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 전쟁과 그에 맞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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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하버드대학교의 저명한 교수들이 백악관을 방문했다. 정부 참여 경험이 상당한 그 교수들을 이끈 인물은 게임 이론가 토머스 셸링이었다. 그들은 한때 하버드대학교의 동료 교수였고 지금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를 만났다. 그 교수들은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에 항의했다.
미국은 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전사들의 ‘피신처’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며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이 침공으로 미국 대학생들은 항의 물결을 일으켰고, 안타깝게도 켄트주립대학교에서 4명, 잭슨주립대학교에서 2명이 주방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가 그레그 그랜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키신저의 옛 동료 교수들은 닉슨과 키신저가 이미 1년 전부터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비밀리에 폭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 [그래도] 반대할 이유는 충분했다. 셸링은 ‘역겹다’고 말했다.
“오늘날 미국에는 당파와 관계없이 누구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정이 있다. 미국은 테러리스트나 잠재적 테러리스트의 ‘은신처’를 겨냥해 군사력을 사용할 권리가 있고, 그 은신처가 미국의 적국이 아닌 주권국에 있더라도 무방하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을 전제로 조지 W 부시는 2003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버락 오바마는 소말리아·예멘·파키스탄으로 무인 폭격기 공격을 확대했고 최근에는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이슬람국가 전사들에 대항하는 군사작전을 펼친다.
“1970년에는 이런 식의 정당화가 용인되지 않았다. 셸링 등 하버드대학교 교수들은 키신저가 공산당의 ‘피신처’를 파괴해야 한다며 [캄보디아] 침공을 정당화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한 기자가 그 교수들의 반대 논리를 이렇게 요약했다. 중립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다른 나라도 예컨대 테러리스트를 일소하겠다며 또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데 이용할 선례가 될 수 있다.’”
이처럼 1970년에는 용납하기 힘들었던 이례적인 일이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정상적인 일이 돼 버렸다. 그랜딘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책임 회피
“역사는 긍정된다. 미국의 전례 없는 역사적 성공으로 예외주의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부정된다. 또는 적어도 과거를 인과관계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정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조처가 부른 역풍이 … 그 원인을 깨끗이 씻어 내며 새 기원 설화를 제공하고 우리 국경 바깥에 널리 퍼진 혼란에 책임을 씌운다는 것이다.
“이런 책임 회피는 최근에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2003년에 우리를 이라크로 몰아넣었던 그 정치인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시의 결정이 이슬람국가(ISIS, 이하 아이시스)의 성장을 도왔더라도, 이슬람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미국이 장차 담대한 행동을 벌여야 할 이유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전 부통령 딕 체니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11~12년 전의 일을 놓고 왈가왈부하느라 시간을 허비한다면 눈앞에서 커지고 있는 위험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적 병증은 이제는 미국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 특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성향 정치인들도 키신저의 길을 따르려 한다.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는 2015년 11월 13일의 파리 참사에 대응하며 아이시스에 맞서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겠다고 다짐했다. 올랑드는 프랑스가 리비아·말리·시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것이 파리 참사라는 역풍을 불렀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이렇게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에 찬성표를 던졌던 영국 노동당 우파 국회의원들이 2015년 12월 4일에도 똑같이 분별없는 짓을 한 데서도 드러났다. 그들은 영국이 미국 주도의 시리아 폭격 작전에 동참하는 데 찬성했다.
〈가디언〉 기자 제임스 미크는 친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노동당 인사가 보인, 차마 입에 담기 참담한 추태를 보며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노동당 예비내각의 외무장관 힐러리 벤의 폭격 찬성 연설을 들으니 1930년 윈스턴 처칠이 홀로 히틀러의 위험을 경고한 연설이 떠올랐다. … 캐머런이 시리아 폭격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테러리스트 동조자”로 간주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다. 그들에게 힘을 보탠다며 [힐러리 벤이] 한 말은 기이하다. 그는 곧바로 이슬람국가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들을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반복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폭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품위 있고 훌륭한 분들이다. 비록 나 자신과는 달리 그분들은 동성애자 남성이 건물 밖으로 내던져지고, 나이가 너무 많아 성 노예로 삼을 수 없는 예지디족 여성이 살해돼 공동묘지에 버려지는 상황에서도 손놓고 있으려 하지만 말이다.’”
