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의 재(再)국정화가 잘못됐다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한낱 어용단체의 글에나 논박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국정화를 심적으로는 반대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반대하길 주저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집필진을 균형 있게 짜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는 경우 말이다.
실제로 10월 12일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집필진은 명망 있고 실력 있는 명예교수로부터 노·장·청을 아우르는 팀으로 구성하겠다”, “(진보적 학자들도) 본인들이 참여한다면 개방할 것”이라며 “균형 있는” 필진을 구성하겠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황우여 부총리도 지난 18일 “국정교과서도 친일이나 독재를 미화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정도면 ‘믿을 만한’ 약속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말뿐에 불과한 저들의 약속을 무슨 근거로 믿는단 말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역사 관련 책임자들을 살펴보자. 일단 김정배 위원장 본인이 12·12 쿠데타와 광주 학살을 미화한 1982년 《국사》 교과서의 연구진이었다. 그의 전임자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을 ‘국부’라고 예찬하고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감수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배용 원장은 뉴라이트 성향의 ‘바른역사국민연합’ 원로자문단이었고, 동북아역사재단 김호섭 이사장은 ‘건국절’을 주장하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옹호했다. 전부 다 박근혜 정부가 앉힌 기관장들이다. 국정교과서 필진만큼은 “균형 있게” 구성하겠다? 고양이에게는 생선을 맡기지 않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 아니겠는가!
또한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자. 정부와 새누리당은 현행 《한국사》 교과서들이 “좌편향”이라는 점을 대놓고 국정화의 명분으로 삼고 있다. 지금보다 ‘우경화’된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마당에, 국정교과서의 필진을 “균형 있는” 학자들로 구성한다면 저들은 국정화를 한 ‘보람’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비판적인 여론 속에 국정화 조치를 ‘받아’ 주면 집필진을 균형 있게 짜줄 것이라는 발상이 공상적(空想的)인 이유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받아들이면서 균형 잡힌 서술을 기대하는 것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다. 저들의 말에 넘어가지 말고 흔들림 없이 국정화를 반대하자!
이시헌 씨는 이 글을 10월 20일 대학에 대자보로도 부착했다. 이시헌 씨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서울대인 모임’ 소속 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