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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알바노조 주최의 정희진 씨 강연에 다녀와서:
계급, 국가, 제국주의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많이 아쉬웠던 강연

7월 12일, 알바노조가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는 주제로 여성학자 정희진 씨 초청 강연을 열었다. 나는 정희진 씨가 《페미니즘의 도전》 등 스테디셀러의 저자이자 지금도 기고와 강연을 활발히 하고 있는 저명한 여성학자라서 어떤 내용으로 강의할지 기대하며 참가했다. 연사인 정희진 씨와 페미니즘에 대한 청년 학생들의 높은 관심 때문인지 참가자가 많았다.

정희진 씨는 식민지 국가와 피식민지 국가의 말이 다른 것처럼 남성과 여성이 쓰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여성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상 여성혐오 살인인데 경찰이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 내렸다며 비판했다.

비록 나는 이런 쟁점들에 대해 정희진 씨의 주장에 이견이 있고 〈노동자 연대〉의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여성주의 언어와 여성주의 인식론, 강남역 살인 사건의 진정한 성격과 원인 등은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로 진지하게 토론해 볼 만한 쟁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날 강연에서는 이런 쟁점들이 충분한 근거를 통해 다뤄지기보다는, 여성차별과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연사의 우려스러운 주장들이 있었다.

사드와 국정 교과서 문제

이날 연사의 주장 중 사드에 대한 발언은 다소 충격적이어서 내 귀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정희진 씨는 “사드가 우리 땅에 있으면 그것의 문제는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누가 운영할 수 있는 가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사드가 우리나라에 배치됐으니까 우리 거다. 우리는 군 작전권만 갖고 오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심지어 “[사드로] 제가 싫어하는 모든 사람 싹 모아놓고 … ”라며 쏘고 싶다는 식으로도 얘기했는데, 농담식으로라도 이런 식의 얘기는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적어도 “반군사주의자”, “평화학 연구자”라고 주장하는 분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할 말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동아시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지정학적 불안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사드는 누구의 통제 하에 있든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당연히 여기에는 인구의 절반인 여성도 포함된다)에게 해롭다. 사드 배치는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고, 박근혜 정부가 남한 민중운동과 중국 지배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드 배치에 합의한 것은 미 제국주의에 편승해 성장하려는 남한 자본주의 국가 지배자들의 의식적 전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가 미국에 맞서 ‘자주적으로’ 사드 통제권을 빼앗아 오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환상에 기초한 바람일 뿐이다.

정희진 씨는 ‘국정화 교과서에도 찬성한다. 대신 그 교과서는 내가 만들어야 된다’고도 했다. 물론, 정희진 씨가 교과서를 쓴다면 우익 역사학자들이 만드는 교과서보다야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남한의 지배자들이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부친 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기억을 지우고,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계급을 공격할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기 위한 것이지 정희진 씨 같은 여성학자나 진보진영에게 교과서 쓸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배계급이 의식적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의 맥락을 보지 않고, 우리 편에 유리하게 그 내용에 개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공상적인 까닭이다.

사드와 국정 교과서에 대한 정희진 씨의 주장을 들으면서, 나는 정희진 씨가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자본주의 국가는 페미니스트들이 그 일부로 편입돼 평등하고 평화롭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 같은 우파 정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여성주의자들은 대체로 계급보다 성별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여성 대중의 처지를 개선하는 운동의 전략도 더 잘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정희진 씨는 강연 중에 “정규직[이] 더 이상 없”고, 또한 “제가 바라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정규직이 되는 세상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두가 전일제 노동자로 살 필요 없이 네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를 즐기거나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네 시간 체제’가 바람직하다고도 주장했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요구가 정규직만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해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우선, 정규직이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은 과장이다. 21세기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안정적인 숙련 노동자에 의존해 이윤을 창출하려는 자본가들의 필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라 할지라도 오랜 기간 계약을 갱신하며 상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극도의 비관론에 기초한 것이었을지라도 나 자신이 저임금 알바로 생활비를 벌충하는 학생으로서 정규직화 요구가 굳이 필요 없다는 주장은 요즘 청년들의 염원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정규직화 요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염원에도 공명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폐지된 미래 사회의 비전을 얘기하면서, 현재의 생산력 발달 수준으로도 모든 사람들이 굳이 지금처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릴 필요 없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대신 모든 사람이 문화, 예술, 과학 등을 누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나도 그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고, 자본주의가 폐지된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동자들이 더 안정적인 일자리와 더 충분한 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정당함을 주장하고, 이런 투쟁들을 고무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남성에 대한 근거 없는 과도 일반화

정희진 씨는 강연에서 “남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고, [가해자-피해자 위치는 고착된 것이 아니므로] “남자라고 해도 남성 페미니스트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한다. 그런데 정희진 씨가 평상시에 남성을 가해자로 지목하고, 심지어 “잠재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떼야 한다고 최근까지도 주장(〈한겨레 신문〉 칼럼 ‘잠재적 가해자?’, 5월 27일)했던 걸 보면 심각한 모순이 느껴져 의아하긴 했다.