미국 제국주의와 중동
그러므로 도덕적·정치적으로 책임성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역사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이다. 최근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일은 1990~91년 이래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 열강이 중동에서 벌여 온 장기적 전쟁의 최신 단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 시기이자 냉전기인 1945~90년에도 중동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은 1948년, 1956년, 1973년, 1982년에 전쟁을 벌였다.
이 시기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 개입은 주로는 쇠퇴하는 식민지 열강(영국과 프랑스)의 방어전 형태를 취했다. 예를 들어,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수에즈 원정과 1954~62년 알제리 전쟁에서 큰 굴욕을 맛봤다. 특히, 이들의 수에즈 원정 실패 덕분에 미국이 중동에서 유력한 제국주의적 강대국으로서 입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주로는 가장 중요한 두 동맹국에 군사 원조를 하는 형태로 중동에 개입했다. 그 두 동맹국은 서로 깊이 증오하는 종교 국가들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이다.
1979년은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첫째,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미국의 핵심 동맹인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이 타도됐고, 이에 자극받아 서방의 지배에 대항해 급진 이슬람주의 형태의 새로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도전이 일어났다.(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레바논 내전기에 헤즈볼라가 성장한 것이다.)
둘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는 초강대국 간 경쟁의 무대가 중동으로 확대됐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소련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성장하고 있다고 착각해 그에 맞춰 국방비를 늘리고 있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1980년 1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현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며 위협하고 있는 그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전 세계 수출용 석유의 3분의 2 이상이 그곳에 매장돼 있다. … 소련은 이제 전략적 지위를 굳히려 한다. 이는 중동산 석유의 자유로운 이동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 우리의 입장을 매우 분명히 해야 한다. 페르시아만[걸프] 지역의 석유를 지배하려는 외부 세력의 시도는 모두 미합중국의 사활적 이익을 침해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침해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물리쳐야 한다. 필요하면 군사력을 쓸 수도 있다.”
이 카터 독트린은 미국이 중동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시작으로 평가된다. 카터는 소련이 이란 혁명을 이용하려 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카터는 대통령령 제59호를 발표해 소련 군대의 걸프 진격에 대항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카터는 신속기동군도 창설했다.(신속기동군은 나중에 중부사령부로 재편된다. 중부사령부는 지난 25년 간 여러 전쟁을 기획했다.)
그럼에도 레이건 정부(1981~89년)는 레바논에 잠깐 발을 담궜다가 1983년 자살 폭탄 공격으로 해병대원 2백41명이 사망한 뒤 신속하게 개입을 줄였다.(그래도 말은 거칠게 하고 군비 지출을 늘렸다.) 레이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중동 개입은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을 후원한 것이었다. 1980년 9월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하자 레이건 정부는 후세인을 도왔다. 그 결과, 전쟁이 장기화돼 20세기에 일어난 재래식 전쟁 중 가장 긴 전쟁이 됐고, 8년 동안의 전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결국 이란 혁명을 교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미국으로서는 손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전쟁에 온통 매달리고 있는 두 [지역] 강국의 야심이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란이 승기를 잡는 듯할 때 미국 해군과 공군이 선택적으로 사용돼 전황을 이라크에 유리하게 바꿨다.
미국의 진정 새로운 개입 시기는 이 긴 전쟁에서 결국 승자가 된 후세인이 욕심을 부려 쿠웨이트를 점령한 1990년 8월에 시작됐다.
