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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대책위의 전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노동자연대에 대한 호소

1. 조직 보위론

내가 동영상 사건에 대해 여러 글을 읽으면서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의아해했던 것은, 대책위 측이 법을 통한 해결에 대해 일관되게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글에서 동영상 사건의 피해자 개인을 포함하여 지지모임과 대책위 구성원 등을 통칭하여 ‘대책위 측’으로 부르겠다.)

대책위 측은 이 문제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언론에 알리지 않은 이유가 성폭력 폭로가 진보운동을 사보타주하거나 좌파들을 마녀 사냥하는 무기로 사용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런데 이 논리가 바로 페미니스트들이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해 온 이른바 조직 보위론이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조직을 당연히 보호하는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의 운동 조직은 수많은 활동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건설되는 것이며 조직이 공격을 당하여 위기에 처했는데 구성원들이 나 몰라라 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일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들이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조직 보위론에 대해 그토록 치를 떠는 이유는 조직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조직을 보위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 명의 시민인 피해자의 법적 권리와 인권을 짓밟는 경우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사법 기관이나 제도적인 구제 절차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 조직은 피해자의 그러한 권리 행사를 방해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진보 운동 진영의 활동가이거나 주요 인사라는 이유로 피해자의 법률적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조직 차원에서 피해자에게 압력을 가하여 사법기관에 고발하지 못하게 하거나 사건의 은폐를 종용하는 것은 조직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당연한 노력을 넘어서는 불법적이고 비민주적인 월권행위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특이한 점은 대책위 측이 운동 진영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즉 일종의 내면화된 조직 보위론에 의해 스스로 법률적 권리의 행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페미니스트의 주장이라기보다는 국가기관으로서의 사법제도 전체를 부정하는 일종의 극좌적 오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또한 나는 대책위 측이 이러한 주장을 일반론으로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아하다. 즉, 만약 운동 진영 내에서 다른 사건이 벌어진 경우, 그 사건의 피해자가 사법 기관에 고발하려 하는 것에 대해 대책위 측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궁금하다. 그것 역시도 비판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별개의 일이므로 인정할 것인가.

2. 조직적 은폐?

또한 이 사건에서 조직적인 사건의 은폐가 있었다는 점도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해 2015년 2월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조직적 은폐가 이루어졌다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또한 대책위 측은 노동자연대 측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가하여 사건의 은폐를 시도했다고 주장하지만, 명예훼손으로 인한 고소라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거니와 그렇게 하겠다고 발언하는 것도 협박이 아니다 (고소를 하겠다는 말이 협박이 아니라는 점은 대법원 판례로 확립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라).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이 글에서 다룰 수는 없지만, 표현의 자유로서 자신의 주장을 할 권리는 명예훼손을 당하지 않을 권리와 병존하는 것이지 후자를 주장하였다고 하여 전자를 부정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조정 절차로 화해를 진행하는 가운데 노동자연대 측이 자신에 대한 비방을 중단할 것을 조건으로 하였으나 대책위 측이 그것을 사건에 대한 공론화를 막는 은폐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나로서는 이 또한 납득하기가 어렵다. 사건에 대한 사법적 판결 이전에 서로 조정과 화해 절차로 해결하는 것은 당연히 상호 비방을 중단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조정을 통해 화해를 원하지만 공개적인 비판과 비난은 계속 할 것이라는 말은 화해할 의사가 없음을 말하는 것일 뿐 상대방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비난은 부당하다고 보인다.

3. 운동적 심판관의 탄생

대책위 측은 검찰과 법정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며 진정한 해결은 운동적 해결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재판이 끝났다고 이 사건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나로서는 우려를 넘어서는 공포와 경악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니까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는 검경과 법원이라는 사법 기관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 비루한 사법기관보다 성폭력 사건을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주체로 내세우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대책위 측 자신이다. 그러니까 대책위라는 일종의 운동적 심판관은 법률 따위는 가볍게 초월하여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과 경찰이 설령 범죄라 여기지 않아서 기소를 하지 않아도, 또한 아무리 재판을 하여 판결이 내려진다 해도, 그것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라는 하잘 것 없으며 무능한 존재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내린 조치이고 판결일 뿐 진정한 해결이 아니며, 법률 위에 초월하여 계시고 성 인지적 관점을 가지고 계시며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체화하시는 위대한 운동적 심판관이 흡족하지 못한다면 가해자에 대한 운동적 방식의 형벌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그 조직이 성폭력이 재발되지 않는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발판으로 성폭력이 일소된 사회가 마침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진정 알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사법과 법률 시스템을 초월하여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들을 판단하는 위대한 성폭력 심판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초법적이고 초국가적인 권능과 권한이 불과 20대의 학생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놀라운 것은, 순전히 나이주의에서 비롯된 비열한 인식이며 남성 중심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든 편견 탓일 터.