정희진 씨는 이날 강연에서도 “강간 안 하는 남성은 없다”, “한국 남성들은 성 차별적인 사회를 인정하지 않고, 말이 안 통하니까 한국 남성들과는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 “한국 남성들은 (가정폭력으로) 공포의 상징이니까 해외 나가지 말아라” 등의 주장을 함으로써 사실상 남성 집단을 동질적인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것은 앞의 말과는 모순으로 느껴졌다.

물론 남성들 중엔 차별적인 사상을 크든 작든 받아들이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전체 남성의 태도라고 비약해선 안 되고, 이런 의식이 영원불변할 거라고 전제해서도 안 된다. 남성이 여성 차별에 책임이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논쟁할 수 있지만, 적어도 너무 명백한 현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성 중에 강간을 하는 남성은 극소수일뿐 모든 남성이 강간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남성들이 성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당장 이날 여성차별에 관심을 갖고 정희진 씨의 강연을 들으러 온 남성들이 적어도 참가자의 3분의 1은 됐다.

또한 이렇게 모든 남성들을 여성 차별의 억압의 근원으로 보면 개별 남성들을 적으로 돌리게 돼, 가사와 육아를 평범한 여성들에게 떠넘기고 여성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함으로써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조장하고 그로부터 진정한 이득을 얻는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에 제대로 과녁을 겨누기 어렵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곡해

한편, 정희진 씨는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면서 “역사와 지식은 백인 남성의 것이고, 백인 남성들만이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젠더 경험도, 인종 개념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왜곡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는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여성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같은 사람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로자와 클라라는 독일 혁명의 파도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고, 콜론타이는 혁명 러시아의 여성부인 제노텔에서 활약했다. 그 후로도 여러 여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변화된 자본주의의 현실 위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을 발전시켜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여성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노동자연대에서는 여성들이 단체 활동의 각 분야에서 주도적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언제나 국제주의적이었고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도모했기에 백인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백인의 전유물이었다는 주장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국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색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젠더와 인종을 무시한다는 것도 심각한 곡해다. 오히려 엥겔스는 현대 여성해방운동이 탄생하기도 전인 19세기 말에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을 밝히고자 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성 억압이 영원불변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여성 해방의 전망을 발전시켰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여성 해방은 사회주의 혁명이 추구하는 해방된 사회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요소였다. 그들에게 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었으므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불참하거나 여성이 해방되지 않는 혁명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봤다.

또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그 시대의 민족과 인종 억압 문제를 중시하며 분석했고, 그 억압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 왔다. 마르크스와 레닌 등이 그랬을 뿐 아니라, 오늘날 서구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은 무슬림 혐오와 이주자 억압에 맞선 투쟁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정희진 씨는 마르크스주의를 백인 남성의 것으로 치부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인도의 농사짓는 여성은 해방되려면 농사 이전에 공장부터 지어야 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희화화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산업화로 형성된 대규모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핵심 주체라고 보고, 여성 노동자들도 바로 이 주체에 포함된다고 본다. 하지만 노동계급이 착취 상태에 놓이는 것 자체가 해방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착취에 맞서 싸울 때만이 계급 의식이 발전하고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객관적 잠재력이 노동계급에게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

역사 자체가 백인 남성의 것이라는 주장에도 이견이 있다. 정희진 씨는 유색인과 여성의 역사가 종종 무시된다는 점을 비판하고자 이렇게 주장한 듯하다. 물론, 지배자들은 피억압자와 피착취자들의 투쟁의 역사는 삭제하거나 왜곡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가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역사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지배계급 편향적이다. 하지만 정희진 씨는 역사 서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은 채 지배계급이건 마르크스주의자들이건 남성들이 쓴 역사는 다 문제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유물론에 기초한 역사 서술에서 흑인과 제3세계 민중, 그리고 여성 (특히, 노동계급 여성)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에서 중요한 일부로 다뤄져 왔다(대표적으로 작고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혁명가 토니 클리프가 쓴 《여성 해방과 혁명》, 크리스 하먼이 쓴 《민중의 세계사》가 있다). 이 책들을 통해 파리코뮌 때 바리케이트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던 수많은 여성들, 파업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 여성 노동자들 등 여성도 역사 속에서 투쟁에 나서고 혁명의 주체로서 활약한 경험이 수없이 많다는 걸 생생히 알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대 여성해방 운동의 주요 역사와 1960년대 후반 흑인 공민권 투쟁,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 등이 했던 진보적 구실에 대해서도 다뤄왔다. 역사와 지식이 단순히 남성들의 것이었다고 치부하는 건 이러한 점들을 의도치 않게 무시하게 될 수 있다.

맺으며

정희진 씨의 강연이 여러 주장들을 다소 정리되지 않은 채로 펼쳐 놓는 식이어서 내가 오해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몇몇 메시지들은 그래도 분명하게 전달됐고, 위와 같은 이유에서 정희진 씨의 강연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강연이었다. 이 강연을 주최한 알바노조는 정희진 씨의 강연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알바노조 박정훈 위원장과 알바노조를 건설한 청년좌파 경향의 활동가 여러 명이 평화주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해 온 역사가 있지 않은가?

또한 알바노조 동지들이 좌파 운동의 일부로서 과도한 양성 분리주의적 인식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곡해에 대해서도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길 바란다. 남성들을 근거 없이 과도하게 싸잡아 비난하고 야단치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겐 통쾌함을 줄지 모르지만, 여성 차별을 없애는 운동을 건설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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