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중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 초청 강연회:
“세월호 참사 2주기, 진실 규명을 위해 열정을 갖고 함께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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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중 특조위원 초청 강연회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노동자연대 학생그룹·노동자연대 주관)가 2월 29일 연세대에서 열렸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가족이 추천한 특조위원으로 활동해 왔다. 참사 직후부터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운동에 앞장섰고, 중대 재해와 기업의 책임을 엄중히 묻는 ‘기업살인법’을 오랜 기간 연구했다.
이 강연회에는 1백20여 명이 참가해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운동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보여 줬다. 다음은 연설을 녹취·정리한 것이다.
반갑습니다. 벌써 2주기네요. 아직 많은 것을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이 작업은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우리가 끈질기게 싸우고 또 요구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포함해서 많은 시민들이 유가족들과 함께 힘을 보태줄 때, 조금이라도 더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참사”라 부르는가?
[참사] 당시의 영상이나 여러 언론 보도를 봐서 알겠지만 4월 16일에 해경은 배 밖으로 나와 있는 승객들만 구했고 배 안에 있는 승객은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해서 많은 의문들이 있는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해경은 대형 선박의 사고에 대해서 신속하게 구조를 할 수 있는 장비나 인력을 갖고 있지 못했어요.
생존 학생들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구조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다.” 해경이 한 명도 구조를 못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해경은 대형 인명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사고에 대응한 인명 구조 훈련을 평상시에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침몰 사고에 대비해서 구조 활동에 즉시 투입될 인력들도 제대로 확보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커다란 배경 중 하나가 해양 구조 업무를 외주화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재난사고에 대비해서 구조에 필요한 장비나 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육 훈련을 충실히 하는 게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나면 해경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선박들 불러 모으는 거예요. 주위에 있는 어선들, 상선들 불러 모아 배에서 탈출한 사람들 건져 올리는 것만 합니다.
2011년도에 수난구호법을 개정하면서 이런 방식을 좀 더 체계적인 구조로 만들어냅니다. 민간 어선들을 동원하고 이 어선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켰어요. 이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될 때 한 국회의원이 질문을 합니다. “배가 조난이 되면 해경이 가서 구조를 신속하게 해야 하는데 수난구호법을 이렇게 개정해서 민간 선박을 동원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이게 가능하겠냐?” 임창수 당시 해경 차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고가 연간 계속 발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민간과의 네트워킹을 잘 만들어 놓으면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해경은 아주 소수의 인원들만 122 구조대로 남겨 놓고는 평상시에 인명구조에 대비한 훈련도 하지 않고 장비도 갖추고 있지 않았던 거예요.
둘째, 안전 점검이 기업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에요. 세월호의 선원들이 이미 여러 차례 ‘배가 위험하다’, ‘매일같이 과적을 해 왔다’라고 했지만 계속 무시됐다고 합니다. 검찰 수사에서도 다 드러났던 대목이죠. 청해진 해운은 과적의 위험성을 잘 알면서도 사실상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과적을 일삼았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선주 회사들이 돈을 내서 운영하는 법인인 한국해운조합이 운항관리자를 둡니다. 그리고 그 운항관리자가 배가 출항을 할 때 배의 안전 점검을 하고 과적을 하지 않았는지 이런 것들을 점검해서 출항해도 좋다고 허가할 수 있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즉, 이 운항관리자들이 한국해운조합 소속인데 한국해운조합이라고 하는 건 선주 회사들이 돈 내서 운영하는 거고 그 돈으로 월급 받는 사람들이 바로 운항관리자들인 거예요. 안전 점검을 하면 선주 회사들을 상대로 해서 결국 싫은 소리를 해야 되는 거잖아요? 세월호 참사 당시에 운항관리자들의 행태를 근원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운항관리자들이 제대로 안전 점검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그런 구조였던 것이죠. 운항관리자는 출항을 정지시킬 권한이 있지만 그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놨던 겁니다. 지금은 이런 비판 때문에 세월호 참사 이후에 정부는 운항관리자들을 선박안전기술공단 소속으로 변경하긴 했습니다.
세월호가 출항을 할 때 안전 점검 기준으로 만재흘수선[선박이 물에 잠기는 한계선]이 물에 잠겼는지 아닌지만을 판단했어요. 배가 떠난 다음에 선장이 승객 몇 명, 화물트럭 몇 개, 컨테이너 몇 개 이렇게 적어서 운항관리자한테 보내 주면 운항관리자는 거기에 그냥 사인해 출항보고서를 올리는 식으로 일을 했습니다. 실제로는 안전 점검을, 과적을 단속 할래야 할 수 없는 구조에서 일을 했던 것이죠. 만약 운항관리자가 여기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거나 출항을 정지시켰다면 그 운항관리자가 계속 일을 할 수 없을 거라는 건 분명한 거 아니겠어요?
