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건강보험 국고 지원 축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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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에서 흑자가 발생한 것은 국가가 보험료만 많이 걷고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사진 이미진
박근혜 정부의 건강보험정책이 점입가경이다. 9월 초 정부가 발표한 2017년 예산안을 보면, 건강보험재정 지원 예산을 올해보다 2천2백11억 원 줄어든 6조 8천7백64억 원으로 책정했다.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국고 지원(일반회계)은 예상수익의 14퍼센트로 법에 명시돼 있다. 그럼에도 법을 어기고 건강보험재정이 흑자라는 이유로 지원금을 축소한 것이다.
정부가 법도 지키지 않고 국고 지원 축소를 획책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역대 정부들은 건강보험에 대한 국가 책임을 줄이려 해 왔다. 건강보험 국고 지원은 1987년 민주항쟁으로 ‘전 국민’ 건강보험을 쟁취했을 때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 사측이 건강보험료 절반을 부담하는 직장가입자보다 지역가입자들의 보험료 부담이 높다는 문제제기에 따라 지역가입자 보험료의 50퍼센트를 정부가 지원하기로 한 것이 그 기원이다.
사실 한국의 건강보험이 직장건강보험으로 시작한 이유는 박정희·전두환 정부가 건강보험 국고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972년 의료보험 시범사업의 주된 쟁점은 국고 보조금의 현실화였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는 지원을 하지 않았고, 1977년 보험료를 부담할 수 있는 기업들에서만 직장건강보험이 시작됐다.
‘전 국민’ 건강보험 실시 후에도 김영삼 정부는 계속 국고 지원금을 축소하려 했다.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 통합 과정에서 지역가입자에 대한 국고 지원금을 축소하려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2000년 의약분업 도입 당시 의사들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수가를 대폭 인상하면서 건강보험재정이 적자를 내자, 다시금 국고 지원이 화두에 올랐다. 기대수익의 20퍼센트(일반회계 14퍼센트, 담배세 6퍼센트)를 지원하도록 한 현행안이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조차 한시적 지원으로 규정돼 있어, 이에 따르면 국고 지원은 내년까지만 효력이 있다.
즉, 1987년 노동자 투쟁의 성과로 쟁취한 건강보험 제도가 계속 공격받고 있는 과정이다.
목적
둘째,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은 높이지 않고, 국민 건강을 병원산업과 여타 보건의료산업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려 한다.
한국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OECD 국가들 중 밑바닥을 기는 상황에서, 정부연구기관조차 건강보험의 기능을 강화하려면 앞으로 국고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전망한다. 그런데 거꾸로 국고 지원을 축소하는 정책은 결국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온전히 노동자에게 떠넘기려는 시도다. 즉 수익자부담 중심의 ‘민영화’ 전략이다.
수익자 부담 원칙의 강화는 건강보험 재정 부담에 대한 ‘형평성’ 문제를 악화시키는 동시에 건강보험공단의 공익성도 악화시킨다. 특히 높은 본인부담금과 비급여 진료 허용 조처는 신약과 신의료기기 시장 확대에 기폭제가 됐다.
단적으로 한국이 인구 대비 아시아 최대의 로봇수술기기 보유국이 된 데에는 이처럼 보장성이 낮은 건강보험 제도가 큰 구실을 했다. 마구잡이로 기계를 도입해도 환자들에게 비싼 치료비를 받아 큰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조건부 허가 약제 등 비보험 약품 사용도 용인돼, 약값이 비싸지고 제약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즉, 건강보험 제도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의료기기산업과 제약산업에는 호재가 된다.
그런데 건강보험 재정이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노동자들이 내는 보험료가 낮기 때문에 보장성이 낮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즉, 보장성을 높이려면 보험료를 올려야 한다는 논리를 강화한다. 국가 책임은 쏙 빠지고 말이다.
수익자 부담 원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가 모든 복지제도에 도입하려 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다. 즉, 노동자들이 국가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와 기업주들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 국고 지원 축소의 목적이다.
