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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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투쟁이 과거 전성기 때와 현상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노동계급의 중요성과 힘에 대한 회의가 존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람시가 말한 ‘시민사회’의 정착, 개혁주의 노조 지도자들과 개혁주의 정당들의 등장 등의 요인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 내부의 차이에 주목하며 단결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폴 블랙레지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그들에게 어머어마한 잠재력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폴 블랙레지는 리즈 소재 메트로폴리탄대학교 정치학 교수다. 이 글은 2011년 12월에 쓰여졌다.
노동계급에게 세계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그가 사회주의 이론에 한 가장 중요한 기여다. 마르크스 이전에는 노동자를 기껏해야 체제의 희생자로 간주했고 보통은 문명 사회를 위협하는 무리쯤으로 취급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생각들에 반대했고, 노동자들이 해방되려고 집단적으로 벌이는 투쟁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맞설 사회주의적 대안을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이런 주장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주장들은 흔히 핵심을 놓친다. ‘상식’에 맞지 않는다면서 마르크스의 계급 이론이 틀렸다거나 사회 계층을 곧 계급으로 여기는 사회학자들이 전형적으로 그렇다. 다시 말해, 소득·신분·직업·소비 형태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면 그것이 곧 계급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대학 교육을 받은 교사와 공장 노동자, 저임금의 상점 점원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들 묻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치 문제에서 계급투쟁은 그 중요성이 예전만 못할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워낙 복잡해졌다는 이유로 계급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한물간 소리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일면적으로 노동계급 내부의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은 계층을 더 폭넓은 착취 과정 속에서 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복잡한 착취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 사이에 무수한 차이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소득·직업·지위 등의 차이를 막론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같은 관계 속으로 밀어넣는다고 설명했다. 계급을 계급으로 만드는 것은 노동자들이 공유하는 바로 그 관계다. 이런 착취 개념 덕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 내부의 차이를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 없다고 보면서도 그런 차이를 극복하고 단결할 물질적 토대가 있음을 이해한다.
마르크스의 방법
마르크스는 계급을 연구하면서 무엇보다 역사적 변화를 중시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온갖 방법이 있을 테지만 마르크스는 우리 조상들이 자신을 주변의 자연 세계와 구별해 낸 특별한 과정에 주목했다. 바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사회적이고 목적의식적인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했던 것이 바로 8천~1만 년 전에 일어난 신석기 혁명이다. 이전까지 자연에서 식량을 채집하며 살아 온 여러 인간 집단들이 오래된 생활 방식과 단절하고 비로소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농부로 변모했고, 그 결과 [식량 찾아다니기를 멈추고] 일정한 농토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잉여를 체계적으로 생산해야 할 필요가 역사상 처음으로 생겨났다. 예를 들어 흉년에 대비해 곡물을 비축해야 했다. 그러자 새로운 사회 문제가 생겨났다. 누가 잉여를 통제할 것인가? 소수가 나머지 사람들이 생산한 잉여를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그러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가, 여성차별과 함께 계급이 생겨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급은 인류 역사의 보편적 특징이 아니다. 오히려 계급은 역사의 특정 시점에 생겨난 것이다. 그 시점은 바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이 생산한 사회적 잉여를 통제하는 구체적 사회 관계가 나타났을 때였다.
계급을 이와 같이 바라보는 것은 세 가지 커다란 장점이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이런 관점 덕분에 지배계급이 생산자로부터 잉여를 뽑아 내는 여러 방식들을 조사·분석해 역사적 시기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봉건 영주가 농노를 착취하는 방식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식과 다르고, 이 때문에 봉건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회 갈등은 그 형태가 각각 다르다.
둘째, 이처럼 계급의 기원을 밝혀 냄으로써 계급을 철폐할 조건을 규명할 수 있었다. 엘리트가 통제권을 쥐는 것을 허용할 만큼의 잉여는 존재하지만 모든 사람이 누리기에는 잉여가 부족할 때 계급이 나타난 만큼,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만큼 잉여가 많아지는 것이 계급을 철폐할 조건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미 그런 조건을 마련했음을 보여 주었다.
셋째, 마르크스는 잉여 생산을 중심에 놓고 계급을 설명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에서 나타나는 천태만상 가운데서 본질적인 관계를 포착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계급 관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 자본 축적 동학에 대한 그의 설명과 동전의 앞뒤 면처럼 붙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새롭고도 매우 역동적인 생산양식은 직접생산자(농민)가 토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프롤레타리아’, 다시 말해 노동시장에 자기의 노동 능력을 팔아 생계를 잇는 사람들로 전락하면서 등장했다.