대책위 측은 피해자가 이 사건을 노동자연대에 제기했을 때 그에 대해 해결의 의지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조직원들이 피해자 측을 험한 말로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개인들의 행동이 아니라 조직을 보위하기 위한 조직원들의 집단적 린치였고 또한 이것이 성폭력에 대한 2차 가해이므로 노동자연대라는 단체는 성폭력 2차 가해단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대해 응징하고 바로잡기 위한 운동적 해결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검찰청이나 법원에 가서 주장했을 때, 검사와 법률가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한 논리로 어느 단체를 성폭력 가해 단체라고 처벌할 수는 없으니 흥분 가라앉히시고 그만 집에 돌아가시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이 부르주가 국가기구의 일원으로서 여성주의에 무지몽매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 뿐이고, 페미니즘을 공부하시어 올바른 성폭력 개념과 2차 가해의 개념을 가지고 계신 위대한 성폭력 심판관께서 성폭력 단체라고 판단하면 성폭력 단체인 것이다!

4. 2차 피해

이 사건에서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 때 노동자연대 일부 회원들이 험한 말로 대응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대책위 측의 주장에는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인터넷과 SNS 상에서 인신 공격적 비난을 받고 그로 인해 정신적·심리적 피해를 받은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며 그러한 피해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매우 안타깝다.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는 없으나 나 역시 인터넷에서 수많은 악성 댓글들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인터넷 상에서 불특정 다수에 의한 인격 모독적 공격을 받고서는 하루 종일 눈물을 펑펑 쏟아낸 적이 있으며, 피해자의 이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해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고통에 대해서 피해자 지지모임과 대책위 등의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잘 이겨냈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문제제기를 한 피해자가 그러한 인격 모독적 발언을 통해 정신적 고통을 겪는 것을 2차 피해라고 분명히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당사자들이 직접 사건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층간 소음으로 아래층 주민이 위층 주민을 직접 찾아가서 따지면 좋은 말 듣기는 쉽지 않고 욕설이 오가다가 갈등이 증폭되어 살인까지 벌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제3자에 의한 중재 또는 법적이고 공식적인 제도적·절차적 해결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과 윤리를 내세워도 인간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공격에 대해 흥분하여 반응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그 자체로 정당화할 수는 없어도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은 있다. 따라서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피해자를 그러한 감정적 반응에 직접 노출시켜서는 안 되며, 또한 피해자 스스로 가해자를 대면하거나 온라인상으로 접촉하여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는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행위이므로 피해자 보호를 위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법률가나 상담사 등의 조력을 받아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의 문제제기에 의하여 SNS나 온라인상으로 험한 말로 대응을 하였다 하여 내가 노동자연대라는 단체를 집단적 2차 가해 단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회원들 일부가 자신의 단체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을 하였다고 하여 조직 전체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보이고, 둘째,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제제기를 하는 등의 정황으로 보아, 설령 늦게 문제제기를 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해도, 갑작스러운 문제제기에 회원들이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며, 셋째. 조직 차원에서 그러한 개인적인 감정적 대응을 중단하도록 노력했다는 점이다. 대책위 측의 글에서도 노동자연대가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대응을 하다가 나중에는 좀 더 지능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노동자연대 측이 주장하듯이 조직 차원에서 회원들의 감정적 대응을 자제시켰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보인다.

