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보여드리겠나이다!
〈노동자 연대〉 구독
영화 〈전함 포템킨〉. 전함의 수병들은 썩은 고기에서 득실거리는 구더기를 바라보고 있다. 억울한 수병들은 장교에게 항의한다. 장교는 “그건 구더기가 아니다, 다만 죽은 벌레일 뿐이다. 소금물로 씻어내면 아무 이상 없다”며 수병들을 설득한다. 수병들이 다들 한마디씩 하기 시작하자, 영양사로 보이는 사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장교와 함께 사라진다. “그건 질 좋은 고기야! 입닥치고 먹기나 해!”
급기야 수병들은 고기 수프를 거부하고, 봉기를 다짐한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스프에 불만 있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버려”라는 상사의 말에 “동지들, 때가 왔소!”를 외치며 총을 들기 시작한다. 그 때 유머스럽게 혹은 의미심장하게, 한 사람이 십자가를 들고서 나타난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이 모세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자막. “주여,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깨닫게 하소서.”
여기는 서울시청. 수많은 사람들이 시청 앞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성조기와 태극기가 펄럭인다. ‘구국기도회’라는 글자가 적힌 대형 배너가 집회 현장 앞에 걸려 있다. 어떤 관계인지 잘은 알 수 없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서명’을 받기 위한 가판도 마련돼 있다. 그리고 그들은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 저항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옵시고 …”
사람들은 왜 종교를 찾는가? 성경은 거짓말투성이고, 종교가 비합리적임이 극명히 드러나는 이 시대에 왜 종교를 갖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만 가는가? 과학자인 마이클 셔머는 사람들이 ‘기이한 것’을 믿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런 믿음이 위안이 되기 때문임을 지적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소외’에 맞닿아 있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자본주의가 노동자와 그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을 대립하게 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쉽게 말해, 계속되는 작업은 노동자에게 삶에 대한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점점 노동에 예속돼 간다.
뭔가를 생산하고 생각해내든 그것은 상품으로서 단시간적인 가치만을 가질 뿐, 우리에게 지속적인 만족감은 주지 못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는 데에 힘쓰고 지인들에게 지독할 만큼 집착하고, 스포츠와 향락산업에 찌들며, 마침내는 종교를 찾는다. 소외의 효과가 심한 사람이 종교에 집착하는 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안도감, 새 세계를 향한 희망, 나를 사랑하는 실체 없는 존재에 대한 믿음과 감사, 공동체 안에서 안정된 소속감 등이 바로 현대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들이다.
때문에 마르크스 또한 종교가 일종의 마약이라는 ― “종교는 사람들의 아편이다” ― 계몽주의의 종교 비판을 공유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다” 라고 하면서, 종교가 사람들에게 원기를 불어 넣어준다고도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종교적 고통은 현실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자본주의의 피해자인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뿐 아니라 ‘실존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를 금지하는 사회와 국가에 반대해야 한다. 억압과 소외가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계급이 사라지면 불평등 또한 사라질 것이고, 사람들은 ‘마약’을 찾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종교를 제재하는 스탈린주의 소련과 현재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종교를 강요하는 사회와 국가도 반대해야 한다. 자신의 소외를 다른 이들에게 투사해 ‘마약 복용’을 강요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폭력이고 억압이다.
피억압 민중이 종교를 명분으로 억압에 저항하고 평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연히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며 우리의 이웃인 억압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성경에 의지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한 사랑은 오직 “연대가 사회의 기초가 될”(트로츠키) 사회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