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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성폭력 개념 논쟁과 노동자연대 사건에 대하여

서언

나는 2015년 2월, 고려대에서 열린 맑시즘 포럼에 참석하였다. 당시 나는 〈노동자 연대〉 회원이 아니었고, 이른바 ‘노동자 연대 비방사건’이라는 사건 (이하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다. 나는 남성이지만 학창시절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맑시즘 포럼에서도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강연에 참석하였다. 거기서 뜻밖에도 이 사건에 대해 처음 알게 되어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이 사건에 대해 점차 알아 가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말해 〈노동자 연대〉에 대해 ‘성폭력 단체’라고 비난하는 것은 내가 가진 정의 관념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이유로만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노동자 연대〉에 후원 회원 가입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에 대한 대응에 있어 〈노동자 연대〉 또는 〈노동자 연대〉의 회원들이 제기한 성폭력 개념에 대하여는 상당한 정도로 비판과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에 대해 나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 성폭력 개념에 대한 논쟁

나는 이 사건에 대한 논란이 성폭력 개념에 대한 논쟁으로 흘러가게 된 것에 대해 심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먼저 성폭력에 대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누가 올바른 성폭력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폭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정의는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UN과 국제보건기구(WHO)의 정의이다. UN의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 선언문(United Nations 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은 여성에 대한 심리적 폭력과 성희롱이 여성에 대한 폭력에 포함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UN은 1995년 중국 북경에서 제4차 세계여성회의를 개최하고 북경행동강령(The Beijing Platform for Action)을 채택하였으며 이 강령은 조직적 집단 강간에서 성희롱, 원치 않는 성적 구애 행위, 기타 여성에게 해로운 전통적 관행까지를 성폭력이라고 선언하였다. EU 총회도 성폭력에 대한 폭넓은 정의를 수용하였고 EU 회원국들은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노출 및 음란 행위, 포르노의 배포, 품위 손상 행위(offences against decency) 등의 성희롱 행위를 성폭력 범죄로 정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 예방센터(CDC)는 원치 않는 비접촉적 성적 경험(Noncontact unwanted sexual experiences)을 성폭력의 한 형태로 규정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성적 언사 (sexual comments)와 포르노 보여주기 (unwanted exposure to pornography)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미국 국립 사법 연구소 (National Institute of Justice)는 성폭력의 형태를 성희롱 (sexual harrassment), 성적 공격 (sexual assault), 강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성기노출이나 원치 않는 사람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은 성희롱이 아니라 ‘성적 공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법률도 상대적으로 포괄적인 범위의 행위를 성폭력 범죄로 정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EU나 미국 등의 사례를 든 것은 우리가 선진국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을 하려고 함이 아니라, 그러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성폭력 개념의 확장 또는 성폭력에 대한 폭넓은 개념 정의를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나 급진적 페미니즘의 시각이라고 파악할 수만은 없으며 특별히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중도 좌파나 중도 우파도 위와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위와 같은 성폭력 개념이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일반화되지 않은 언어 사용이라는데 있다. (많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는 불쾌한 성적 농담, 원치 않는 상대에 대한 지속적 구애, 여성의 외모에 대한 평가, 그리고 이 사건에 관련된 행위인 포르노 보여주기와 같은 행위는 성희롱일수는 있어도 성폭력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 대중의 인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연대〉는 폭넓은 성폭력 개념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이 사건 피해자측은 광의의 성폭력 개념을 내세우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 대중의 시각에서는 〈노동자 연대〉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겠지만, 성폭력 개념에 대한 국제적인 추세,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해하고 있는 층,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 그리고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 지식인, 관련 분야의 활동가들은 〈노동자 연대〉의 성폭력 개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피해자측의 성폭력 개념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다른 주장도 옳다고 판단하게 되고 따라서 결론적으로 〈노동자 연대〉가 성폭력을 옹호하는 단체라는 주장도 받아들이게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2. 이 사건 가해자들의 행위

