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낙태권을 위한 투쟁의 의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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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성의 낙태 권리에 대한 쟁점이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하다. 얼마 전 폴란드에서는 낙태에 대한 처벌을 확대하려는 정부에 맞서 대규모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낙태권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여성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국에서 파업을 벌였다. 그 결과 낙태금지법을 지지했던 과반수 이상의 정당 의원들은 놀랍게도 법안을 부결시켰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낙태 처벌을 강화하려는 정부에 맞서 사회단체에서부터 학생과 일반시민들 사이에서 낙태권 보장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폴란드에 이은 ‘검은 시위’에서, 그리고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누려야 마땅한 권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하고 말하고 있다. 필자 역시 모든 사람이 온전한 낙태권을 누릴 수 있길 바라 이 글을 쓴다.
어릴 적 학교에서 찬반토론이나 글짓기 대회가 있을 때마다 흔히 접한 주제 중 하나는 낙태에 대해 찬성과 반대를 논하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늘 많았던 것 같다. 중학교 성교육 시간에는 실제 여성이 낙태 시술을 받는 영상을 보여 줬는데,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될 끔찍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듯한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이런 경악을 금치 못할 교육 방식과 이념을 뒷받침하는 나름의 근거는 바로 ‘생명존중’이었다. 태아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니 맞는 소리라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가 자연스럽게 인정하여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생명존중’은 오직 산모의 뱃속에 있는 태아만을 위한 것이었고 필자가 다 성장한 생물학적 여성이 된 지금, 주체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다루고자 했을 땐 낙태는 죄가 아니라 어쩌면 죄로 여겨지도록 하는 사회분위기가 어떤 세력들에 의해 조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의문의 1패’
나는 그런 세력들에게 몇 가지 반문을 던지고 싶다. 정말 낙태는 아무 죄 없는 태아에게 가혹한 것일까. 만일 내 뱃속에 발생하고 있는 세포개체가 있다면, 그리고 당연히 세포란 살아 있는 것이기에 열심히 움직여 분열을 통해 성장 중인데, 그 개체로 인해 내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을 수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의문의 1패’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여 ‘존중’의 사전상 의미는 ‘높이어 귀중히 대하는 것’이다. 생명을 ‘누구’에게 높이어 귀중히 대하여야 하는지 물음을 던져놓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의 답은 당연할 것이다.
정부가 낙태금지법을 지지하며 주되게 운운하는 것은 출산율 저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낙태를 안 한다고 출산율이 정말 오를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출산율은 지금껏 몰래 낙태를 한 여성들로 인해 낮았던 것이 아니다. 대학 등록금에서부터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혼자 살기에도 뭐하나 경제적으로 녹록지 못한 이 사회에서, 한 가정을 이뤄 출산과 양육까지의 계획을 결심하는 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고로, 이 사회가 출산율을 조금이라도 흔들어 보고자 한다면 아이를 언제든, 몇 명이든 그리고 낳을 수 있을 만큼, 낳고 싶을 만큼 어떠한 책임이나 환경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다.
낙태 금지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낙태하는 여성의 수가 결코 줄지 않는다는 것 또한 강조하고 싶다. 이런 정책은 불법으로 낙태하는 비용을 더 증대시킬 뿐 아니라 여성들이 독극물이나 어떠한 기구를 가지고 스스로 낙태를 시도하는 위험한 상황을 가져 온다. 돈이 많은 부유한 여성은 그나마 낙태가 합법인 해외에 나가거나 비싼 돈을 주고 시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여성과 청소년들에겐 그만한 시간과 돈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낙태권 문제는 특히 이들에게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정부의 낙태금지법을 부결시켜버린 폴란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말 멋지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여성인 노동자가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체적인 태도와 투쟁의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도 함께 연대하여 낙태권은 비단 여성의 문제만이 아닌 남녀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대중적인 투쟁으로 넓혔다는 점도 성공 요인일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인간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호소한다. 만일 낙태가 합법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마음 편히 할 수 있겠는가. 결정에서부터 그 시행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가장 힘든 사람은 여성, 그 자신일 것이다. 생명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것에 누구보다 신중하기에 최후의 수단으로써 내린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여성에게 낙태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그 여성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소외를 경험할 것이다. 낙태 금지는 엄연히 여성을, 사람을 억압하는 요인이다. 노동력 재생산을 통제하기 위해서, 여성을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기보다는 탄생을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하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온전한 낙태권 쟁취 운동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저항 운동과 결합돼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