또 하나는 규제완화 정책입니다. 2009년도 ― 이명박 정부 때 ― 에 선령 제한이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났죠. 선령 제한이 늘어난 것이 단지 하나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이런 것들이 안전 점검이 부실하게 되는 사태 등과 연결되면서 결국은 시민과 노동자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게 됐다는 점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규제완화 정책의 한 부분으로서 선령 제한 문제를 언급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선박 개조시에 검사를 완화하고, 선장이 안전 검사에 대해서 보고를 해야 될 의무를 면제하는 등으로 안전 점검과 관련된 걸 규제 완화라는 명목으로 하나씩 하나씩 빼는 정책들을 계속 펴 왔어요. 이런 것도 세월호 참사의 배경적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많은 인명이 희생됐기 때문에 참사라고 부르는 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패악과 모순들, 이런 것이 다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참사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유가족들과 시민의 요구를 외면한 박근혜 정부
2014년에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요구하며 몇 가지 원칙들이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참여 보장, 범국민적인 참여 보장, 독립적인 수사권 기소권 보장 등이 큰 원칙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이 됐습니다.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월호 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이 돼야 된다, 이를 위해서 특별검사제,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유가족들은 언제든지 찾아오라.’ 그런데 하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해경이 계속 거짓말을 하고 수색 대책을 내놓지 않으니 참사 며칠 후에 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러 가겠다며 팽목항에서부터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진도대교 앞에서 경찰이 유가족들을 막아 섰습니다. 유가족들을 대하는 박근혜 정부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2014년 7월 24일 세월호 참사 1백 일의 행진을 경찰 차벽이 가로막았습니다. 유가족들이 청운동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농성을 시작하자 지나가는 시민들이 볼 수 없게끔, 또 가족들이 나오지 못하게끔 경찰 차벽이 꽁꽁 둘러쌌습니다. 9월 2일 유가족들이 6백만 명의 서명을 받은 서명용지를 전달하러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를 향해서 삼보일배를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세종대왕상 앞에서 막힙니다.
진실 규명 자체를 방해하는 행태도 드러나기 시작했죠. 국정조사 당시 국회는 청와대에게 1백85건의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딱 세 개, 그것도 별 영양가 없는 문건만 제출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가족과의 면담을 끝내 거부하고서는 2014년 9월 16일 국무회의에서 ‘특별법 제정은 국회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고 얘기합니다. 동시에 사법체계 교란 운운하면서 ‘수사권, 기소권이 특별법에 반영돼서는 안 된다’는 식의 청와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죠.
우여곡절 끝에 2014년 11월에 특별법이 제정됩니다. 수사권, 기소권을 얻어 내지는 못했지만 유가족 추천 3명, 국회 추천 10명(여당·야당 5명씩), 대법원 추천 2명, 대한변협 추천 2명, 이렇게 해서 1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 법은 2015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것으로 됐습니다.
난항을 겪은 특조위 활동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은 가족 추천 상임위원-이석태 위원장-이 맡고, 사무처장을 겸하도록 돼 있는 부위원장은 여당 추천 상임위원이 담당하도록 돼 있습니다. 처음에 조대환 변호사가 부위원장으로 왔다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면서 7월 즈음에 사퇴를 했고 후임 이헌 변호사도 얼마 전에 사퇴를 했죠.
특조위는 진상규명소위원회, 안전사회소위원회, 피해자지원소위원회로 세 개의 소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돼 있습니다. 원래는 각 소위원회마다 국(局) 조직을 두도록 요구를 했었어요. 그런데 정부와 시행령 제정 싸움을 하는 과정 속에서 이것이 축소되면서 진상규명소위원회만 국 시스템으로 가고 안전사회소위원회와 피해자지원소위원회에는 과(課)를 두게 되면서 직원 규모가 많이 축소됐습니다.