사회적 관계가 이렇게 바뀐 것의 함의는 매우 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가장 통제 불가능한(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외된’) 사회 체제가 될 조건이 바로 이 변화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농민 생산
농노에 기반을 둔 생산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은 농노가 토지를 실질적으로 통제한 덕분이었다. 다시 말해, 농노가 농사를 지은 목적은 대체로 자신이 소비하기 위한 것이었고(물론 일부는 영주한테 세금으로 바쳤다) 물물교환과 시장 거래는 보조적 구실에 머물렀다.
이와 대조적으로, 임금노동에 기반을 둔 [생산]체제에서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 어디든 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임금노동의 이런 특징 덕분에 자본가들은 수익성이 낮은 부문에서 수익성이 높은 부문으로 노동력을 재배치할 수 있다(한 부문에서는 정리해고를 하면서도 다른 부문에서는 고용을 늘리는 식으로). 더욱이 생산의 목적이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런 두 측면이 맞물린 결과, 임금노동 기반의 체제[자본주의]에서는 생산성 혁신을 가장 잘하는 자본가에게로 노동자들이 이동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렇듯 자본주의에서 노동생산성이 커지는 경향의 근저에는 임금노동 관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임금노동과 자본주의 체제 역동성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지만, 정작 《자본론》 3권에서 계급을 본격적으로 정의하려 한 부분은 끝마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생각했을 계급 개념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그런 일에 손을 대어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에는 레닌도 포함된다. 레닌은 계급을 관계로 규정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능력을 팔고 자본가는 그 능력을 산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의 가장 큰 장점은 겉보기에 서로 다른 직업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불행히도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남았다. 예를 들어, 현대 자본주의는 전문경영인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는데 이들은 마치 노동자처럼 자신의 노동 능력을 팔지만 노동자와는 달리 착취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오히려 남을 착취하는 데서 핵심 구실을 한다.) 또, 중간 관리자나 특정 전문직 집단처럼 그 상층부는 생활조건이 자본가들과 겹치고 그 하층부는 노동자들과 겹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신중간계급’은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이 점차 복잡해진 결과였다. 그들의 구실은 주로 노동자 착취를 돕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도 노동자들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압력을 받는다.
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는 자신의 역작 《고대 그리스어 사용 세계의 계급투쟁》에서 사회적 착취 과정의 복잡다단한 측면들과 또 그 과정이 변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마르크스의 계급 이론을 몹시 정교한 형태로 제시했다. “(본질적으로 일종의 관계인) 계급은 착취가 벌어진다는 사실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표현이자, 착취가 사회 속에 구조화되는 방식이다. … 계급은 … 해당 사회를 포괄하는 생산 체제에서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착취
이처럼 계급을 복합적인 착취 과정의 일부로, 또 자본주의를 유난히 역동적인 생산양식으로 이해하면, 노동생산성 상승 때문에 노동계급의 구조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영국의] 제조업의 사례를 보자. 영국에서 제조업 노동자들은 예전만 한 사회적 비중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이 올랐기 때문에 제조업 일자리가 감소했음에도 2007년 제조업 생산량은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것은 제조업 노동자들의 절대적 숫자가 비록 감소했을지라도 그들이 객관적으로는 더 큰 힘을 가지게 됐다는 뜻이다.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새 기술이 도입된 결과 오늘날 노동자들은 이전 시대 노동자들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노동자는 과거의 노동자가 받았던 것과 판이한 수준의 정규 교육을 받는다. 과거에는 교육이 엘리트 계층을 재생산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오늘날 정규 교육은 거의 모든 일자리에 필수 전제조건이 됐다. 기초적인 읽기 쓰기와 계산 기술은 물론이고 점점 더 많은 일자리가 대학 수준의 교육을 요구한다. 이런 과정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노동자들이 받는 교육 수준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높다. 심지어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과거의 대다수 지배자들이 받았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다. 이런 교육 덕택에 노동자들은 사회 전체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역량을 기를 수 있게 됐다.
둘째, 교육 제도를 자본 축적 과정의 일환이라고 보면 교육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산업에 필요한 만큼 교육자들도 필요하다. 더구나 대중 교육은 (본질적으로)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생산하려고 고안된 과정으로, 그 내용도 과거 엘리트들이 통치 기술과 자신감을 습득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사는 교육받은 노동자들을 생산 과정에 제공하는 구실을 하고 있고, 교사들 자신도 임금 노동자로서 다른 노동자들처럼 노동력을 파는 처지다. 그래서 교사들의 일상은 갈수록 다른 노동자들의 일상과 비슷해지고 있다. 단적으로, 교사들은 더 낮은 비용으로 더 많은 학생을 교육하라는 압력, 곧 생산성을 높이라는 압력을 끊임없이 받는다.
