었다. 이것들은 민주노동당의 아킬레스 건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온건한 노동 일간지인 〈매일노동뉴스〉 기자조차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열린우리당보다 딱 한 뼘 더 나가 있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보통 냉전 우파인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반대해 온 데 비해 자유주의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독립적이지 못한 태도를 자주 보인 것이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노무현 정부의 성공이 민주노동당에 도움이 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노회찬 전 의원은 노무현 정부가 민주노동당에 연정을 제안한 것에 대해 비록 조건부였지만 지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해 지지층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를 통해 기성 정치 체제에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싶어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기반인 노동자 계급 속에서는 위상이 약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민주노동당이 친북 정당으로 비쳐지는 것은 분명 마이너스 효과를 낼 것이었다. 국정원이 2006년 10월에 ‘일심회’ 사건을 터뜨린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었다. 당내 평등파 계열이 ‘일심회’ 사건 관련자들을 방어하지 않으면서 민주노동당은 한층 곤경에 빠졌다. 2005년 북핵 실험을 놓고도 평등파는 양비론적 입장을 폈다. 반면, 자주파는 북핵 실험을 ‘북한의 자위권’이라는 식으로 대응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민주노총 지도자들의 비리와 투쟁 회피·배신이 잇따랐다. 노동조합 관료주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물질적 토대와 관련 있기 때문에 진정한 아킬레스 건이었다. 2005년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논쟁이 첨예하게 벌어질 때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2005년 10·26 울산북구 재선거에 비정규직 확대에 합의한 전력이 있는 노조 지도자를 국회의원 후보로 내세웠다가 패배했다.
민주노동당 분열의 진정한 원인
내연화돼 있던 위기가 실망스러운 대선 결과(권영길 후보는 3퍼센트를 획득했다)를 계기로 폭발했다. 마침내 2008년 2월 분당했다.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분열은 단순히 실망스러운 대선 결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몇 년 간 부상한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계급투쟁의 충분한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현실과 관련 있었다.
2007년 한미FTA 반대 운동과 이랜드 노동자 투쟁들에 노동조합의 참가와 연대가 상당히 존재했음에도 정부와 사용자를 굴복시키기에는 미흡했다. 이 투쟁이 정치(전全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 중 상당수는 민주노동당 지지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문국현이 민주노동당의 잠재적 기반을 잠식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대선 성적에 책임 지고 사퇴한 뒤 심상정 비대위가 등장했다. 심 비대위는 “민주노총당, 친북당, 운동권당”에서 벗어나자는 혁신안을 제출했다.
심 비대위의 “민주노총당” 극복 안은 정치와 경제의 분업, 즉 파업이나 임금 인상 등 경제적 쟁점들은 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다루고, 주로 선거 문제로 여겨지는 정치적 쟁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소속 의원들이 다루자는 발상이었다. 민주노동당의 본질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므로 심 비대위의 혁신안은 민주노동당을 좀 더 그 본질에 어울리게 만들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경 분리는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적·부문주의적 약점을 더한층 두드러지게 만들 것이었다.
심 비대위의 ‘일심회’ 관련자 제명 기도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걸맞는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그와 동시에, 득표에 도움이 안 되는 민주노동당의 ‘친북’ 이미지를 제거하겠다는 선거주의의 발로이기도 했다.
심 비대위의 우경적 프로젝트는 대의원대회에서 패배했다. ‘다함께’(‘노동자연대’의 전신)는 심 비대위의 우경화 기도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개혁주의인 두 개의 진보 정당이 생겨났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전술
지금까지 논의한 바로 그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은 민주노동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급진좌파들은 민주노동당에 비타협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예컨대, 옛 사회당의 지도자들은 민주노동당을 “가짜 노동당”이라고 규정하며 흔히 종파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개혁주의자들과 그들이 노동자 계급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1백 년도 더 넘는 역사적 교훈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을 지지하는 노동자 대중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전술들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혁명가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공동전선 전술들을 발전시켰다.
‘다함께’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입당 전술을 사용했다. 민주노동당 전체를 견인할 수 있다거나 당 기구를 장악해 혁명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당내 일부 좌파는 그럴 수 있다고 착각했다가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히자 실의와 낙담에 빠지기도 했다.
‘다함께’가 입당 전술을 사용한 것은, 선진 노동자들의 정치화가 민주노동당으로 수렴되는 상황과 접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민주노동당 바깥에서 그 당의 영향력과 오류를 지적하는 것보다 당 안에서 선진 노동자들의 동료로서 그런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개혁주의에 대처하는 데서 더 효과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다함께’는 이 쉽지 않은 과제를 수행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계급의 의식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다함께’가 입당 전술을 사용했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에 용해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독자적인 조직과 정치(간행물, 모임 등)를 통해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잘한 것에 대해서는 지지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