5. 2차 가해 단체로 몰아가는 전술의 부당성

나아가 원래의 사건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사건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단체의 구성원들 일부가 감정적 대응을 한 것이 조직 보위론에 따른 조직적 행위이므로 그것이 2차 가해이고 단체가 가해단체라고 하는 논리는 너무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소위 사건의 운동적 해결이라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행동 방식이 정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솔직히 말해 너무나 비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운동 사회 내에 성폭력 심판관을 두어 운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다른 이슈들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환경 심판관을 통해 운동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어떨까? 사전과 문헌을 찾아 ‘환경 파괴’의 정의를 살펴보자. 그리고 그 개념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운동 사회에서 찾아보자. 틀림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자가 속한 사회단체나 운동 단체에 문제 제기를 해 보자. “아니, 시민운동 단체가 어떻게 환경 파괴를 조장하고 방조할 수 있는 것이며 인류 사회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뒤떨어진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윤리적 비판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운동적 해결을 추진하여, 조직 전체 차원에서 사죄를 하고 행위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도록 촉구하면, 틀림없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회원들이 나올 것이다. 아니 문제 제기를 했는데 올바로 대응하고 사과를 하여 사건을 해결하려 하지는 않고 막말로 대응하다니, 이것은 원래의 사건과는 별개로 또다른 가해행위이고 폭력행위이므로 이 단체는 폭력 단체, 가해 단체, 환경 파괴 단체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마땅히 이 단체와는 연대를 중단하고 운동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원래의 행위자가 환경 파괴에 대해 벌금을 내고 처벌받았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원사건이 아니라 정당한 문제제기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조직적 폭력으로 대응한 단체를 상대로 운동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란 말이다. 그 개인이 처벌받았다 하여 또다시 그 단체에서 환경 파괴범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러한 행위가 근절될 때까지 운동을 중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디 환경 문제 뿐이겠는가. 동성애 인권 문제도 이런 식으로 해결해 보면 어떨까. 이번에는 노조를 돌며 동성애 인권의식이 결여되어 동성애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한 조합원을 찾아보면 어떨까? 이것 역시 개념적으로 분명한 동성애자에 대한 언어폭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조합원의 폭력 행위에 대해 노조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 이 뿐이랴. 동물권에 대해서 운동적 해결을 추구하며 애완동물을 유기하여 버린 회원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반인권적 행위를 한 이주 노동자 회원을 찾아서 이주 노동자 단체를 인권의식이 넘치는 단체로 정화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운동 단체가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반성은 하지 못하고 감히 반발을 한다면, 행여나 무엄하게도 어떤 회원들이 SNS나 댓글에 막말이라도 쓴다면, 이것이야 말로 그 단체가 폭력 단체, 2차 가해 단체, 반인권 단체라는 증거인 것이다!

도대체 이 운동이 해결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소위 운동적 해결이라는 이러한 방식은 좋게 말해 이상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사건의 해결을 추구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운동 단체를 협박하는 것에 불과하며 나아가 진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와 상대해야 할 대상을 놔두고 운동 단체끼리의 갈등만을 증폭시킬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운동적 해결이라 함은 잘못된 해결 방식이며 방식 자체에 대한 판단을 떠나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비효율적 운동 방식이다. 글라슬이라는 학자는 갈등의 점증적 변형과정을 9단계로 제안한 바 있는데, 경직 → 논쟁→ 편향행동 → 세력화 → 체면훼손 → 전략과 위협 → 이전투구 → 분열시도 → 공멸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소위 성폭력 사건의 운동적 해결은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갈등의 점증과 폭발만을 가져오며 결국에는 갈등 당사자들 모두가 상처를 입고 나락으로 빠지는 공멸 단계에 접어들게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당장 이 사건의 진행을 생각해 보라.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서로의 상처는 깊어져가고, 그 모든 상처를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혐오감만 가지게 될 것이며, 결국은 회한만 남게 될 것이다. 필자가 주변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 해도, 거의 아무도 대책위 측의 주장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노동자연대 측의 주장을 자세히 읽어 보지 않는다. 그저 둘이 수 년 동안 서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눈살을 찌푸릴 뿐이며 이것이 바로 공멸로 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본다.

6. 린치에 대하여

피해자 측은 이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 때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피해자를 공격하며 집단 린치를 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린치’가 대체 무엇인가? 린치는 법에 따르지 않고 주관적으로 잘잘못을 판단하여 사법제도가 아니라 개인(들)이 그에 대한 형벌을 직접 가하는 행위, 즉 사적인 형벌이라는 뜻에서의 사형(私刑)이 바로 린치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가해자들을 린치의 방법으로 해결하자고 애초에 주장한 것은 다름 아닌 피해자 측이 아닌가? 피해자 측은 법률적인 처벌을 제안한 것도 아니고 단체 내의 기존의 제도적 절차에 따른 징계를 제안한 것도 아니고, 단체가 임의로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어서 가해자를 징계하자고 제안했으며 이것이 바로 린치에 의한 사적 해결이다.

