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안)을 부결시키고 투쟁 태세를 갖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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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철도노조 김영훈 집행부가 근속승진제를 폐지하는 단협 잠정합의(안)을 내놨다. 5월 10~12일 조합원 총투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김영훈 집행부의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는 현장 조합원들의 바람과 노조의 공식 결정을 거스른 비민주적 처사다. 근속승진제 사수는 김영훈 위원장 자신의 선거 공약이었을 뿐 아니라, 올해 3월 대의원대회의 결정이기도 했다.
현장 조합원들은 근속승진제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사를 거듭 보여 줬다. 사측의 회유와 압박은 현장에서 거의 먹히지 않았다. 특히, 3월 말 김영훈 집행부가 근속승진제 수정안을 교섭에 제출하려 했을 때 전국 지부장들이 강력히 반대해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그 뒤 근속승진제 사수를 결의하는 지부 성명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그런데도 김영훈 집행부는 근속승진제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시작조차 해 보지 않고 폐지 합의를 해 줬다. 조합원들이 느끼는 분노와 배신감이 상당한 것은 당연하다.
노동자들은 근속승진제가 폐지되면 공사 측이 개인별 성과 평가 권한을 무기로 전횡을 부리고 현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안다. 근속승진제는 사측의 전횡과 통제로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노조를 민주화하면서 쟁취한 소중한 성과였다.
그래서 근속승진제를 지키는 것은 노동자들의 조직력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조직력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방어하는 데 필수적이고, 적절한 노동조건 유지는 안정적이고 질 좋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수적이다.
매년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임금 인상 속에서 그나마 부족한 임금을 보충해 준 것이 근속승진에 따른 임금 인상이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또, 근속승진제는 철도 노동자들이 민영화 저지 파업을 수차례 하고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도 조직력을 유지하는 데 버팀목이 됐다. 근속승진제가 없었다면 사측은 활동가들을 솎아 내고 조합원들을 이간질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정부는 대표적인 공기업이자 노조도 강성인 철도공사에서 근속승진제 폐지를 관철시켜, 그것을 도약판 삼아 다른 공공기관으로 ‘정상화’ 2단계 추진을 확대하려 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5월 10~12일 총투표에서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를 부결시키고, 근속승진제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 줘야 한다.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안의 문제점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안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승진이 사측의 심사를 원칙으로 이뤄지게 된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협력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승진을 위해 동료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승진 포인트제’ 역시 “합리”적이고 “공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더 많은 포인트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할 뿐 아니라, 어쨌든 최종적으로는 사측의 심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안대로라면, 직급별 현원의 정원 초과 시에는 승진 기회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현재 3급과 4급 현원이 정원을 초과한 상태라 상당 기간 승진 적체가 벌어질 것이다. 예상 퇴직자 수에 비춰 계산을 해 보면, 현재 5급 이하 노동자들은 2020년 이후부터야 승진 기회가 생긴다.(내년부터 정년이 연장되면 승진 적체 기간은 더 길어질 공산이 크다.)
셋째, 이 안은 하위 직급 노동자일수록 피해가 크게 설계돼 있어 노동자 내 갈등과 반목을 낳을 수 있다. 승진 대상자 중 ‘근속자 일정 비율 우대’는 한시적으로 적용되는데, 이조차 현재 4급과 5급에게만 그것도 한 직급 승진할 때만 적용된다. 6급 이하는 근속 우대 승진 기회 자체가 아예 없다.
승진 적체로 인한 임금 손실을 대우 수당으로 보전해 주겠다는 것도 전액 보전이 아닐뿐더러, 현재 4급과 5급에게만 1회 승진에 한해 적용된다. 결국 하위 직급일수록 근속승진제 폐지에 따른 불이익이 점점 커져 6·7급과 특정직 노동자 3천여 명은 일체의 손실 보전에서 제외된다.
넷째, 근속승진제 폐지를 대가로 삭감된 인건비를 원상 회복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얼마든지 공수표가 될 수 있다. 기획재정부가 이를 승인했다 해도, 근속승진제 폐지 후 감사원이 다시 나서 직급별 정원 초과가 해결되지 않았다며 인건비 환수 조처를 내릴 수 있다. 2009년에도 감사원은 임단협에 따라 이미 지급한 임금조차 문제 삼았고, 그 결과 1인당 임금이 평균 6백만 원씩 삭감됐다. 2014년에도 성과급이 초과 지급됐다며, 이미 지급된 성과급의 1백40퍼센트 환수 결정을 내렸다.
설사 인건비 원상 회복이 되더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조만간 시작될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등의 추진 과정에서 인건비 삭감은 또다시 노조를 압박하는 카드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근속승진제 폐지를 수용하면 정당성이 강화되기는커녕 자신감만 저하될 것
잠정합의(안)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김영훈 위원장은 “성과연봉제, 퇴출제, 임금피크제 도입에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근속승진제 폐지를 수용해 단협을 체결하면 “적어도 단협 기간 내에는 제도 변경이 불가능”하므로 정부와 사측의 추가적 단협 개악 압박을 막기가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공공기관 ‘정상화’ 1단계 추진 당시만 봐도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철도공사는 단협 시한이 만료되지 않았는데도 노조에 기업복지 삭감을 위한 단협 개악 합의를 강요했다. 그리고 당시 김명환 집행부는 이를 거부하지 않고 단협 개악에 합의해 줬다.
무엇보다 김영훈 집행부는 근속승진제 사수를 요구하면 ‘철밥통’ 공격에 노출되기 십상이어서 어차피 이길 수 없다고 본 듯하다. 그래서 노조가 양보안을 내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에 만족하는 게 장차 “사회적 정당성과 명분의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여긴 듯하다.