특조위 조사 권한은 자료 제출 요청, 실지 조사, 동행 명령장 발부, 청문회 실시, 진술 조사입니다. 과거에 진실화해위원회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같은 위원회들도 수사권이나 기소권을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위원회가 가지고 있는 권한은 조사 대상자이나 참고인들을 불러서 진술을 들을 수 있는 진술 청취, 현장을 가서 조사를 할 수 있는 실지 조사, 진술 조사를 거부했을 때에 동행명령장 발부 이런 권한들이 다 있었습니다. 과거의 위원회 시스템에서 권한으로 없었던 것이 청문회예요. 국회가 아닌 조사기관에서 청문회를 하는 것은 세월호 참사 특조위가 처음입니다.
지난해 12월 1차 청문회 때 해경 지휘부의 해경 본청 김석균 본청장, 김수현 서해[해경]청장, 김문홍 목포서장과 당시 상황실 근무들을 주로 불러서 증인 심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불리한 질문에는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특조위는 이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보완해서 특검을 하라는 요구를 2월 중순에 국회에 전달했습니다. 해경 중에서 검찰 조사로 처벌 받은 사람은 목포해경123 정장이 유일한데, 지휘 라인에 있었던 사람들도 해경123 정장과 마찬가지로 지휘부로서의 제대로 된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조위는 특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사를 거부하면 과태료라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조항들이 특별법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까 이 사람들이 출석을 잘 안 해요. 자료 제출 요구를 해도 영양가 있는 자료들은 잘 제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걸 강제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과태료 정도로는 자료 제출을 압박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사권, 기소권을 요구를 했던 거죠. 예를 들면 수사권을 가지고 있다면 법원의 영장을 발부 받아서 압수 수색을 할 수 있는데 특조위는 그런 권한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료 제출을 안 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어요. 과태료 정도로는 자료 제출을 압박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출석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체포 구속의 권한이 없다 보니까 사람을 찾는 것도 굉장히 커다란 일입니다. 경찰이나 검찰은 통신사실 조회도 해 볼 수 있고 여러 행정상의 데이터들을 조회하는 방법들로 위치를 알아내 체포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이 없어요.
예를 들면 참사 당일 탑승을 했다라고 알려진 2등 항해사 견습생이 있어요. 세월호가 무선으로 통신을 할 수 있는 장비가 두 군데가 있는데, 조타기 앞쪽에 하나가 있고, 뒤 쪽에 또 하나가 있어요. 평상시에 세월호 운항을 할 때에 앞쪽 것은 그 해당 수역의 채널에 맞추게 돼 있어요. 그 당시에는 62번이었습니다. 뒤의 거는 항상 비상 주파수 채널인 16번에 맞춰 놓게 돼 있어요. 그런데 배가 기울어지고 침몰 사고가 났을 때 2등 항해사 견습생이 뒤에 있는 장비를 16번 채널에서 62번 채널로 바꿉니다. 그렇게 되면 16번 채널을 들을 수 없어요. 123 정장이 16번 채널로 세월호를 불렀는데 세월호가 그걸 못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거든요. 견습생으로 왔던 이 사람은 출소를 했는데 우리가 이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요. 굉장히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인데, 조사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특조위 권한의 여러 한계들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법 개정 요구가 나온 배경
법에 보면 특별조사위원회는 구성한 날로부터 1년, 그 다음에 6개월 연장 가능, 보고서 작성을 위해 3개월 연장 가능하도록 돼 있어요. 그러면 특조위 활동 시작 시점이 중요하잖아요?
정부는 위원회 구성한 날이 2015년 1월 1일이라고 법 해석을 합니다. 특조위원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이 그해 3월 9일이었어요. ‘위원회가 구성된 건 임명장을 받은 날’이라고 해석하면 3월 9일이 될 테고요. 그런데 위원들만 있다고 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잖아요? 돈이 있어야 되고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요. 실제로 정부에서 예산이 나온 게 작년 8월이었어요. 그전에는 예산이 없어서 복사 용지도 위원장님이나 직원들이 개인 돈으로 사서 쓰고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시행령이 5월에 제정이 되고 나서 직원들이 들어오게 된 게 7월 말이었어요. 실질적으로 예산과 인력이 갖춰진 때를 위원회가 구성된 날이라고 법을 해석하면 지난해 8월 즈음에 활동이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위원들의 임기는 1월 1일날 시작된 것으로 본다’라고 하는 조문이 특별법에 부칙으로 들어가 있어요. 정부는 그 조항을 악용해 위원회 활동이 1월 1일부터 시작됐다고 해석을 해요. 그렇게 되면 올해 6월 말에 끝나게 됩니다.
