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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강남역 살인사건에 관한 이현주 동지의 기사를 읽고 몇 가지 의견을 개진하고자 이 글을 쓴다.

이 사건에서 한 젊은 남성은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여성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살해하였고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납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상당히 충격적인 살해동기를 밝혔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여성들이 피해자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마음 그리고 이러한 끔찍한 범죄가 언제든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을 가지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한탄 또는 한탄을 넘어서는 분노, 그리고 이러한 범죄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 동안 여성에게 가해왔고 지금도 가하고 있는 억압과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포스트잇과 쪽지 등을 통해 표출하였으며 그것이 알려지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애도의 마음을 표하였고 특히 SNS와 온라인 상에서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담론에서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소환된 것은 이 사건을 단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 명의 개인 남성이 저지른 우발적 범죄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의 한 징후로서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혐오, 흔히 여혐이라고 줄임말로 널리 쓰이는 이 용어는 몇 년 전부터 성차별과 성폭력의 문제에 대한 담론에서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던 것이었으므로 이 사건에도 여성혐오라는 말을 통해 대중적 여론이 형성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닐 것이다.

‘여성혐오’ 개념에 대해

그러나 여성혐오라는 개념 자체는 문제가 많은 개념이다. 그리고 이현주 동지가 무엇을 지적하여 비판하고 있는지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 가지 좀 더 분명하게 밝혀야 할 문제가 있다고 본다. 즉, 현재 대중적 담론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시각이 정신질환을 앓는 한 남성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인가 아니면 ‘여성혐오’가 표출된 사건인가의 이분법으로 대립하고 있고, 여기서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전혀 엄밀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억압과 차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고통당하고 있는 많은 여성의 현실’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성혐오’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 그리고 ‘혐오’와 ‘차별’의 차이에 대한 이현주 동지의 정당한 지적은 마치 이현주 동지나 또는 사회주의자들이 우리 사회에 여성에 대한 폭력, 억압, 차별이 존재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또는 그것들이 사소한 문제라고 여긴다고 곡해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해 더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필자로서는 노동자연대 동지 중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과 여성억압의 문제를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여성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한다거나 성폭력과 성희롱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는 동지가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바,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며 오히려 여성억압과 성차별을 가장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견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 억압, 차별을 ‘여성혐오’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부르는 것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성혐오’라는 것을 굳이 개념화한다면 그것이 다른 혐오감정들, 즉 ‘동성애혐오’ ‘무슬림혐오’ ‘인종적 혐오’와는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동성애혐오자는 동성애자를 스토킹하지 않으며 동성애자가 자신과 사귀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분노하지 않는다. 무슬림혐오자는 자기만족을 위해 무슬림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성혐오’의 심리는 대단히 복잡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남성성’이라는 개념을 잠시 끌어다 쓰겠다. 여기서 말하는 ‘남성성’은 모든 남자들이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해 공통적으로 반드시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남성들 일반의 불변의 특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의 사회에서 무엇이 남성적으로 여겨지는지를 추상화한 것이다.

이성애적 남성성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섹슈얼리티, 경제력, 그리고 위계적 서열이다.

먼저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 보면 남성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여성 의존성이다. 이성애자 남성은 결코 혼자서 스스로 남성다울 수 없다. 반드시 여성이 자신의 남성성을 승인해 주어야 한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자신이 ‘진짜 남자’임을 여성이 승인해 주어야 한다. 거칠게 말하면, 가장 남자다운 남자는 커다란 성기를 가지고 여성과 섹스를 하여 오르가즘에 도달하게 해 주는 남자, 그것도 많은 여성들과 섹스를 하는 남자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인 것이지 반드시 생물학적인 것만도 아니다. ‘예쁜 여자친구나 아내’는 남성에게 일종의 사회적 자산이며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남성성이 여성에 의해 승인되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남성은 여성을 ‘대상화’하려고 한다. 남성은 여성이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만 만약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신에게 너무나 큰 타격이기 때문에, 차라리 여성의 주체성을 삭제하고, 자신의 욕구대로 언제나 자신을 승인해주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남성은 여성의 성적 매력이나 능력을 품평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성적 능력이나 남성성이 여성에 의해 품평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럴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의 안 한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라면 우쭐해 하겠지만, 언제나 그런 평가를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차라리 여성의 성적 주체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성적 사물과 대상으로서 여성을 취급하는 것을 통해 사실은 자신의 남성성이 여성에게 의존적이라는 것을 은폐한다.

두 번째로 경제력과 남성성의 관계는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백하다. 남자는 자신의 경제력을 통해 아내와 가족을 부양하고 그러한 경제력을 제공하는 자신을 여성이 존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자신의 아내가 직장을 가지기 원치 않으며 살림을 하며 집에서 자신이 빨리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그와 같은 충분한 경제적 부양능력을 가지는 남성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며, 또한 단지 경제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결혼 후 직장을 가지기 원하는 여성은 매우 많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이 직장을 가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성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여성이 직장이 있다 하더라도 가사노동은 여성이 부담하기를 원한다.