△제국주의의 개입은 중동 민중의 격심한 고통을 낳았다 절실하게 생필품을 구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 ⓒ출처 미 공군
그러나 여기서 맥락의 변화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 서방·아랍 국가들의 연합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1991년 초 걸프전은 냉전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에 발발했다. 한편으로 미국은 경쟁 제국주의 블록이 붕괴한 덕분에(1991년 8월) 운신의 폭이 넓어졌고 군사력을 사용하는 데 방해되는 큰 걸림돌이 사라졌다. “베트남전 때와 달리 미국은 다른 강대국이 적군에 합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1991년 걸프전은 2003년 이라크 침공과 달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얻었다. 해체를 목전에 둔 소련이 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덕분이었다.
냉전 종식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 경쟁이 해체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 경쟁이 더 유동적으로 변하는 새 시대를 열었다. 후세인의 이라크를 쉽게 격퇴한 것은 미국 군사력의 우월함을 잘 보여 줬지만, 미국의 경제적 지위는 약화되고 있었다. 서구 진영 안에서는 독일과 일본이, 양대 진영 바깥에서는 중국이라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성장했다.
냉전이 끝난 뒤 들어선 미국 정부들은 모두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를 견고히 지키고자 애썼다. 그 첫 조처는 신자유주의를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특히 빌 클린턴 정부(1993~2001년) 때의 특징이었다. 이는 세계 모든 국가의 빗장을 열어 미국 자본과 상품이 들어갈 수 있게 하려는 조처였다.
둘째, 중동에 대한 헤게모니를 유지할 목적으로 미국은 군사력을 거듭 사용했다. 중동에 대한 헤게모니를 유지해야 다른 국가들(잠재적·실재적 경쟁자들을 포함해)이 “세계 수출용 석유”라는 핵심 원료에 접근하는 것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군사력 사용은 조지 W 부시(2001~09년) 정부 때 특히 공격적이고 오만한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바마도 비록 훨씬 더 조심스럽고 선택적이지만 계속해서 군사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전쟁들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측면은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걸프 연안국들의 관계다. 1945년 2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즈벨트(루스벨트)는 처칠·스탈린과 얄타회담을 가진 뒤 귀국하는 길에 수에즈 운하를 들러 사우디아라비아의 왕 이븐 사우드를 만났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로즈벨트는 주미 영국 대사 핼리팩스 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페르시아만[걸프] 석유는 … 당신들 것이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는 당신들과 공유하겠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는 우리 것이다.”
약 40년 뒤인 1987~88년 미국 해군의 걸프 파견을 촉발한 것은 이란의 쿠웨이트 유조선 공격이었다. 1990년 8월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미국은 첫 대응으로 군대를 파병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지키려 했다. 이 조처는 두 가지 역풍을 불렀는데, 그중 하나는 오사마 빈라덴이 알카에다를 건설한 것이었다. 빈라덴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주의 전사들을 고무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싸우도록 했을 때 구축한 연줄을 이용해 알카에다를 건설했다. 알카에다는 미군이 이슬람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에 맞서 투쟁하는 조직을 표방했다.
걸프 연안은 이제 세계 자본주의의 중요한 허브가 됐고, 이 지역의 왕조 정권들은 사실상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을 운영한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이 중동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 자체의 소비용 석유와 천연가스는 충분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계속된 군사 개입이 낳은 최종 결과는 미국 제국주의에게는 큰 피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동의 보통 사람들이 입은 피해가 더 극심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제국을 비난한 어느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 지도자의 말을 기록했다. “그들은 폐허를 만들어 놓고는 평화라고 부른다.” 서방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초래한 결과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향하는 시리아 난민들 2015년 11월 13일 그리스-터키 접경지역. ⓒ출처 가이 스몰만
미국은 이라크에서 패배했을 뿐 아니라, 이라크를 잠깐 동안이나마 안정화시키려 하면서 이란의 이슬람공화국과 긴밀히 연결된 종파적인 시아파 정권에 의존했다. 그 결과로 아이시스가 지하드 세력과 이라크군 장교 출신자들을 규합하고 불만이 큰 소수파 주민인 수니파 이라크인들의 수동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생겨났다.