이것은 노동운동 일각에서 공공부문·정규직의 상대적 호조건을 일부 양보하는 것이 정부의 ‘철밥통’, ‘노동귀족’ 공격에 대응하는 ‘공세적’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주들이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를 부각하면서 이간질하는 것은 노동조건을 하향 평준화하려는 것이지, 결코 상대적으로 열악한 부문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정부는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과 고용조건 공격을 관철하고 이를 민간부문까지 확대하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이럴 때 최선의 대응 방안은 공공부문·정규직 노동자들이 강력한 조직력을 십분 사용해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방어할 뿐 아니라 더 열악한 부문의 조건 개선을 위해서도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공공부문·정규직 노동자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정부가 노동조건 하향 평준화 기도를 추진하기가 더 쉬워질 뿐이다.
만약 공공부문·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건을 양보해야 ‘사회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김영훈 위원장의 해명과 달리 철도노조는 공공부문의 정년 보장과 고임금을 공격하는 임금피크제나 성과연봉제에도 일관되게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 같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방어 투쟁이 사회적 정당성과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공부문의 노동조건은 질 좋고 안전한 공공서비스 제공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공기관은 총액인건비제로 인건비 증액이 가로막혀 있어 필요한 업무가 있어도 정규 인력을 충원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악화되고 비정규직이 정규직 노동자의 25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증가했다. 당연히 이는 안전사고 등 공공서비스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지키는 일은 제 밥그릇만 챙기는 이기적인 투쟁이 아니다. 노동조건 방어와 공공서비스 강화를 함께 요구하며 투쟁에 나선다면 철도 민영화 파업 당시와 같은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수세적 태도는 오히려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려, 정부의 민영화 같은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또,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보면 남은 최선의 방안은 노조 지도자들이 교섭에서 협상 수완을 발휘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협상안을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을 수동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힘에 의존할 때만 정부와 공사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다.
철도 노동자들은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안)을 부결시킴으로써, 2단계 ‘정상화’ 공격 –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퇴출제, 민영화 – 에도 맞서 싸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조건과 공공서비스를 지키는 길이자, 노동계급 전체의 조건 악화를 막는 데 이바지하는 길이다.
활동가들의 과제 – 잠정합의(안)을 부결시키고 투쟁 대안을 구축하자
현재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를 시작으로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안)을 부결시키자는 호소가 점점 늘고 있다. 지부들의 성명도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전국의 활동가들은 잠정합의(안) 부결 움직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본부장들은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를 지지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해당 지방본부 노동자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월 26일 전국지부장회의 때 김영훈 집행부가 내놓은 근속승진제 양보안이 압도적 반대에 부딪혔던 것은 근속승진제를 지키려는 현장의 정서가 광범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지금 이런 정서를 모아 내려면, 근속승진제 폐지에 반대하는 지부장들과 기층의 활동가들이 전국 대회를 열어 근속승진제 폐지 잠정합의(안) 부결과 이후 투쟁을 결의하고, 이를 지방 대회들로 이어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근속승진제 폐지에 반대하는 모든 활동가들이 지방과 직종을 넘어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면 지역간·직종간 불균등성을 줄이고 부결 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네트워크로 연결된 활동가들은 서로 전망을 공유하면서, 노조 각급 단위와 조합원들 사이에서 각종 모임과 회의를 열고 근속승진제 사수 의지를 모아가야 한다.
또, 이것은 잠정합의(안) 부결을 이끌어 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후 투쟁 대안을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해야 한다. 사실, 조합원들은 이후 투쟁이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봐야 자신 있게 부결 선동에 화답할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잠정합의(안) 부결 선동이 노조를 분열시킬 것이라며 조합원 개인의 판단에 맡겨 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현 ‘통합’ 집행부가 무너질 것에 대한 우려의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조합원들에게 ‘부결해 봤자 대안은 없다’는 식의 잘못된 신호를 줘 냉소와 자포자기만 확산시킬 것이다. 이미 적잖은 조합원들은 김명환 지도부 불신임 이후 들어선 김영훈 지도부가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큰 불만을 느끼고 있다. 사실, 당시 상당수 활동가들이 단협 개악에 합의한 세력을 포함해 ‘통합’ 집행부를 세운 것은 조합원들이 지도부를 불신임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선택이었다.
물론 다수의 활동가들은 김명환 집행부의 연이은 양보교섭과 투쟁 회피에 비판적이었고 새로운 집행부는 이와는 달라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통합’ 집행부를 잘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보니, 기층에서 현장 조합원들의 활동을 강화하기보다 집행부 내에서의 논쟁에 집중하게 되고 공개적인 비판도 삼가야 한다는 압력은 더 커졌던 듯하다. ‘통합’ 집행부의 일부라는 점 때문에 활동가들이 독립적인 견해를 내놓고 기층에서 투쟁을 조직해 가는 것에 발목이 잡히는 약점이 더 커진 것이다.
적어도 3월 말 김영훈 위원장이 근속승진제 폐지를 수용하려는 위험이 명백히 드러나고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을 때, 기층에서 근속승진제 사수를 위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런데 이때조차 활동가들은 중앙 집행부 안에서 이를 막는 데 집중했지, 기층 조합원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며 행동을 조직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제 활동가들은 더 이상 노조 분열로 비칠 것을 우려하며 움츠리지 말고,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를 비판하며 단호하게 부결 선동에 나서 조합원들의 힘을 결집해야 한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여전히 근속승진제를 지켜야 한다는 현장의 광범한 정서가 있고, 잠정합의(안) 부결 호소도 확산되고 있다.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잠정합의(안) 부결을 이끌어 내고 대안적 구심을 형성하며 투쟁을 조직해 간다면, 2단계 ‘정상화’ 추진을 위한 정부와 사측의 공세에 맞설 수 있는 가능성도 한층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