이 사건 가해자들의 행위는 성희롱 내지 성적 공격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인다. 성희롱 내지 성적 공격이 성폭력의 한 형태라는 입장에서는 그들의 행위가 성폭력으로 분류될 것이며, 성폭력과 성희롱을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성희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의 사용에 따른 차이일 뿐이며 가해자들의 행위의 본질이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즉, 이 사건 가해자들은 모두 피해자 여성에게 성적 불쾌감을 느끼게 하고 인격권을 침해한바 이것은 이 사건 판결문에 명시되어 있고 해당 판결은 당사자들이 항소하지 않아 확정되었으므로 그것은 확립된 사실로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으며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나는 가해자들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를 모두 반대한다.

첫째, 나는 이 사건 가해자들의 행위의 심각성이 평가 절하되어 마치 사소한 실수나 정당화될 수 있는 행위로 인식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남성이기에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이 원치 않게 포르노를 보여주는 행위가 얼마나 끔찍한 경험이 되는지 정확하게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여성주의자들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은 언제나 남성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또한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싫다는 여성에게 억지로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이면 몰라도 그것을 옆에서 묵인하고 방조한 것까지 그렇게 큰 범죄일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보고 나는 그러한 나의 생각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 사건 판결은 가해자들의 행위가 중범죄라고는 할 수 없다하더라도 결코 사소한 범죄도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나 성폭력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도 엄중한 가해 행위라는 것을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명확하게 밝힌 것이 이 사건 판결문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라고 생각되며 피해자에 대한 가해 행위를 묵인하거나 방조하지 않을 도덕적 책임감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이 사건 가해자들의 행위의 심각성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그에 비례하지 않게 가해자들이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설령 범죄자라 하더라도 전과 사실을 공개하거나 전과자라는 낙인을 찍어 비난하거나 사회적으로 모욕을 하는 것은 인권침해임에 분명하다. 하물며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20대 초반에 불과한 젊은이들이고 설령 피해자가 주장하는 성폭력 개념에 해당하는 잘못을 저질렀다하더라도, 나아가 그들이 평소에 성차별적 언행을 일삼았다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성폭력범’의 의미에 비추어 보아, 그들의 개인적 신상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어 성폭력범으로 낙인찍히고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게 보인다.

3. 이 사건의 공론화

이 사건 피해자측이 가해자들의 행위를 인터넷을 통해 공론화한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며 이 사건 판결도 그러한 행위는 공익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혹자는 이 사건의 공론화가 설령 위법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고 그것에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있지만, 그것은 사건이 이미 진행된 이후에 사건의 진행을 반추하며 좀 더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했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뿐 공론화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피해자로서는 상당히 용기 있게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공론화는 공개적인 토론과 논쟁의 장으로 사건을 가지고 오는 것이며 피해자가 이 사건을 공론화함에 따라 당사자나 관련자들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논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사실 그러하기 때문에 필자도 이러한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있어서는 관련자들의 프라이버시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에 제3자가 사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무례할 수 있고 맥락에 따라서는 피해자측의 개념처럼 2차 가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공론화되는 순간 불특정 다수가 논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피해자측 주장의 핵심은 특정 대상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으로서 사안이 매우 심각한 것이었으므로, 가해자로 지목된 대상뿐 아니라 그들과 친분이 있건 관련이 있건 간에 그 누구라도 그에 대해 방어하고 반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불가피한 일이다.

피해자측으로서는 자신에 대한 반박이 고통스럽게 느껴질지라도 자신이 만든 공개적인 논쟁의 장에서 상대방의 반박에 대해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재반박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논쟁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반박한 사람들을 ‘성폭력 2차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그러한 주장이 일종의 수사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 다수가 특정 단체 회원이었으므로 그 단체가 성폭력 단체라고 지목하며 대응한 것은 정의 관념을 넘어선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4. 〈노동자 연대〉를 ‘성폭력 단체’로 규정하는 것에 대하여

또한 이 지점에서 위에서 말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폭넓은 성폭력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노동자 연대〉를 성폭력 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단체가 조직적으로 성범죄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매우 심각하고 엄중한 혐의로서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저지른 포르노 보여주기와는 차원이 다른 중범죄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대한 혐의에 대해 증거주의를 넘어서서 피해자중심주의를 적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문이 든다.