그 뒤 2011년 혁명 물결이 아랍 세계 전역을 휩쓸며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정권을 타도했고, 다른 정권들도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다. 결국 반란은 진압됐지만, 정치 구조는 훨씬 더 취약해졌다. 지역 수준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연안국들은 반혁명을 조직하며 이집트에서 새 군부 독재가 들어서게 도왔고, (무슬림형제단을 견제하면서도) 살라피주의(극도로 보수적인 수니파 이슬람) 지하드 운동을 고무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런 행보는 시리아에서 종파적 내전을 벌여 혁명적 반란을 진압하려 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노력과 충돌했다.
아사드를 제거하기 위해 시리아에 개입할지 말지를 두고 얼마간 망설인 뒤에 오바마 정부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이는 미국의 전략·정보 웹사이트 〈스트랫포〉의 조지 프리드먼이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라는 “이층 전략”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전략의] 제1층은 이 지역에서 갑작스레 일어나는 주요 충돌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지원은 하되 1차적 책임자는 되지 않는 것이다. …
“이 전략의 제2층은 세력균형을 창출하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는 일들에 대응하는 지역 강국을 원한다. 동시에 미국은 어떤 한 국가가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런 열강으로는 네 곳이 있다. 터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이 그것이다.”
정치적 해체, 제국주의간 경쟁, 아이시스
이 전략은 군사력을 이용해 중동을 재편하려 한 조지 W 부시의 전략만큼이나 재앙적이었다. 후세인 제거가 낳은 주요 결과이기도 한 국가의 붕괴는 이제는 이라크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아랍 세계 동부의 두 핵심 국가인 이라크와 시리아는 해체된 상태다. 2011년 나토가 폭격한 리비아도 그렇고, 예멘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들은 모두 지역 강국들의 대리전 무대가 됐다.
지역 수준에서 핵심적 경쟁자들은 이란(이라크·시리아 정권의 주요 후원자이다)과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살만이 국왕으로 취임한 2015년 1월부터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폈고, 미국 셰일 석유 생산 업체들에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석유 감산을 거부했고, 이란이 후원하는 세력이 예멘 정권을 위협한다며 예멘에서 끔찍한 전쟁을 일으켰다.
터키와 카타르도 주요 행위자이다. 둘 다 시리아에서는 지하드 세력을 고무하고, 리비아에서는 통치권을 주장하는 이슬람주의 세력을 후원한다.(이와 경쟁하는 리비아의 세속주의 정부는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의 후원을 받는다.)
일부 좌파는 이런 혼란이 서방 제국주의에 유리하다거나 심지어는 미국이 고안한 정교한 계획의 산물인 것처럼 본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나오미 클라인의 “재난 자본주의” 개념을 옹호한다. 그들의 주장인즉,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는 “폭격과 재건” 전략을 추구하며 전쟁을 조장하고 그 틈에 미국 기업들이 폐허가 된 나라에 들어가 재건 사업을 벌여 이윤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와 이해관계를 초보적 수준에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015년 〈포춘〉이 선정한 미국 5백대 기업 중 상위 10곳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월마트, 엑손, 셰브론, 버크셔 해서웨이, 애플, 제너럴 모터스, 필립스66, 제너럴 일렉트릭, 포드, CVS헬스. 최대 군수업체인 보잉은 27위를 기록했다. 상위 10대 기업 중 에너지 기업 단 세 곳만이 클라인이 말한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에 속한다. 그러나 이조차도 정확한 분류는 아니다. 그 에너지 기업들도 황폐해진 나라에서 재건 사업을 벌이는 것보다는 주로 석유와 가스를 추출하고 정제하고 판매하는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 자본주의에서 군사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하지만 미국 기업들은 주로 민간 시장에서 이윤을 벌어들인다. 미국 기업들은 미국 국방부에 의존해 전 세계 민간 시장과 투자처에 접근하지만, 시리아나 리비아에서처럼 지하드 세력이 유전을 장악하는 상황은 미국 기업들의 사업에 도움이 안 된다.