세 번째로 지배적 남성성은 위계적 서열을 중시한다. 그리고 남성적 위계서열의 가장 큰 특징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점이다. 남성성은 위계서열의 정점에 서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가장 남성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매우 특이하게도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자신보다 강하고 서열이 위인 대상에게 굴종하고 복종하며 충성을 다하는 것을 남성적 영웅의 특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여기서의 강자는 반드시 개인이 아닐 수도 있다. 즉, 국가나 민족과 같은 ‘위대한’ 대상에게 자신을 바치며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한다.

이와 같은 남성성의 세 가지 요인들은 때로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남성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장 큰 위기는 여자가 자신의 남성성을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가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지 않을 때, 애인이 헤어지자고 할 때, 자랑할 여자친구가 없을 때, 남성성은 타격을 받는다. 또한 취직을 하지 못하고 충분한 경제력이 없을 때, 경제위기가 오고 실직을 했을 때, ‘고개숙인 남성’은 남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상실하며 사회는 ‘아빠, 힘내세요’를 외치며 이들의 상처받은 남성성을 위로한다. 또한 남성은 자신보다 서열이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 밑에서는 충성을 다하지만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견딜 수 없어한다. 남성은 돈 많은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면 서러워하지만, 자신이 약자라고 여기는 대상이 자신을 무시하면 격분한다.

그리고 위와 같이 남성성이 타격을 받으면, 주변에서 다들 선하고 온순한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는 남성이 때로는 극단적인 일을 벌이기도 한다. 우리는 헤어지자고 하는 애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남성, 자신을 무시했다고 칼부림을 하고 방화를 하는 남성의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남성 모두가 여성을 상대로 흉악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이현주 동지의 주장의 요지는, 마치 일부의 무슬림이 테러를 저지른다고 해서 모든 무슬림을 테러리스트 취급하여 적대시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모든 남성을 적대시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며, 여성에 대한 흉악범죄가 일부 남성들이 저지르는 문제일 뿐이므로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또한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위에서 말한 남성성이 모든 남성의 본질이라거나, 불변적인 속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현대의 남성들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정적 측면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남성성을 가진 남성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실컷 비난하고 남성 일반을 공격하는 것은 잠시 속을 시원하게 해 줄 한풀이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현주 동지가 그러한 지점을 지적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한풀이도 때로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남성 일반을 적대시하는 것에 대한 이현주 동지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런 생각도 든다. ‘오죽하면 그러겠나.’)

섹슈얼리티에 있어서의 남성성에 생물학적 영향이 분명 어느 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생물학의 수인이 아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자신의 남성적 성적 능력의 과시를 통해 남성적 자존감을 확인하려드는 태도는 유전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도 아니다. 이것은 여성 이미지에 대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양산해내는 각종 자본주의적 폐해들, 예를 들어 포르노그래피의 유통을 포함한 섹스산업, 성상품화의 문제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또한 경제적 능력을 통해 남성성을 과시하고 또 경제적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남성으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때로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위기와 동떨어진 것일 수 있겠는가.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복종 그리고 자본주의의 지배자들이 책동하는 남성, 여성, 이주 노동자 및 소수자들 사이의 분열과 어떻게 무관할 수가 있겠는가.

자본주의의 위기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정신질환자의 문제인가 여혐의 문제인가라는 문제가 대립되어 제기된 것은 안타까운 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 둘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진실하고 친밀하며 상호존중적인 남녀관계가 아니라 왜곡된 관계를 양산하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 성적 대상화와 상품화를 통한 왜곡된 이미지는 남녀 모두의 사람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고 그로 인해 일부의 사람들은 (남녀모두를 포함하여) 극단적인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여성들은 얼마 전까지 떠들썩했던 아동학대 사건들의 가해자이기도 했다. 남성이라고 해서 악하고 여성이라고 해서 선한 것만은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들이 잘못된 판단을 한 것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비난은 당연히 정당하며 사법체계가 적절한 처벌을 하도록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 역시 정당하겠으나, 이와 같은 사건들이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과연 우연이겠는가?

또한 정신질환의 문제에 대해 국가는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둘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정말 어쩌면 이다지도 국가스럽단 말인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정도로 중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비용에 대한 걱정 없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치료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정히 필요하다면 그들을 별도의 시설에서 보호하며 돌봐야 하는 것이지, 공권력을 동원해 그들을 잡아 가둘테니 안심하라고 말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태도는 이 정말이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끔찍할 뿐이다. 다시 말해, 경찰이 이 사건이 한 정신병자의 소행일 뿐이라고 말하더라도, 사회주의자는 이것을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여 자본주의 국가의 무능을 폭로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오랜 주장이어 왔던 보편적 의료 서비스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의 문제에 있어서도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당당하게 말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의료 복지 지원을 강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이현주 동지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강남역 사건 피해자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픈 사건이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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