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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로 세상 보기:
21세기에 노동자 계급은 약화됐는가

마르크스주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공산당 선언》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외침으로 끝난다. 마르크스가 이 말을 한 1848년, 전 세계 노동자는 1천만~2천만 명밖에 안 됐다. 당시 노동자는 세계 인구의 2~3퍼센트밖에 안 됐고, 그마저도 일부 지역에만 존재했다.

오늘날 상황은 상전벽해처럼 변했다. 국제노동기구 ILO의 통계를 보면, 임금노동자는 2013년에 역사상 최초로 세계 경제활동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전 세계 임금노동자는 이제 16억 명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만 6억 명이 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도전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2011년 좌파 지식인 슬라보예 지젝은 영국 공공부문 노동자 2백60만 명이 연금 삭감 반대 파업을 일으킨 것을 두고 “봉급받는 부르주아의 반란”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장기적 일자리에 취직해 착취당할 기회를 갖는 것은 이제 특권이 됐다.”

이 말을 한 글에서 지젝이 주장한 바는 두 가지였다. 첫째, 다수 대중은 너무나 혹사당하고 처지가 불안정해서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극소수는 ‘특권층’이 돼서 투쟁으로 이득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노동계급이 처한 상황과 사회적 특징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지젝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

노동계급의 특징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수한 지위를 점한다고 주장했다. 그 특수한 지위 덕분에 노동계급에는 특별한 이해관계와 능력이 있다. 또, 그 특수한 지위 때문에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특수한 지위를 점한다는 면에서 노동계급은 다른 특징도 갖게 된다. 첫째, 노동계급은 혁명적 변화를 추동할 만큼 큰 규모와 사회적 힘을 갖는 유일한 계급이다. 무엇보다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에 의존해야만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취는 다른 차별과 다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차별을 당한다고 해서 그가 특별한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착취당하는 사람은 자본가의 이윤 획득을 막을 힘을 갖는다.

둘째, 노동계급은 집단적 성격을 갖는다. 계속되는 이윤 축적 압박 속에 자본가들은 기계류와 노동자를 집중시킨다. 그래서 우리 나라 취업자의 26퍼센트인 4백20만 명은 1백 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한다. 1천 인 이상 사업장에 고용된 사람만 해도 전체 취업자의 7퍼센트인 1백13만 명이다(‘고용노동통계’, 2014년). 또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비슷한 처지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서로서로 처지를 이해하며 동질감을 갖게 된다.

불안정은 모든 노동계급이 공유하는 특징 자본주의 동학은 노동계급을 언제나 불안정으로 내몰고,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그에 맞선 투쟁으로 가득하다. ⓒ이미진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로부터 더 많은 이윤을 추출해야 한다는 압박을 계속해서 받는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조직을 건설하고 투쟁에 나선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역사상 가장 끈질지게 투쟁하는 계급이 됐다. 노예 반란은 1백 년에 한 번꼴로, 농민 반란은 20~30년이나 50년에 한 번꼴로 일어난 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물결은 몇 년에 한 번꼴로, 혁명은 몇십 년에 한 번꼴로 일어난다.

노동자들은 꽤나 오랫동안 무력감을 느끼며 자기 계급의 이익과 충돌하는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머릿속에는 연대와 노동계급 공통의 이익을 기초로 한 다른 사상도 공존한다. 그리고 두 사상의 균형은 계속해서 변한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다음의 두 가지가 큰 요인이다. 첫째, 위기가 크게 발생해 주류 사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둘째,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같음을 깨달으며, 자본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노동계급 투쟁이 고조되면 혁명의 가능성도 열린다. 이렇게 투쟁이 고조될 때는 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의존해야만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또 궁핍과 차별이 없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노동계급의 쇠퇴?

그러나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노동계급에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더는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제조업 ‘쇠퇴’와 함께 노동자들의 힘도 쇠퇴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제조업이 노동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적이 없다. 그리고 제조업이 ‘쇠퇴’한 대표적인 나라로 알려진 영국에서도 제조업 종사자 수는 줄었지만 제조업 산출은 유지되고 있다. 이는 제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상대적 힘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제조업 ‘쇠퇴’ 주장은 한국 현실에는 더더욱 부합하지 않는다. 한국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까지도 꾸준히 증가했다. 전체 고용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31퍼센트에서 2014년 24퍼센트로 줄었지만, 제조업 종사자 수는 1998년보다 1백만 명이 늘었다.

게다가 오늘날 많은 제조업 생산은 여러 나라의 공장이 연계된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한 나라 노동자들의 투쟁이 생산 네트워크 전체를 멈추기도 한다.

또, 제조업이 ‘쇠퇴’한다고 해서 노동계급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유형의 물건을 만드는 것만을 생산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자본가를 위해 이윤을 생산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사무직이나 서비스업 종사자도 노동자이고, 따라서 그들도 조직을 건설하고 투쟁할 잠재력이 있다.

금융업이나 유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처럼 이윤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 노동자들도 힘이 있다. 각 산업이 순조롭게 기능하는 데서 그 노동자들이 핵심적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2011년 영국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은 25억 파운드(약 4조 3천억 원)의 손실 효과를 냈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지면 다른 사람들도 저항에 나설 자신감을 얻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자리가 너무 불안정해져서 노동자들의 힘도 약화됐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비정규직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거에 견줘 비정규직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를 보면 비정규직의 비율은 2007년 55퍼센트에서 2015년 45퍼센트로 감소했다.(물론 사내하청 노동자나 특수고용 노동자 등이 비정규직 통계에서 빠졌을 것이므로 이들을 포함하면 비정규직 비율이 더 늘기는 할 것이다.) 이는 자본가에게 숙련 노동자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필요한 현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비정규직 일자리가 모두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의 약 20퍼센트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상시 고용된 상용직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노동자에 대한 공격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공격이 꼭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꾸는 형태로 벌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프레카리아트

가이 스탠딩 같은 사람들은 ‘프레카리아트’라는 범주에 시간제 노동자 같은 집단도 마구잡이로 포함시키며 불안정화 현상을 과장한다.

시간제 일자리가 임금이나 노동조건 면에서 비교적 열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노동자들이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시간제로 일하는 것은 노동시장에 편입되고 장차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시간제 노동자 등 ‘프레카리아트’에 포함되는 많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다른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다르지 않다.

물론 과거에도 현재에도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은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은 조직을 건설하고 투쟁을 벌이며 노동조건을 개선해 왔다.

사용자들에게 노동자 해고가 항상 쉬운 일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2008~09년 경제 위기 속에서도 한국의 취업자는 계속 증가했다. 2007년 이후로만 3백67만 명이 늘었다. 즉, 사용자들은 고용은 유지하면서도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공격한 것이다.

노동자 해고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해고는 노동자들의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고 투쟁을 촉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에게 해고가 능사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투쟁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은 불안감을 실제보다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노동계급이 큰 패배 뒤에 회복하지 못하거나, 노동시장에 새로 유입된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여파로 좌파적·사회주의적 사상이 주변화된 상황에서 불안감은 더 커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주의자 핼 드레이퍼는 노동계급이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겪으며 성숙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경험하며 자신감을 회복한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나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잘 보여 줬듯이, 조직도 없이 열악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도 결국 투쟁에 나서며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

사회주의자는 이런 투쟁에 동참하거나 관여해야 한다. 투쟁이 더 크게 또는 더 폭넓게 일어나면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사상에 귀를 여는 사람도 늘어날 수 있다.

사회주의자는 이런 경청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참을성 있게 설득해야 한다. 이 썩은 시스템을 뒤엎으려면 노동계급의 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