어떤 좌파들은 미국이 이라크와 시리아를 파괴하려 판을 짰다고 주장한다. 아랍 민족주의 성향의 바트당이 통치해 온 이 나라들이 미국과 이스라엘에게는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후세인과 아사드를 반제국주의 투사로 치켜세우는 과장의 측면이 있지만, 미국이 그 둘을 제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세인과 아사드를 제거하는 것과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가들을 해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두 국가의 해체는 미국의 추구한 정책이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다.
국가 해체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파리 참사에 대해 자신의 개성을 잘 보여 주며 매우 훌륭한 주장을 내놓았다. 바디우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붕괴를 그가 “구역 만들기”라고 이름 붙인 제국주의적 행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구역 만들기’는 “비국가적 약탈이 일어나는 아류국가적 구역”이 생겨나는 것을 뜻한다. 바디우가 주장하길, 아이시스는 “국가가 사라진 공백을 점유하며 무장한 야만적인 자본주의적 기업”이다. 바디우는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정한 현상을 포착했는데, 워싱턴 컨센서스 하에 강요된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한 국가의 약화가 사태의 주요 원인일 것이라는 점이다.
‘구역 만들기’는 9·11 사태 이후 마이클 만이 “배제하는 제국주의”라고 부른 것이 만들어 낸 극단적 결과로 봐야 한다. ‘배제하는 제국주의’는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들이 대부분 초국적 자본주의로 의미 있게 통합되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그 나라들에 투자하거나 그 나라들과 교역하는 것을 너무 위험한 일로 보며 그 나라들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제2의 슈퍼파워'라고 불린 2000년대 초 반전 운동 2003년 2월 1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반전 집회. ⓒWilliam M. Connolley
그러나 이것의 해악적 효과는 제국주의 핵심부에도 부정적 반작용을 가할 수 있다. 현재 중동에서 정치적 해체가 확산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된 이곳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시리아로부터의 대탈출이 유럽의 난민 위기로 이어졌다. 최근에 일어난 테러 사건들은 선진 자본주의의 핵심부 중 하나인 유럽연합도 지중해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미숙한 수습 마술사처럼 미국은 자신이 부른 요괴 앞에서 겁에 질려 있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혼돈 속에서 태어난 아이시스는 서방의 중동 지배에 도전하는 주요 세력으로 변모했다. 여러 음모론이 있지만, 미국 제국주의가 직접적으로든 아니면 이 지역의 동맹국을 통해서든 아이시스를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터키가 수니파 지하드 세력을 전폭 지원한 것이 아이시스의 성장에 일조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시스는 독특한 정치 프로젝트로, 이라크 점령과 시리아 전쟁이 초래한 파괴와 아랍 혁명의 패배 덕분에 원시적 형태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고, 현재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이슬람 칼리프 국가를 재건한다는 복고적 공상을 기초로 전 세계에서 전사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서방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초래한 재앙은 아이시스가 성장하는 조건을 만들었지만, 아이시스 지도부는 그 나름의 잔혹한 방식으로 그 조건이 창출한 기회를 붙잡아 자기식의 종파적이고 반혁명적인 과업에 착수했다. 아이시스에 관해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학연구대학(SOAS) 애덤 하니에 교수가 지적하듯이, 아이시스는 “반제국주의적 대응의 그 어떤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 주장은 객관적 상황을 볼 때 두 가지 점에서 타당하다. 첫째, 아이시스가 약탈과 과시적 폭력에 주된 기반을 두지 않는 안정적 국가를 건설할 수는 없다. 둘째, 아이시스가 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새 국가의 지배자들은 머지 않아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타협하며 자신의 공상적 이상을 훼손할 것이다. 1978~79년 혁명 이래 수십 년 동안 이란을 통치한 이슬람공화국이 밟아 온 궤적이 딱 그랬다. 최근 이슬람공화국은 미국이라는 ‘대악마’ 및 ‘세계 열강’과 핵합의를 이뤘다.