이미 정부는 파견 공무원에 대한 파견 명령을 올해 6월 말까지로 내려 놨습니다. 예산도 6월 말까지만 지급하는 것으로 돼 있어요. 6월말이 지나면 예산도 없고 인력도 없는 사태가 다시 발생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이걸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특별법을 개정하는 거예요. 최근 유가족들이 나서서 특별법 개정 서명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해 유가족들이 1주기를 앞두고 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당시 시행령 안 입법 예고를 앞두고 있었는데 특조위를 파견공무원들이 장악하도록 한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 여파가 크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방해 공작도 계속됐죠. 지난해 11월에 드러난 해수부 문건에는 특조위에서 청와대를 조사하는 안건을 의결하면 전원 사퇴를 하고, 기자회견을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는데 여당 쪽 특조위원들이 전부 이 문건대로 움직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특조위는 활동해 왔습니다.
여당 쪽 추천위원 석동현 변호사는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지난해 여름에 일찌감치 그만뒀어요. 쭉 회의 안 나오다가 11월에 청와대 조사하는 안건이 상정된 날 회의에 나와서 반대표를 던지고 나갑니다. 이게 여당 위원들의 행태였습니다.
진상규명의 과제
검찰 수사에 의하면 무리한 증톤과 과적으로 복원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조타 미숙으로 대각도 변침[순간적으로 배의 방향을 크게 튼 것]을 했고, 여기다 화물 고박[고정해서 묶는 것]이 부실했기 때문에 화물이 쏠리면서 복원력이 상실돼서 침몰까지 이르게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타 미숙으로 조타기를 끝까지 돌렸다고 하더라도 배가 한 순간에 복원력을 상실하는 사태는 생기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계속 비판해 왔습니다.
공식적으로 정부에서 나온 항적 기록만 해도 세 가지가 있는데 세월호가 어느 항로로 갔는지 아직도 불분명합니다. 소위 급변침을 하기 직전 30초 정도의 항적도 기록이 없어요. CCTV 영상 기록 장치의 문제나 실제로 세월호가 평형수를 얼마나 감축했는지, 화물 적재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등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해경은 당시 해군 투입도 저지했고, 미군의 지원도 거절했고, 민간 잠수사 잠수도 일단 제지를 했죠. 왜 그랬는지 해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청문회 때 드러났지만 잠수사 5백 명을 동원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정조기에 두 명이 1조가 돼서 내려가는 정도에 불과했거든요. 그러니까 4월 17일 정도의 상황에서 잠수를 했던 인원은 연인원으로 따졌을 때 하루에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해경 123 정장이 왜 선수로 가서 선원들만 구조했던 것인지에 관한 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123 정장은 선원인줄 몰랐다고 말하지만 몰랐을 리가 없어요. 모를 수가 없어요. 조타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조타실에 있는 사람을 구조했는데 승객인 줄 알았다는 거예요. 상하가 붙은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몇 명 있었어요. 이게 승객들이 입는 옷이 아니잖아요? 선원인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세월호 내 노트북에서 발견된 ‘국정원 지적 사항’ 문건을 보면 점검 항목이 1백 가지가 넘습니다. 국정원이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선박에 대해서 보안 점검 한다고 해서 이런 것까지 다 따지지 않거든요. 세월호가 처음에 한국선급에서 선박 승인을 받을 때 당시 청해진 해운이 검찰에서 조사 받으면서 했던 진술들을 보면 국정원 직원들이 자꾸 와서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통에 세월호 선박 승인 검사를 받는 과정이 한 달 이상 지연됐다고 말합니다. 갑판 승무원으로 유일하게 생존한 강혜성이라는 사람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계속 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주진우 씨의 방송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한 달에도 몇 번씩 세월호를 방문했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정도로 개입을 했다라고 하는 건 뭔가 관계가 분명히 있는데 그게 무엇 때문이고 어떤 관계였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죠. 일부에서는 뭔가 강정 해군기지 관련해서 위험물들을 운반하는 업무를 세월호가 국정원과 같이 했을 것이다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고요. 일부에서는 국정원이 세월호의 실소유주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정치 자금이나 비자금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통로로 세월호를 활용했던 것이다 그런 의혹들도 제기합니다. 그런데 국정원 조사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대통령의 ‘7시간 미스터리’는 재난 대응의 컨트롤 타워가 작동하지 못했다는 점을 밝히자는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진실 규명 운동의 의미
