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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노비 문서를 거부한다

현대판 노비 문서를 거부한다

 공길숙·김은영

 지난 4월 10일 레미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인정과 근로조건 개선 및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건설 현장에 레미콘을 공급하는 기사들이다. 건설사 정규직원이었던 레미콘 노동자들은 1986년 이후 하루 아침에 "지입차주"라는 이름의 특수고용직으로 전락했다. 회사측이 노동자들에게 해고하겠다고 위협하여 몇 년씩 굴리던 낡은 차를 노동자들에게 억지로 사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해고했다. 그리고 사용자들은 레미콘 노동자들이 "개인 사업자"라며 그 동안 회사가 지급하던 기름값, 세금, 차량유지비, 사고처리비 등을 모두 노동자들이 부담하도록 했다.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레미콘 노동자들은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했다. 사용주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폭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 2월부터 파업에 돌입한 유진기업(사장 유재필) 노동자들은 노조원이라는 이유로 3백 명이 해고되고 5명이 구속됐다. 지난 4월 23일 사측은 노조원들의 회사 출입을 막기 위해 용역 깡패를 동원해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으며 심지어 전기봉으로 조합원의 머리를 지지기도 했다.

 또 지난 17일에는 집회를 벌이던 인천지역 조합원들 사이로 회사측의 사주를 받은 비조합원 한 명이 레미콘 차량을 몰아 조합원 속으로 돌진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바람에 한일레미콘 분회 소속 노동자 4명이 다쳤다.

 회사측의 탄압으로 지금까지 전국에 4백여 명의 레미콘 노동자가 해고된 상태다.

뻔뻔한 사용주들

 레미콘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받은 것은 작년 9월이었다. 그러나 사용주들은 계속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미콘 사용자들의 단체인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대표 유재필)는 "연수입 5천만 원의 사업주가 노동자냐"며 노동조합을 무시해 왔다.

 노동자들은 "우리가 월수입 5백만 원만 돼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항변한다. 레미콘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43세인데 수입은 한 달에 80∼100만 원에 불과하다. 심지어 중앙산업의 경우 노동자 임금을 3개월에서 6개월짜리 어음으로 지급하고 있어 노동자들은 '깡(어음할인)'을 해서 현금을 마련하는 실정이다.

 레미콘 노동자의 월 평균 도급비는 2백10만 원이다. 그러나 차량 유지에만 2백55만 원이 든다. 월 45만 원의 적자가 생기는 셈이다.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정비 회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부족한 생계비를 대는 실정이다.

 정비 회수를 줄이면 그만큼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사고 위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고가 한번 나면 대형사고다. 조심하려고 하지만 구조적으로 사고를 피하기 어렵다. 예전엔 회사에서 정비를 해 주었는데 도급계약서를 쓰고 나서는 개인 부담으로 떠넘겨졌다. 정기적으로 정비를 하지 않은데다 차량이 낡아서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른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4대 보험도 적용받지 못한다.

 "사고가 나면 운전자가 죽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보험에 들려고 해도 보험료가 너무 비싸고 보험사도 꺼려서 대책이 없다. 회사는 사고가 나도 조금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건설업이 불황이라지만 사장들이 챙기는 돈은 줄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줄였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로 레미콘 노동자들의 운반 단가는 동결되거나 낮아졌다. 최근 레미콘 사용주들은 운반 단가를 8퍼센트로 인상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그대로다.

"현대판 노비문서"

 레미콘 노동자들은 출퇴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보통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저녁 8시에야 일이 끝난다. 하루 평균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 일한다. 게다가 추가 물량이 들어오면 밤 10시든 새벽 3시든 다시 달려 나가야 한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계약해지의 위협이 따른다.

 휴일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유진기업의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회사는 1달에 2번 휴일이 있는데 그것도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한다. 일이 많은 날은 이틀 동안 밤을 새기도 했다. 1주일에 하루씩은 쉬었으면 좋겠다. 휴일엔 피곤해서 가족들과 나들이도 못 가고 잠밖에 자지 못한다. 인간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레미콘 노동자들이 이렇게 형편없는 대우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도급 계약서" 때문이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주로 돼 있기 때문에 단체협상을 맺지 못하고 사측과 1 대 1 계약을 맺어 왔다. 만약 개인이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하면 계약해지 즉, 해고를 당하고 만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이것을 "현대판 노비문서"라고 부른다.

 노동자들은 도급계약제를 폐지하고 단체협약을 맺기를 원한다. 레미콘 노동자들의 투쟁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다.

정부의 위선

 레미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중앙노동위원회는 "사용자가 적법하게 설립된 노조의 단체교섭 요청을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했다"며 조정종료 결정을 내렸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합법" 판정을 받은 것이다.

 파업 첫날인 10일 레미콘 노동자들은 노동부 장관과 면담을 했다. 김호진 노동부 장관은 그 자리에서 "유진기업 등이 부당노동행위 한 것을 신속히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노동자들과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는 사용자들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어떠한 제재도 하고 있지 않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탄압한 유진기업 회장 유재필은 여전히 사용주들의 단체 대표로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반면 경찰은 정당한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를 연행했다. 전면파업 4일째인 13일, 광화문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던 레미콘 노동자 김순환 씨가 경찰에 연행돼 즉심에 넘겨졌다.

 또 지난 3월 30일에는 종로에서 시위를 하던 레미콘 노동자들을 경찰이 덮쳐서 방송차량 유리가 깨지고 운전사가 경찰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했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4월 10일 오전에 계획된 차량 시위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고속도로를 마비시키지는 못했지만 노동자들은 고속도로 여기저기서 경찰과 대치했다.

 이 날 2시에는 서울역에서 9백여 명이 모여 '레미콘 노동자 총파업 투쟁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를 가졌다.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4박 5일간의 상경 노숙 투쟁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여주었다. 파업 3일째는 2백여 명이 더 늘어나서 1천1백여 명이 상경 노숙 투쟁에 참여했다.

 처음으로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여럿이 함께 단결된 행동을 하니 무척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또 한 노동자는 "회사가 틀리고 일하는 장소가 틀릴 뿐이지 노동자들은 모두가 동질감을 느낀다."며 기뻐했다.

 파업 첫날 레미콘 노동자들은 서울대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학생회관 복도에서 겨우 잠을 잤다. 장소가 너무 비좁아 2백여 명의 노동자는 비를 맞으며 밤을 보냈다. 각 대학마다 시설 보호 요청을 해 잠자리가 매우 불편했는데도 노동자들의 표정은 밝았다. 노동자들은 파업 투쟁에 연대하러 온 학생들에게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냈다.

 노동자들은 연대의 중요성도 체득했다.

 4월 14일에는 부평역에서 열린 '살인폭력 정리해고, 김대중 정권 퇴진 결의대회'에 함께 참여했다. 이 날은 원래 서울역에서 집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 폭력에 함께 항의하기 위해서 급히 일정을 바꾼 것이다.

 집회에 참여한 한 노동자는 "대우차 비디오를 보면서 김대중 퇴진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라. 그 비디오 보고 울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거다." 라고 말했다.

 또 한 노동자는 "이순분회에서는 경찰들이 조합원들이 회사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터준 게 아니라 구사대가 회사에서 나와 조합원들을 구타하고 때릴 수 있게 길을 터 주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4월 14일 상경 투쟁을 마친 1천1백여 명의 레미콘 노동자들은 각자 지역으로 돌아가 파업을 계속하고 있다. 지역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은 16일부터 사업장에서 사용주가 불법으로 대체근로를 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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