그럼에도 이란의 사례가 또한 보여 주는 것은, 이런 객관적 제약들이 있다고 해서 아이시스가 반제국주의적 세력으로 비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시스가 초기에 공개한 영상 중 하나는 이라크-시리아 국경을 파괴하는 퍼포먼스였다. 시리아-이라크 국경은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오토만 제국의 아랍 속국들을 나눠 가지며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생긴 것이다. 아랍 혁명이 패배하며 세속적 좌파는 물론이고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주의판 개혁주의도 주변화된 상황에서 아이시스가 거둔 군사적 성공은 제국주의에 타격을 입히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래서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무슬림 중 소수가 아이시스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중동의 재앙에 대해 말할 마지막 측면이 남았다. 지역 강국들 간의 경쟁에 제국주의 간 경쟁이 얽혀 있다는 점이다. 냉전 때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주요 목표는 소련을 중동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미국이 거둔 주요 성공 사례는 두 가지가 있다. 1963년 미국은 이라크에서 민족주의적 군사 정권인 아브드 알카림 카심 정권을 전복했다. 1972년에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소련과의 동맹 관계를 끊도록 했다. 이집트와 소련의 동맹 관계는 사다트의 전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영국·이스라엘에 맞서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받기 위해 맺은 것이었다.
중첩된 경쟁
1973년 10월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워터게이트 추문으로 제기능을 못하게 된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소련의 중동 파병 시도에 대응했다.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정전을 강요한다며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병하겠다고 했고, 이에 미군은 비전시 최고 수준의 경보인 방위준비태세(데프콘) Ⅲ를 발령했다. 키신저는 이렇게 설명했다. “소련이 중동에 군대를 파병하기 위해 무엇을 핑계로 대든 우리는 무력을 써서라도 저항할 태세가 확고히 돼 있다.” 브레즈네프는 물러섰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정권들은 미·소 두 초강대국 진영 사이에서 계속 책략을 부렸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1980년대에 서방 진영으로 기울었다가 1990~91년 전쟁 이후 고립됐다. 그 결과 중동에는 아사드(의 시리아)만이 러시아의 믿을 만한 동맹으로 남게 됐다.
이 관계가 이제는 미국에 악재가 됐다. 2015년 9월 30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시리아를 공습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는 전환점이었다. 푸틴의 동기는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것에 대응해 서방 열강이 채택한 러시아 고립 정책을 폐기시키는 것이다. 둘째, 아사드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테러리즘에 맞서 싸운다”는 미사여구를 사용하지만, 이 말은 그저 아사드에 맞서는 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삼척동자도 안다.
최근의 러시아에 대한 분석으로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페리 앤더슨의 분석이다. 앤더슨은 이렇게 묘사한다. “푸틴은 러시아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는 서방 자본주의와 연결돼 있지만 운영 면에서는 독립되도록, 즉 포식자의 포식자가 되도록 건설할 수 있다고 믿지만, … 그것은 언제나 순진한 착각이다.”
미국의 경쟁자로서 현재 러시아의 위세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군대를 재정비했음에도 옛 소련의 위세에 미치지 못한다. 예전만 못한 러시아 경제가 만성적으로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고, 세계 금융시장에 통합돼 있다(이 덕분에 미국과 유럽연합의 러시아 경제 제재가 효과를 내는 것이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미국이 패배하고, 세계적 경제 위기가 발생하고, 중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확장하는 등 변화된 상황 때문에 미국 제국주의는 약해졌고, 그래서 제국주의 간 경쟁에서 지위가 더 취약해졌다. 중국은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 헤게모니에 큰 위협이다. 비록 지금까지는 미국과 중국이 모두 서로에 대해 조심스럽게 책략을 부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 변화 때문에 미국은 군사적 행동을 벌이는 데 더 신중해졌고, 그 덕에 러시아가 주도권을 쥘 여지가 더 생겼다.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외쳤던 2011년 시리아 혁명 바샤르 알아사드는 혁명을 진압하려고 종파적 내전을 일으켰다. ⓒ출처 Lens of young Halabi (페이스북)
서방 열강은 아이시스에 대항한 공동 군사작전을 펴기로 했다. 그들이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아 보인다. 군사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시리아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아이시스 격퇴를 우선 목표로 삼는 세력이 거의 없다. 러시아와 이란은 아사드 정권을 떠받쳐 중동 지역 내 자신들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한다.(두 국가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바샤르 알아사드 개인은 버릴 수 있겠지만, 아사드가 지켜 온 질서를 버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터키·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은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그들)의 우선순위는 아사드를 제거하는 것이다. 혁명에서 태어난 시리아 내 세력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세력 지형을 보이는데, 상황에 따라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시리아 반군에 관한 한 연구를 보면 시리아 반군은 2백28개가 있으며, 정권과 실질적으로 맞서 싸우는 세력들에게 알카에다의 지부인 자바트 알누스라(누스라 전선)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존재이다.