국민의 안전, 생명을 도외시한 채로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된 자본의 탐욕이 세월호 참사 한 켠에 있었습니다. 또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될 본연의 의무를 져버린 국가와 정부의 무능함과 규제 완화 같은 정책들을 통해서 최소한도의 제도적인 장치마저 해체해 버린 사회 시스템, 이런 것들이 결합이 되면서 세월호 참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본의 탐욕 그리고 그걸 지원하는 국가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국가 폭력의 사태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진실을 규명한다는 건 단순히 의혹을 해명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세월호 참사를 유발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원인들을 성찰하고 이것의 사회적 실체를 밝히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비용·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시 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사회적 개혁을 추구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93년도에 제정된 ‘기업 활동 규제 완화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보면 기업의 안전 업무에 관한 규제들을 대폭 완화하면서 안전관리 업무를 대행 기관에게 위탁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해요. 세월호의 경우에 안전 점검으로 해운조합에다가 위탁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잖아요? 그런 논리들이 똑같이 다른 모든 사업장 영역들에 다 들어옵니다. 안전관리 업무를 대행 기관에 위탁하면 갑을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청을 줍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공장에 노후 시설이라든지 이런 안전 점검을 하는 업무를 을이라고 하는 어떤 회사에다가 자그마한 하청 업체에다가 맡깁니다. 하청업체의 직원들이 안전 검사 업무에서 ‘이 설비가 문제가 많으니까 지금 당장 교체해야 됩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렇게 얘기하는 순간 잘려요. 안전 업무가 비용 절감의 논리 속에 빠지면서 점점 바깥으로 밀려 나가고 사고가 발생하면 원청 업체의 책임은 굉장히 제한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거죠.
또한, 수난구호법에 의하면 사고가 발생하면 해경이 하는 일은 일단 민간 선박을 불러 모으는 것, 그 다음에는 구난 업체를 선정하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세월호 참사 구조 작업에서] 논란이 된 ‘언딘’이라는 업체가 [정부 기관과] 유착 관계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구조 구난 업무 자체를 민영화하는 시스템을 계속 가져 온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 보입니다.
안전한 삶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정부가 안전을 보장해 주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기업의 무한 경쟁의 시스템 속에서 자본의 탐욕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구조화되면서 안전 업무를 계속 외주화·민영화 시스템으로 밀어내는 정책들을 써 왔던 거예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의 탐욕을 정부가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여 온 것, 이것을 근원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전한 삶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유해 화학물질에 대한 알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도 있습니다. 구미, 동탄에서 불산 가스 누출 사고 발생했을 때 지역 주민들 누구도 인근 공장에서 불산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소방서조차도요. 불산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초동 대응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지하철 노조가 시민 안전위원회를 요구해 온 것이나, 노후 원전 폐쇄와 탈핵 같은 시민사회 운동의 요구들을 안전이라는 가치로 엮어 낼 계기가 세월호 참사라고 생각합니다. 안전업무 외주화 금지, 기업살인법 제정, 규제완화 정책의 폐기, 노동자 안전권 보장, 유해 화학물질의 투명한 공개,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안전관리시스템 ―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의제로 설정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사회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과제들을 이어 나가야 합니다.
‘안전한 삶’이라는 권리는 우리가 시민 안전에 관한 주권자로서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고, ’자본과 정치 권력의 동맹’에 대한 저항의 권리여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운동의 힘을 모아 나가야 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국가폭력과 저항
세월호 참사는 국가폭력의 일환입니다. 국가 폭력은 세 가지 측면 ― 구조적 폭력, 물리적 폭력, 상징 폭력 ― 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의 구조적인 폭력성이 증대되고, 그 폭력에 저항하면 가차없이 물리적인 경찰 폭력이 작용하는 것을 오늘날 목격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에 대해서 물대포와 차벽으로 응수했던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상징 폭력들이 또 작용을 합니다. 한편에서는 종북 매카시즘이 작동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개인 삶에 대한 불안정성을 계속 증폭시키죠. ‘법을 잘 지키는 것이 건전한 시민의 삶’인양 하며 시민들의 저항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법치’가 작용합니다.