피해자측은 〈노동자 연대〉의 회원들이 가해자를 옹호하였고, 단체가 사건 해결에 미온적이었으며 오히려 나아가 가해자가 제기한 소송에까지 적극 참여하였으므로 〈노동자 연대〉가 성폭력 2차 가해자이고 따라서 성폭력 단체라고 주장하나, 그러한 주장의 신빙성을 둘째 치고라도, 설령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조직적 성폭력을 구성한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첫째, 가해자와 일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에게도 죄가 있다는 논리는 연좌제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둘째,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가 그 회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회원들이 어떤 논쟁에 참여하여 누구를 옹호하고 누구를 비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며, 더구나 단체의 운영자나 임원들이 공동으로 모의하여 회원들에게 특정인을 옹호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회원들이 그에 따랐다는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는 상상하기가 매우 힘들며, 그렇게 볼 수 있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나는 〈노동자 연대〉가 조직적으로 이 사건 가해자 중 한명의 변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폭력 2차 가해를 구성하지 않으며 성폭력 단체라고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어느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성폭력 사건으로 해고를 당했을 때, 노조가 그 조합원이 제기한 해고무효소송 사건에 대해 법률적 조언을 해 주고 다른 조합원들이 그 조합원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였다 하여 노조를 성폭력 단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며, 이 사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 사건에 있어서는 〈노동자 연대〉가 가해자의 변호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증거조차 찾아 볼 수 없다. 만약 〈노동자 연대〉의 무슨 무슨 위원회에서 이 사건 소송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개입하기로 논의했다는 회의록이나 비망록 같은 증거가 발견된다면 모를까, 단순히 〈노동자 연대〉의 회원들이 자신의 시각과 입장에 따라 공론장에서 의견을 피력하거나 소송에서 증언을 한 것을 가지고 조직적 개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피해자측은 조직적 개입이라고 주장하나, 단순히 그 회원들 다수가 개입하였다 하여 조직적 개입으로 볼 수 없다. 무슬림 테러리스트 100명을 데려 와도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조직적으로 테러를 저질렀다는 주장에 동조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셋째, 설령 성폭력 사건에 있어 어떤 증인이 가해자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였고 또한 설령 그 가해자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증인까지 성폭력범이고 나아가 그 가해자나 증인이 속한 단체까지 성폭력범이라고 보는 것은 대단히 지나친 비약이고 정의 관념에 맞지 않는다. 성폭력에 대한 국제적 기준들도 이러한 범위까지 그 개념을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

넷째, 피해자측은 가해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과 〈노동자 연대〉 회원들이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것을 마치 대단히 잘못된 행위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부르주아 사법기구에 사건을 가져간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나 이 역시 납득할 수 없다. 시민이 다른 시민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것은 사건에 대해 사법적인 판단을 구하는 행위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지 그것을 사유로 비난이나 비판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가급적 소송까지 가지 않고 당사자끼리 원만하게 해결하거나 내부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은 충분히 타당하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소송을 하겠다고 결정한 당사자 그리고 나아가 소송을 도와준 사람들 까지를 비난할 수는 없다. 피해자측은 부르주아 사법기구를 활용한다고 비난하나, 레닌은 일찍이 공산주의자는 의회라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이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좌익 소아병으로 규정하였으며 이것은 부르주아 사법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있어도 사회주의자라 하여 부르주아 사법기관을 활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는 아무리 그 단체의 회원이라 하여도 시민의 한 명인 이 사건의 가해자가 사법기관에 제소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며, 다른 회원들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 역시 그 회원들의 판단과 양심에 맡길 문제이지 단체가 하라 마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가 피해자측이 원하는 방식으로 회원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노동자 연대〉에게 대단히 비민주적인 단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단체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 명확하다.