“러시아의 공습이 심화할수록 시리아 반군들은 [시리아] 정권과 그 동맹에 대항한 전투에서 더 강한 세력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길 더 바랄 것이다. 그런 보호를 바라는 많은 단체들은 이미 부득이하게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인 자바트 알누스라와 군사적으로 조율하고 있다. 반군들이 더 큰 공격을 받을수록 이 추세는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 자바트 알누스라와 함께 군사작전을 펼치는 세력이 모두 자바트 알누스라의 관점·목표·가치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자바트 알누스라가 전투에서는 가장 능력이 좋은 세력이므로, 군사적 필요 때문에 많은 반군이 그들과 협력한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찰스 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아사드 정권에 대항한 싸움을 조만간 접을 [반군] 단체는 거의 없다. 아사드, 이란, 이제는 러시아와 싸우는 것이 그들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아이시스는 부차적 목표다.”
쿠르드노동자당(이하 PKK)의 시리아 조직인 쿠르드민주연합당(PYD)은 서구 좌파들이 많이 호의적으로 보는 세력인데, 미국의 공습에 힘입어 아이시스와 싸우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그런데 쿠르드족의 목표는 독립된 쿠르드족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고, 이는 아랍 지역에서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쿠르드족의 전진에 대해 터키 정부는 험악하게 반응했다. 터키 정부는 PKK에 맞설 세력으로 수니파 지하드 세력의 성장을 용인할 수 있다. 이 사례만 봐도 아이시스 격퇴가 대다수 세력에게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 일인지를 알 수 있다. 2015년 12월 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전쟁 중지와 대화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는 전쟁을 끝내기보다는 여러 세력들 간 흥정의 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고통
어쨌든, 아이시스 격퇴는 군사적으로 만만찮은 일이다. 이제 아이시스는 잘 무장하고 사기도 높은 전사 수만 명을 거느린 상당한 전투 집단이 됐다. 시리아 동부의 라카와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꽉 틀어쥐고 있는 아이시스를 격퇴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중동 국가의 군대는 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의 경쟁국 모두가 시리아에 몰두하는 지금 상황을 기뻐할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겪을 끔찍한 고통을 논외로 치더라도 지금 시리아 상황은 매우 위험하다. 이 나라에 개입하는 여러 국가들의 공군이 서로 어깨를 부대끼고 있기 때문이다. 11월 말 터키가 러시아 전투기를 격추한 것은, 1949년 나토가 창설된 이래 나토 회원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벌어진 첫 번째 실질적 전투였다.
좌파들의 혼동
좌파들의 대응을 보면 혼란된 생각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심하다. 지젝은 지난 20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에 대한 흥미를 높이는 데 기여했고, 많은 운동과 투쟁을 고무했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지젝은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 그리스 시리자 정부가 유럽연합에 굴복하는 것을 어떻게든 옹호하고, 이민자와 난민에 대한 외국인혐오적 반응에 거듭 공감을 표하고, 파리 참사에 대해서는 좌파가 서구의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유럽 중심주의 반대 입장의 모순은 … 세계 자본주의가 순조롭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서구 문화의 가치가 더는 필요 없게 된 매우 역사적인 순간에 서구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비판적으로 해석하면 서구 문화의 여러 가치들(평등주의, 기본권, 언론의 자유, 복지국가 등)이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무기로 쓰일 수 있는 바로 이때, 유럽 중심주의 반대 입장은 서구 문화의 가치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린 공산주의 해방 사상 전체가 철저히 ‘유럽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벌써 잊은 것인가?”
