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②:
스웨덴 모델 1 - 살쮀바덴 협약과 계급타협 전략(1)
〈노동자 연대〉 구독
총선을 반년 앞두고 진보진영과 노동운동 안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복지국가 모델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진보진영 내에서는
* 이번 주제는 글의 분량 때문에 두차례로 나눠 싣습니다.
① 스웨덴 복지국가는 건재한가?
② 스웨덴 모델 1- 살쮀바덴 협약과 계급타협 전략
④ 스웨덴 모델 2 – 연대임금정책과 렌-마이드너 모델 : 누가 이익을 얻었나?
⑤ 스웨덴 모델 3 – 임노동자기금 : 살아있는 호랑이의 발톱을 하나씩 뽑을 수 있을까?
⑥ 스웨덴 사민당 – 누구의 정당인가?
나라 | 1900 ~ 1913 | 1919 ~ 1938 | 1946 ~ 1976 |
---|---|---|---|
스웨덴 | 1286 | 1440 | 43 |
영국 | 460 | 1066 | 213 |
프랑스 | 309 | 404 | 566 |
이탈리아 | 293 | 126 | 631 |
독일 | 489 | 875 | 31 |
살쮀바덴 협약은 1938년 스웨덴 노총

한국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그동안 기업별 노조 체계가 가진 약점들을 지적하며 산별노조나 지역노조 등을 건설하려 애써 왔다. 기업별 노조 체계 하에서는 소규모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기도 어렵고 정작 노조를 만들어도 고용주들이 무시하기 일쑤다. 경험이 일천하고 자원이 부족하다 보니 임금이나 단체협상에서도 불리한 처지에 놓이기 쉽다. 자본들 사이의 하청 구조 같은 위계체계 때문에 하위 기업주들의 임금 지불 능력이 낮고,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도 공세적으로 싸우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때로는 대공장
물론 수많은 투사들이 실천으로 입증했듯이 이런 어려움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용주에 맞서 싸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거꾸로 산별노조나 지역노조 등이 오늘날 노동자 투쟁이 겪는 어려움을 자동으로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다룰 스웨덴 노동자들의 경험은 이런 구조가 노동조합 관료의 통제력을 강화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에 보수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조합 구조보다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럼에도 공장이나 기업의 담장을 넘어 더 광범한 노조로 단결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특히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실직자도 늘어나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스웨덴 LO처럼 민주노총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과 조건에 대해 사용자 대표단과 협상을 벌일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기업별 노조 체계의 약점이 많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국내의 많은 학자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스웨덴의 살쮀바덴 협약이 노동조합의 힘을 키우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물론 살쮀바덴 협약이 스웨덴 모델의
훗날 스웨덴 모델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연대임금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스웨덴 모델의 기둥
그러나 당시 일관되게 상층 단일 교섭 구조를 추구한 것은 LO가 아니라 SAF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살쮀바덴 협약 이전에 스웨덴에서는 노동자들의 전투적 행동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살쮀바덴 협약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점 때문에 신광영 교수는
그러나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스웨덴 자본가들은 당시 상대적으로 온건한 부위였던 금속노조가 사용자 측
요컨대 노동계급 전체와 자본가 계급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과정은 단순하지는 않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온건한 개혁주의 전략을 채택한 LO 지도부와 사민당이 기층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서서히 압도해 가는 과정이 제2차세계대전 전까지 진행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전투적이었던 건설노조 등의 반발 때문에 LO 지도부는 1920년대까지도 이런 계급타협 전략을 노골적으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LO 지도부가 이미 1900년대부터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분명하다.
서유럽의 다른 선진국에서 대개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정당을 건설한 과정과 달리, 스웨덴에서는 사민당이 LO 건설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1898년에 창립한 LO는 수년 후 사민당과 형식적으로 분리됐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상층의 분업
스웨덴 사민당은 1900년대 이전부터 매우 온건했고, 1918년 가을에 사민당의 핵심 지도자 묄러가 당 이론지에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혹독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민당 지도자들은 현존 국가를 전복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해 시장의 문제를 바로잡으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
사민당 지도부의 이런 노선은 LO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LO 지도부가 기층 노동자들의 전투적 행동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특히 당시 유럽의 혁명적 분위기 덕분에 LO 내에서도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이 적잖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컨대 1902년에 사민당 지도부가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정치 파업을 제안하자, 이를 둘러싸고 LO 지도부 좌우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반면 사민당 당원
이 파업을 계기로 스웨덴 자본가들은 SAF를 창설하고 직장폐쇄를 무기로 반격에 나섰다. 반면, LO 지도부는 정치 파업이 자본가들을 단결시키고 노조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여기며 기층의 행동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탓에 1904년에 다시 부쳐진 총파업 찬반 투표는 부결됐다. 당시 노동조합의 태도를 보며, 사민당 당원의 61.8퍼센트는 정치 파업에 나설 경우 노동조합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6년 LO 지도부는 대규모 파업은
그러나 노동자들은 1909년에 다시 총파업에 돌입했다. 1908년에 시작된 경제 위기 탓에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하락했다. 그래서 임금 인상이 핵심 요구였다. 7월에 벌어진 소규모 파업들에 자본가들이 직장폐쇄로 대응했고 LO 지도부는 기층의 압력에 떠밀려 총파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LO 지도부는 산하 노조 지도부와의 상의도 없이 단지 총파업을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1909년 파업의 패배를 두고 기층의 과도한 전투성이 노조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당시 스웨덴에서도 1909년 파업의 패배 이후 LO 내 계급 협력 노선을 추구하는 우파의 입지가 강화됐다.
그러나 이 파업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의 경험을 비교 분석한 논문에서 스웨덴의 1909년 파업을
LO 지도부는 이 파업을 단지 정부 개입을 이끌어내려는 수단으로만 활용하려 했다. LO 지도부는 정부 내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한하려 했지만 정작 자유주의자들은 이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LO 지도부는 무역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철도, 병원, 가스 수송, 청소 등 핵심 공공부문을 파업에서 제외시켰다. 가장 전투적이었던 항만노조는 1906년 LO 지도부의
요컨대, 기층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는커녕 파업의
그러나 스웨덴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1917년 무렵 LO의 조직률은 1909년 수준을 회복한다.
혁명의 파고가 낮아지고 1920년대 대공황이 찾아오자 LO 지도부는 다시 자본가들과의 협력에 나선다. 이제 정부에 입각한 사민당은 노동자 파업에 더욱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집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필자의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