보건이나 사회 복지 제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받은 노동자는 값비싼 자원이고 그들이 질병 등으로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낭비다. 그러므로 교육 제도와 마찬가지로 보건과 사회 복지 제도들도 착취 과정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봐야 한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간호사·사회복지사·공무원 등은 자본 축적 과정을 유지하는 구실을 하고 있고 따라서 노동계급의 일부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보건이나 교육 제도가 순전히 자본의 필요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제도들은 자본의 협소한 관심사(수익률 끌어올리기) 너머로까지 기능을 확대해 왔고 그래서 사회 운동은 이런 기관들에 요구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제도들은 본질적으로 자본의 필요에 부응하려고 생겨난 만큼 이 부문에서 일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집단적 노동자”(마르크스의 표현, collective labourer)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공통의 이해관계
이렇게 넓은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엄청나게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고 각자의 직위나 임금 수준도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착취받는 집단적 노동자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노동생산성을 올려야 한다는 압력에 똑같이 시달린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부문을 가로질러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착취에 맞서 (집단적으로) 저항하고 민주적 대안(착취 자체가 사라진)을 추구할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
이와 반대로 자본가들은 착취 과정의 꼭대기에 앉아서 착취 조건이 유지되도록 활동하는 자들(경영인, 법관, 우호적 언론, 경찰, 군대 등)의 비호를 받는다. 그러나 자본가가 비록 착취 과정에서는 명령을 내리는 지위에 있을지라도 이들도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외돼 있다. 왜냐하면 시장을 위한 생산이고, 자본들 사이의 맹목적이고 무계획적인 경쟁이 체제를 지배하기 때문에 자본가들도 체제를 온전히 지배하지는 못한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을 소외시킨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착취 과정을 장악한 덕분에 이익을 얻을 뿐 아니라 소외를 해방과 자기 실현 과정으로 경험한다. 반대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착취당하고, 소외를 겪으며 처지가 더 나빠진다고 느낀다.
양자의 이런 차이는 적대적 관계를 낳는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서는 계급 분열이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기로는 그 계급들 간에 투쟁이 벌어진다.
착취는 사회적 과정이고, 다양한 노동자들을 모두 집단적 노동자로 묶어 주는 기초가 된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본가들, 또 자본가들을 거들며 체제의 원활한 운영을 돕는 자들((조금 다른 맥락에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부하린이 ‘집단적 착취자’라고 부른)과 적대적 관계에 놓이도록 한다.
이처럼 계급 투쟁이 착취 관계에서 비롯하고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에 있음을 인식하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서 특별한 힘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체제가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에 의존하는 만큼 그 노동자들이야말로 체제를 무너뜨릴 잠재력을 갖는 것이다.
왜 노동계급인가?
이상의 이유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른 반자본주의자들에게 활동의 방점을 노동계급에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천사라는 착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자들이 전략적 능력, 즉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집단적 노동자의 출현은 생산자들이 시장의 소외된 관계를 철폐하고 민주적으로 사회적 잉여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사회, 다시 말해 사회주의로 나아갈 잠재력을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노동자를 낭만적으로 미화할 생각이 없다. 더욱이 노동자들이 자신들 내부의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의 막중함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이 집단적 조직을 갖춰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결국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려면 그런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은 (앞서 말한) 계층간 경계를 넘으려고 해야 할 뿐 아니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갖가지 차별(인종차별·여성차별·동성애 혐오 등)에 맞서 연대를 구축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계급에 대해 사회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 문화이론가들은 각종 차별을 당하는 개별 집단 간의 차이를 바뀔 수 없는 것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집단들에 속하는 사람들도 대개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본주의 착취 과정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보편적 해방에 이를 토대도 발견할 수 있다.
차별을 차이로만 보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넓은 의미의) 착취 과정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두 노동계급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노동자뿐 아니라 차별받는 모든 집단에 속하는 노동자와 실업 상태의 ‘산업예비군’, 급여소득이 없는 사람들(이들은 예컨대 집에서 육아를 맡아 노동력인구의 재생산을 돕는다)을 노동계급의 일원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집단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게 만드는 차별 일체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야만 노동자 연대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레닌은 사회주의자가 노동조합 간부에 그쳐서는 안 되고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또한 마르크스가 근대 노동계급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해방되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집단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봤다. 또한 마르크스는 계급을 광의의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력해방을 쟁취하려면 자본가 계급에 맞선 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뿐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해방을 도모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다고 봤다.
저항의 귀환
이처럼 사회주의의 씨앗은 집단적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연대를 실천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노동자 운동이 1980년대 이래 후퇴하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인기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집트뿐 아니라 그리스와 영국에서도 대규모 파업이 벌어지는 상황은 이런 추세를 되돌릴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 가능성을 높이는 데서 반자본주의자들이 노동자 운동과 연계를 맺는 것은 몹시 중요하고 그래서 이 글은 반자본주의자들이 그 이유를 납득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했다. 자본주의를 전복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를 무너뜨린 자리에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잠재력은 바로 노동자들의 연대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2011년 12월 본지에 실었던 글의 원문을 새로 번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