조직이나 단체가 그 자체 내의 징계위원회 등을 두는 것도 모두 법률적인 근거를 가지고 운영하는 것이고, 그러한 위원회의 판단에 대하여 불복할 경우에는 그것을 법원에 제소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사적인 단체 내의 위원회도 법률의 테두리 안에 두고 있는 것이다. 기존에 마련된 조직 내의 징계 절차가 아니라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어 처벌하는 것 역시 개념적으로 보면 린치이다. 어느 단체에 성폭력에 관한 내부 규약이나 징계 절차가 없다고 하여 성폭력을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국가의 사법제도가 이미 있는데 굳이 단체가 그러한 업무를 할 필요가 없을 수 있고 또는 그러한 여력이 없을 수도 있으며 징계절차를 두고 말고는 그 단체와 조직이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다. 조직 내에 징계위원회 제도가 없거나 미비하다고 하면 사법적 판단을 구하는 방법만이 린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새로운 제도를 그제야 만든다고 하면, 특정한 사건을 해결하고 특정한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서 급조되고 그것도 피해자 측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어떤 어리석은 가해자가 스스로 걸어들어 가겠는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에 동의할 가해자는 없다. 아무리 가해자라 하더라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존중되고 증거주의에 입각하여 판단하며 스스로를 소명하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며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곳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적 인권 의식이며 나는 이와 모순되는 인권의식을 가지는 페미니스트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건 대책위 측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연대 일부 회원들의 대응을 집단적 린치라고 비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사법기구에 제소한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것은 일종의 이중구속(double bind)이다. 회원들이 직접 비판을 하면 린치라서 잘못된 것이고, 린치가 아니라 사법적 대응을 하면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법률 체제에 의존하는 것이라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것은 대책위 측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에 불과하다.

7. 학생들의 열정과 이상주의 그리고 올바른 공론화

내가 이 사건에 대한 대책위 측의 주장을 살펴보다가 가장 큰 허탈감을 느낀 부분은 이 사건에 있어 2,500만 원짜리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 학생인 피해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벌금을 부과한 것이고 가해자가 사건의 공론화를 위축시키려고 한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허탈감을 느낀 핵심 단어는 바로 ‘학생’과 ‘공론화’이다.

그렇다. 이 사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학생’들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나는 지금 학생들 싸움에 끼어들어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회 경험이 어느 정도 있다면 명예훼손 위자료로 2,500만원을 청구하는 것은 쓸데없이 소가만 높게 불러서 인지대만 많이 내는 일이고, 형식상으로 액수만 부풀리는 것이지, 실제 위자료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알 것이다.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야 2,500만원이라는 말에 얼마나 놀랐겠나.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2,500만 원짜리 소송에 대하여 ‘학생’으로서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는 것보다, 이 사건에서 포르노 영상을 보여주는 것을 방조한 남학생과 노동자연대라는 단체에게 ‘성폭력범’이라는 라는 이름으로 공개 고발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무거운 무게의 공격 행위라는 점이다. 학생으로서 교과서에서 성폭력과 2차 피해의 개념을 배우고 또한 현실에서 자신이나 동료가 겪은 일에 대하여 분연히 들고 일어나 책에서 배운 개념들을 활용하여 개인(들)과 단체를 성폭력범으로서 비판하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열정과 정의감의 발로라고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게 성폭력이라는 엄중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조사를 하고 처벌하는 활동은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공식적으로 훈련받고 그 자격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법기관에게 국민들에 의해 위임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이렇든 중대한 사안에 대하여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잣대를 들이대어 함부로 린치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폭력에 대한 조사를 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은 비유하면 실탄이 들어있는 진짜 총기인바, 이러한 총기를 가지고 함부로 휘두르고 공격하면 아무리 학생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역시 소송이라는 실탄으로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제야 학생이라는 이름 뒤로 후퇴하면서 상대에게 실탄 사용을 비난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대책위 측은 ‘공론화’라는 개념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으며, 사실상 상대방의 평판을 저하시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거나 규탄을 하는 행위를 공론화라고 부르고 있다. 사건을 당사자들과 관련 단체들이 논의하여 운동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그 해당 공동체라는 좁은 범위에서 공론화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법정이라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공개적인 토론과 판단의 장에 사건을 가져가서 그 모든 과정이 시민들에게 공개되고 또한 판결문의 형태로 논의의 결말이 확정되고 기록되어 그 이후의 논의에서도 그것이 참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 사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론화인 것이다. 당사자들이 서로 대화로 원만히 넘어가거나 또는 단체 내에서 내부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공론화를 하지 않는 것이며, 당사자들끼리 조용히 합의하도록 종용하거나 단체 내부에서 처리하고 넘어가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이 공론화되지 못하도록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은 사건이 내부적으로 원만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원만한 해결이라는 구실로 피해자들에게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므로) 공식적인 제도를 통해 해결될 수 있도록 추구해 왔으며, 부르주아 사법기구가 여성주의적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도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성운동을 펼치는 것이지, 제도의 미비함으로 인해 여성 단체가 스스로 나서서 사법 권력을 휘둘러서 가해자와 가해 단체를 처벌하겠다는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노동자연대 측에서 이 사건에 대해 대응을 하는데 있어 일부 회원들이 자의적 판단으로 피해자에게 험한 말을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 개인들이 분명히 잘못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가장 적절히 대응한 것이 있다면 이 사건을 법원에 가져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 사법적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하여 대책위 측은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운동적 해결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전혀 끝날 수 없는 갈등 관계를 영속화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정말 이러저러한 이유로 2차 가해 행위를 했다면, 고소나 고발 또는 기타 공식적인 사법 절차를 통해 판단을 구해야 할 것인바, 현존하는 어떠한 사법 논리로도 노동자연대를 2차 가해라는 범죄로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부르주아 국가기관의 미흡함으로 치부하고 자신들이 직접 사법권을 행사하여 운동적으로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린치인 것이다.

