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노동자 연대〉 구독
강남역 살인사건에 관한 이현주 동지의 기사를 읽고 몇 가지 의견을 개진하고자 이 글을 쓴다.
이 사건에서 한 젊은 남성은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여성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살해하였고
이러한 담론에서
‘여성혐오’ 개념에 대해
그러나 여성혐오라는 개념 자체는 문제가 많은 개념이다. 그리고 이현주 동지가 무엇을 지적하여 비판하고 있는지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 가지 좀 더 분명하게 밝혀야 할 문제가 있다고 본다. 즉, 현재 대중적 담론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시각이 정신질환을 앓는 한 남성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인가 아니면
여성에 대한 폭력, 억압, 차별을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성애적 남성성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섹슈얼리티, 경제력, 그리고 위계적 서열이다.
먼저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 보면 남성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여성 의존성이다. 이성애자 남성은 결코 혼자서 스스로 남성다울 수 없다. 반드시 여성이 자신의 남성성을 승인해 주어야 한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자신이
두 번째로 경제력과 남성성의 관계는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백하다. 남자는 자신의 경제력을 통해 아내와 가족을 부양하고 그러한 경제력을 제공하는 자신을 여성이 존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자신의 아내가 직장을 가지기 원치 않으며 살림을 하며 집에서 자신이 빨리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그와 같은 충분한 경제적 부양능력을 가지는 남성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며, 또한 단지 경제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결혼 후 직장을 가지기 원하는 여성은 매우 많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이 직장을 가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성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여성이 직장이 있다 하더라도 가사노동은 여성이 부담하기를 원한다.
세 번째로 지배적 남성성은 위계적 서열을 중시한다. 그리고 남성적 위계서열의 가장 큰 특징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점이다. 남성성은 위계서열의 정점에 서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가장 남성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매우 특이하게도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자신보다 강하고 서열이 위인 대상에게 굴종하고 복종하며 충성을 다하는 것을 남성적 영웅의 특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여기서의 강자는 반드시 개인이 아닐 수도 있다. 즉, 국가나 민족과 같은
이와 같은 남성성의 세 가지 요인들은 때로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남성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장 큰 위기는 여자가 자신의 남성성을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가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지 않을 때, 애인이 헤어지자고 할 때, 자랑할 여자친구가 없을 때, 남성성은 타격을 받는다. 또한 취직을 하지 못하고 충분한 경제력이 없을 때, 경제위기가 오고 실직을 했을 때,
그리고 위와 같이 남성성이 타격을 받으면, 주변에서 다들 선하고 온순한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는 남성이 때로는 극단적인 일을 벌이기도 한다. 우리는 헤어지자고 하는 애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남성, 자신을 무시했다고 칼부림을 하고 방화를 하는 남성의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또한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위에서 말한 남성성이 모든 남성의 본질이라거나, 불변적인 속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현대의 남성들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정적 측면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남성성을 가진 남성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실컷 비난하고 남성 일반을 공격하는 것은 잠시 속을 시원하게 해 줄 한풀이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섹슈얼리티에 있어서의 남성성에 생물학적 영향이 분명 어느 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생물학의 수인이 아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자신의 남성적 성적 능력의 과시를 통해 남성적 자존감을 확인하려드는 태도는 유전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도 아니다. 이것은 여성 이미지에 대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양산해내는 각종 자본주의적 폐해들, 예를 들어 포르노그래피의 유통을 포함한 섹스산업, 성상품화의 문제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또한 경제적 능력을 통해 남성성을 과시하고 또 경제적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남성으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때로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위기와 동떨어진 것일 수 있겠는가.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복종 그리고 자본주의의 지배자들이 책동하는 남성, 여성, 이주 노동자 및 소수자들 사이의 분열과 어떻게 무관할 수가 있겠는가.
자본주의의 위기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정신질환자의 문제인가 여혐의 문제인가라는 문제가 대립되어 제기된 것은 안타까운 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 둘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진실하고 친밀하며 상호존중적인 남녀관계가 아니라 왜곡된 관계를 양산하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 성적 대상화와 상품화를 통한 왜곡된 이미지는 남녀 모두의 사람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고 그로 인해 일부의 사람들은
또한 정신질환의 문제에 대해 국가는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둘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정말 어쩌면 이다지도 국가스럽단 말인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정도로 중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비용에 대한 걱정 없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치료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정히 필요하다면 그들을 별도의 시설에서 보호하며 돌봐야 하는 것이지, 공권력을 동원해 그들을 잡아 가둘테니 안심하라고 말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태도는 이 정말이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끔찍할 뿐이다. 다시 말해, 경찰이 이 사건이 한 정신병자의 소행일 뿐이라고 말하더라도, 사회주의자는 이것을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여 자본주의 국가의 무능을 폭로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오랜 주장이어 왔던 보편적 의료 서비스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의 문제에 있어서도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당당하게 말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의료 복지 지원을 강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이현주 동지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강남역 사건 피해자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픈 사건이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