여섯째, 여성으로서 성희롱 내지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또다시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2차 가해라고 불리건 다른 무엇으로 불리건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배려할 것인가를 고려하고 논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를 살펴보자. 자식이 누군가에게 살해되는 끔찍한 일을 겪은 부모가 있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느 수사관은 혹시 그 부모가 자식을 죽인 것은 아닐지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 부모에게는 또다른 괴로움일지라도 말이다. 자식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자식을 살해했다는 의심마저 받는 것은 대단히 큰 고통이라는 점에 수긍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사회적으로 그 수사관을 2차 가해자로 비난할 수 있을까? 또한 그 부모가 실제로는 무고하다 하더라도 수상쩍은 행동을 한 것을 목격하여 그것을 자신의 시각에 따라 증언한 증인도 살인범의 가해에 준하는 가해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임을 고려하여 변호인이나 조력자 또는 기타 제도적 장치가 피해자를 중심적으로 바라보고 그 진술을 신뢰하며 그 입장을 배려하여 추가적인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하겠으나, 사실 관계를 다투는데 있어서 피해자의 입장을 반박하며 반대 진술을 하는 사람을 가해자로 규정하여 사회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무리 중범죄자라 하더라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근대적 사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으며 상식적인 정의 관념에도 어긋난다. 강간범을 대리하는 변호인이나 법률 회사를 피해자가 비난하는 것은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변호인이나 법률 회사를 성폭력 가해자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곱 번째, 나는 〈노동자 연대〉의 상당수 남성 회원들이 성차별적이거나 남성중심적 발언을 한 것을 피해자가 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노동자 연대〉가 성폭력 단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자 연대〉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단체이므로, 단체의 남성 회원들이 여성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의 남성의 평균적 인식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특별히 현저하게 다를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노동자 연대〉의 일부 남성 회원들이 성차별적이거나 남성중심적 사고를 드러내는 발언을 한 것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성차별적 언사가 정당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러한 사유로 그 단체를 조직적 성범죄에 가담한 성폭력 단체라고 규정하는 것은 엄청나게 과도한 비약이라는 점이다. 〈노동자 연대〉라는 조직 내에 성차별적 관행이 여전히 존재하며 남성 회원들도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면이 있으므로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은 〈노동자 연대〉가 마땅히 새겨 들어야할 주장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노동자 연대〉를 성폭력 단체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부당하다.

결어

이 사건은 오랜 시간에 걸쳐 무수히 많은 말들이 오간 사건이기에 필자로서는 이 글 안에서 모든 사항들에 대해 다룰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 글을 접고자 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자면 먼저, 이 사건에 있어서 피해자측의 성폭력 개념, 즉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행한 행위를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행위가 여성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도덕적·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에 〈노동자 연대〉의 (일부) 회원들이 이 사건 가해자들의 행위를 성폭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만약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회원이 있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침해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의 심각성에 대해 비례에 맞지 않게 가혹하게 모욕을 주거나 비난을 하는 것 역시 도덕과 정의 관념에 어긋난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정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것이며 사실상 하나의 담론 안에 있는 것인데, 이 사건이 전개되면서 적대적 이분법으로 갈라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경험을 통해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그러한 적대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건이 〈노동자 연대〉에게 벌어진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나,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대해 매우 귀중할 수 있는 집단적 경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에 대해 〈노동자 연대〉가 진정으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논리적인 말로 강력하게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자기 결정권을 포함한 인권문제와 성희롱/성폭력 문제 등의 여성 문제에 있어서 그 어느 단체보다도 적극적이고 앞서나갈 수 있는 ‘실천’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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