8. 페미니스트를 옹호하며

이 사건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큰 충격이다. 나는 학창 시절에 좋은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알게 되어 그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진 것에 대해서 내 인생 최대의 행운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또한 개인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도 나를 가장 많이 도와 준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들 중 다수는 이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 거론된 바 있는 100인위원회나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노동자연대의 어떤 회원들에 의해서는 남성들을 적대시하는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비록 남성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언사를 보였고 때로는 큰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나를 규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감싸주고 이해해주며 나의 이야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고 또한 그에 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침으로써 내가 페미니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이 정말 분리주의적이고 남성들을 적대시하는 존재였다면 나의 이러한 소중한 경험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사업에 실패한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 왔고 지금은 해고 노동자로서 법적인 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그렇게 생존을 위해 정신없이 살아오면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과 실천으로부터 멀어져 왔음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페미니스트들과 여성 운동에 대한 애정과 지지를 늘 품어 왔었다.

나는 처음 이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 당연히 이 사건 대책위를 성폭력에 반대하며 피해자를 지지하는 여성주의적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았고 대책위를 지지하고 노동자연대를 비판할 마음의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세를 가지고 대책위 측의 글들을 읽어내려 가며 너무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양심으로는 도저히 대책위를 지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나의 이러한 판단이 남성 중심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뼈 속까지 사무친 가부장적 인식으로 인해, 그리고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무지에 의해, 잘못된 것일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으로 혼란스럽기도 하다.

대책위의 활동에 다소간 문제점이 있더라도, 노동자연대나 그 회원들이 다소 억울함을 겪더라도, 그것을 희생삼아 반성폭력 운동이 발전하여 성폭력 근절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여성 운동이 일치단결한 대오를 보여주고 성폭력 반대를 외치는 것이 마땅하므로 응당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옹호하는 대책위 측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양심에 따른 판단을 따를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리고 설령 내가 이 공간에서 쓴 글에서 페미니즘 내에서 하나의 입장, 하나의 운동적 전술에 대해 비판하였다 하여 페미니즘 일반을 비판한 것으로 읽히는 것에 철저하게 반대한다. 페미니즘은 풍부한 담론이며 내가 제기한 비판 역시 그 담론의 일부로 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에 있어서의 하나의 전술에 문제점이 있다고 하여 반성폭력 운동 자체나 그 취지가 부정되는 것에 대해도 철저히 반대한다.

그리고 노동자연대 회원들에게도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한다. 대책위 측이 비록 무리가 있는 주장을 하여 노동자연대와 그 회원들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이 성폭력이라는 여성을 상대로 한 끔찍한 인권침해와 가해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한 젊은이들의 이상주의적 열정과 정의감의 발현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부디 이해해 주기 바란다. 또한 이 사건 대책위의 전술적 오류로 인해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페미니스트들과 여성 운동 진영은 사회주의자들과 반드시 연대해야할 대상이며 페미니스트 일반을 적대시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책위 측의 주장 중 성폭력에 대한 비판만큼은 부디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지고 조직 내에서 여성의 인권이 침해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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