민중총궐기는, 자본의 탐욕과 여기에 동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시민들이 연대하고 저항하는 것을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억압하는지 보여 줬습니다. 민중총궐기 집회를 처음부터 범죄로 만들었잖아요. 계엄령 바로 아래인 갑호비상령을 발동했어요. 그 다음에 차벽을 온 동네에 다 세우고 물대포를 쏘고요. 영국에서는 물대포가 위험하다며 사용을 불허했는데 한국에서는 안전하다며 계속 쏘아댔습니다. 이것은 안전이라는 가치를 통해서 사회를 변혁하자라고 하는 운동 앞에 놓여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억합시다. 첫째 세월호 참사는 자본과 국가 권력의 동맹이 시민들의 안전을 얼마나 위협하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둘째, ‘특별법 개정을 통해서 특조위 활동을 보장하라’, ‘인양 후 선체 조사를 보장하라’, ‘방해 공작을 중단하라’ ― 이런 요구들을 유가족들과 함께 힘을 합쳐 나갑시다. 셋째, 안전권 보장을 위해서 이런 요구를 합시다 ― ‘기업살인법을 제정하자’, ‘노동자 작업 중지권과 같은 안전권을 보장하라’, ‘유해 화학물질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라’, ‘시민들이 안전의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 시스템들을 우리가 만들어 나가자’. 넷째, 그런 요구들을 하는 순간 우리는 경찰 폭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집회 시위의 자유, 물포와 차벽을 넘어서는 민주주의를 같이 외쳐 주십시오.
당부의 말
특조위 활동이 6월 말에 마무리가 될 수도 있고, 특별법이 개정이 되는 과정들을 거쳐서 기간이 연장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선체 인양을 한 이후에 선체 조사를 하지 않고서는 진상을 규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 주장이 특별법 개정에 큰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4월 총선 후, 6월에 20대 국회가 처음 열리는데 통상적으로 보면 임기가 시작되는 첫 번째 국회에는 국회 원구성하고 끝나요. 그리고 9월 정기국회로 넘어갑니다. 지금 임시 국회는 3월 10일까지로 돼 있어요. 임시국회가 끝나면 19대 국회는 마무리되는 걸로 봐야 합니다. 그때까지 특별법 개정이 안 되면 6월 국회에서 특별법 개정을 밀어붙여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6월 국회에서 법 개정 의결을 못 하라는 법은 없거든요. 결국은 우리가 2주기 전후로 해서 힘을 모아야죠. 총선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면 제일 좋고요. 그렇지 못하더라도 2주기를 거치면서 다시 한 번 힘을 모아서 요구하는 과정들이 일단 가장 절실합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기는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청와대와 국정원의 의혹을 밝히는 일인데 말입니다. 광주도 진상규명 이야기가 민주화 운동과 결합해 사회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게 1988년도 이후잖아요. 세월호 참사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 시간에 진폭이 분명히 있습니다. 운동이 고조되는 시기가 있을 테고 그렇지 못한 시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진폭 속에서도 이 운동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당장 성과를 내진 못하더라도 기억과 연대의 과정들이 쌓이면서 힘들이 내부적으로 축적되고 언젠가는 분명히 외화될 수 있다’ 하는 신념을 가지고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인양 과정을 감시하려는 걸 정부가 거부해서 가족들이 [침몰 장소에서 가까운 섬] 동거차도에 천막을 치고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습니다. 밤에만 인양 작업을 하고 아침이 되면 배가 나갑니다. 인양 작업을 하면서 많은 것을 건져 냈을 텐데 어떤 물건들을 발견했는지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굉장히 우려됩니다. 특조위도 접근을 못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면 좋을까?’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게 정말 어려운 문제더라고요. 가족들이 특례 입학과 의사상자를 요구한다는 둥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었잖아요. 그런 왜곡된 생각들을 불식시켜 주는 것들이 중요한 과제인 것 같아요.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회에 있어요. 피해자들은 그냥 슬퍼해야 하고, 정부에서 뭔가 거기에 대해서 보상을 하면 고마워해야 하고, 나서서 권리를 주장하면 안 된다는 것들이죠. 그런 것들을 사회적으로 깨 나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 같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성폭력 피해자가 나서서 피해 상황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강하게 대응을 하면 피해자로 사람들이 안 봅니다. 이런 관념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잖아요. 피해자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생들의 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주기를 앞두고 ‘세월호를 기억하자, 진실을 규명하자, 특조위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 어떤 구호든 좋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함께 같이 행동한다는 구호를 담은 배너로, 노란색으로 대학교 캠퍼스 안팎을 물들이는 일에 대학생들이 나서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이 열정을 갖고 함께 행동하는 모습들을 보여 주면 좋겠다는 취지입니다. 학내에서 세월호를 기억하고, 무엇을 할지 같이 고민하고, 작은 거라도 하나씩 해 나가는 것들이 쌓이는 게 결국은 힘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구실을 여러분이 앞장서서 해 줬으면 좋겠다는 걸로 제 이야기는 마무리하겠습니다.
녹취 박충범, 정리 김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