한국 | 일본 | 대만 | 네덜란드 | 프랑스 | 벨기에 | 이스라엘 | 스위스 | |
---|---|---|---|---|---|---|---|---|
지원비율 | 14.8 | 37.1 | 26.0 | 55.0 | 47.0 | 33.7 | 39.0 | 17.0 |
비교연도 | 2010 | 2008 | 2008 | 2010 | 2008 | 2009 | 2005 | 2007 |
위의 〈표〉를 보면 한국의 국고 지원 비율은 건강보험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 중에 가장 낮다. 참고로 2014년 기준으로는 13.4퍼센트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렇다면 위 표에 나오지 않는 영국·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 등 다른 OECD 국가들은 어떨까? 미국·멕시코 정도를 제외하고 위 표에 나오지 않는 나라는 대부분 국가가 의료비 전액을 조세로 책임지는 국가의료체계(NHS)를 운영한다. 민간의료보험의 천국인 미국조차 메디케어·메디케이드 같은 의료보장 제도 때문에 총의료비 중 국고 지원 비중은 한국보다 높다.
게다가 한국은 병원의 95퍼센트가 민간 소유고, 각종 의료기기, 약품 등도 모조리 시장 논리에 내맡겨져 있다. 한국은 가히 시장의료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와 영리병원 금지 정도가 유일한 제한 장치인데, 이조차 정부가 나서서 흔들어대기 일쑤다.
시장의료의 결정판
그러다 보니 돈 없는 환자들은 지난 5년간 지속적으로 병원 이용을 줄여 왔다. 그 결과 20조 원이 넘는 건강보험 흑자가 생겼다. 건강보험 누적 흑자는 정부의 엉망진창 의료정책을 반영하는 것이자, 의료 이용의 부익부 빈익빈, 불평등의 가속화를 보여 준다. 이런 의료체계 아래서 부자들은 본인부담금을 내고 더 많은 혜택을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인 임플란트의 건강보험 적용이다. 임플란트의 건강보험 적용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정부는 총비용의 50퍼센트만 지원하는 안을 내놓았다. 때문에, 최소 2개까지 적용하더라도 1백20만 원(개당 60만 원)이 없으면, 임플란트를 시술 받을 수 없다. 또한 임플란트 지원보다 우선돼야 할 틀니도 50퍼센트만 보장해 주는 등 우선순위도 뒤죽박죽이다.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누구나 부담없이 틀니와 임플란트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보험 적용 범위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건강보험에서 해마다 막대한 흑자가 발생한 것은 국가가 보험료만 많이 걷고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흑자를 이유로 국고 지원금마저 축소하려는 시도는 후안무치한 행동이 아닌가.
정부는 올해 3월부터 사회보험 재정건전화위원회 등을 통해 건강보험 재정을 장기채권과 펀드에 투자하려 하고 있다. 보장성 강화에는 돈 한 푼을 아까워하더니, 건강보험을 민간보험사 운영하듯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박근혜 정부는 지난 4년간 대형병원의 선택진료비와 병실료 일부만 찔끔 지원하고서 생색을 내더니, 무려 20조 원을 남겼다. 그리고 이 돈으로 돈놀이(고위험 재정투자)를 획책하는 한편 국고 지원 축소를 시도하고 있다. 빨라지는 노령화와 한국의 낮은 건강보험 보장성을 고려할 때, 국고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시도보다 국고 지원 확대 계획을 명확히 하는 것이 우선이다.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편 논의(노동자들 사이의 건강보험료 부담 형평성만 조정하는 방안)가 마치 건강보험재정 문제의 핵심인 것처럼 부각되는 동안, 박근혜 정부는 건강보험의 막대한 흑자를 핑계로 국고 지원을 축소하려 해 왔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국가 책임을 강화해 건강보험 재정의 공적 성격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가 건강보험 재정을 책임지고, 이를 실질적인 의료비 인하에 쓸 수 있는 국가 책임 강화를 우선적으로 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