파리 공격에 대응해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1월 19일 프랑스 의회는 압도 다수의 찬성으로 국가비상사태를 3개월 연장하기로 했다. 그런데, 급진좌파라고 일컬어지는 좌파전선도 여기에 찬성표를 던졌다. 지젝이 지키기를 바라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이 조처에 반대 투표를 한 사람은 사회당 소속 의원 세 명과 녹색당 소속 의원 세 명뿐이었다. 이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파리 기후 회담을 겨냥한 항의 시위가 금지됐다. 다른 나라의 좌파 정당들은 더 바람직한 입장을 취했다. 독일 의회에서 좌파당(디링케)은 독일이 중동에 파병(비록 전투병은 아니지만)하는 전례 없는 일에 반대했다.(예를 들어 독일은 2011년 나토의 리비아 개입에 반대했다.)
지젝과는 다른 혼란도 있다. 공산당 출신 활동가들은 유럽 평화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그 기원은 냉전 초기 국면에서 공산당들이 평화운동을 벌인 것에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이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 좌파들 사이에서 진영 논리(미국의 지정학적 경쟁자들을 더 ‘진보적인’ 세력으로 보아 지지하기)가 부활했다. 진영 논리에 따라 서구 반전 운동의 많은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위기에서는 푸틴의 러시아에 공감하고, 시리아 내전에서는 심지어 아사드 정권에 공감했다. 이런 입장은 제국주의의 성격을 아주 크게 오해하는 데서 비롯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지배력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을 벌이는 체제이다. 그러나 진영 논리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북반구의 지배자들뿐 아니라 남반구의 지배자들에 맞서는 투쟁, 또한 서구 지배자들뿐 아니라 동구 지배자들에 맞서는 투쟁의 중요성을 깎아내린다.
△중동 해방의 진정한 길을 힐끗 보여 준 아랍 혁명 2012년 4월 이집트. ⓒ출처 호쌈 엘하말라위
그러므로 진영 논리는 이론적 오류 이상의 문제다. 정치적으로도 부정적인 효과가 있다. 그 사례는 영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월 2~4일 영국 하원에서 여당인 보수당 의원뿐 아니라, 야당인 노동당의 우파 의원들도 영국의 시리아 폭격 참가에 찬성하며 오랫동안 반전운동을 벌인 제러미 코빈을 맹비난했다. 전쟁저지연합도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전쟁저지연합과 코빈(여전히 전쟁저지연합의 대표이다)의 관계 때문에 노동당 우파와 기업주 언론들은 전쟁저지연합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공격은 경멸받아 마땅하고 이기적인 공격이다. 전쟁저지연합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운동을 조직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반전 운동이 절정에 달한 2003년 2월 15일 영국에서만 무려 2백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그날,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도 반전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운동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전쟁저지연합의 지지 기반은 줄었고, 이는 혁명적 좌파의 분열로 이어졌고, 전쟁저지연합의 일부 지도자들은 스탈린주의 출신 활동가들을 점점 더 많이 지도부로 영입했다. 그 결과 전쟁저지연합은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것을 용인하고,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만행에 침묵하고, 시리아 혁명 지지자들을 적대하는 인사들에게 연단을 내주었다. 이런 오류를 파고들어 우파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한 수단인 전쟁저지연합을 파괴하고 더불어 코빈을 약화시키려 한다.
중동이 혼란에 빠져 있는 이때,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제국주의가 핵심 문제라는 점이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은 중동에서 좋은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그 국가들은 중동에서 손을 떼어야 하고 중동 민중이 스스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라는 목표를 이룰 길을 찾아야 한다. 2011년 아랍 혁명 때 바로 그런 움직임이 잠깐 나타났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서방의 좌파는 반전 운동을 재건해야 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각국 정부들이 장기적 전쟁을 끝내도록 그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이 기사는 Alex Callinicos, ‘Resisting the long war’, International Socialism 149(Winter 2016)에 기초해서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