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점거를 통한 공기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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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과 채권단은 지금 제3국에서 비밀리에 인수·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 5월 30일 GM이 인수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GM 인수는 급물살을 타는 듯하다.
GM이 2~3개월 간 정밀 실사를 거치고 최종 계약을 7~8월쯤으로 미룰지라도 실로 대우차 처리 문제는 당장 코앞에 닥쳐 있다.
GM은 대우차를 거의 공짜로 사들이려 한다. 제프리 존스 미 상공회의소장이 “공짜로 매각하면 사겠다.”는 말은 단순한 망발은 아니다.
GM은 대규모 부채 탕감까지 요구하고 있다. GM은 22조의 대우차 부채 가운데 단 2조~3조 원만을 짊어지려 한다. GM은 심지어 법인세·취득세·지방세 대폭 감면 등 각종 특혜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 김대중 정부의 매각 의지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정부는, 1985년 우리 나라 대기업 노동자 투쟁의 포문을 열었던 대우차 노동자들을 좌절시켜 노동자 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 한다. 대우차 노조 투쟁은 지난해부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대리전으로 여겨져 왔다.
정부는 대우차 노동자들의 기를 꺾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이무영이 국회에서 약속한 “치료비 보상”은 감감 무소식이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조합원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전자신분증을 보여 줘야 공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장치까지 만들었다.
인천지법은 파업 기간 중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며 대우차 노조 집행부 43명에 12억 9천만 원 재산 가압류 신청을 했다.
비현실적 평가와 전망
과연 대우차 노동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견해를 밝힌 〈노동사회〉(한국노동사회연구소 출판) 4월호의 ‘대우차 투쟁, 반성과 전망’은 상당히 위험스럽다.
그 글의 저자인 이성재 씨는 대우차 노조 지도부가 “유연한 전술”을 구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노조가 동의서를 진작부터 써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조 동의서는 항복 문서이자 일종의 준법서약서였다. 그래서 대우차 노조가 동의서를 써 주자마자 지배자들은 재빨리 노조 동의서를 은행 노조들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었다.
따지고 보면, 1999년 워크아웃 직후 대우차 노조가 “고용조정, 임금삭감, 상층 노조와의 단절”의 내용이 담긴 노조 동의서를 제출할 때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꼴이 됐다. 그러나 이성재 씨는 노조 동의서 제출이 “노동조합이 투쟁해 나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이성재 씨는 노동조합 집행부가 정리해고의 신호탄인 전환 배치조차 거부했다고 질책한다.
“이미 부도가 나고 그에 따른 구조조정 폭이 커져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전환배치의 폭을 확대하고 노사분담으로 퇴직위로금과 리콜제를 전제로 한 희망퇴직을 시행해 사측에 의한 일방적인 정리해고를 막고 노조의 핵심 역량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성재 씨는 김일섭 집행부가 현실적 목표를 세우지 않아 화를 자초했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그가 제안하는 투쟁의 목표와 방식은 어떤까?
그는 “공장 정상화와 부평 공장 사수와 발전”을 목표로 제시한다. 그러나 회사와 채권단, 정부, 노조 모두가 정상화를 바란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각기 다른 정상화 방식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문제는 어떻게 정상화를 이룰 것인가이다.
그는 정상화를 위해 “노조·사무노위·회사 3자의 범대책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노조와 회사가 단결해서 “GM과 김대중 정권·채권단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다.
그는 3자 범대책위를 “노사협조주의로 매도할 수 없다”며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국공합작했던 사례를 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 마오쩌둥과 장제스 사이에는 비록 일시적이고 불안정하긴 했지만 일본 제국주의 군사침략 저지라는 공동의 이익이 있었다. 그러나 대우차 회사측과 노조 사이에는 어떤 공동 이익이 있을까? 이성재 씨는 부평 공장 폐쇄 방지라는 공동 이익이 존재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우차 회사측은 그 동안 시종일관 GM 매각에 사활을 걸어 왔다. 그런 회사와 연대해 GM에 맞서자는 주장은 완전한 착각이고 몽상이다.
이미 대우차 노조는 회사가 제안한 경영혁신위원회에 참여해 여러 차례 협상을 했지만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했다.
4월 10일 경찰 만행 직후 회사는 노조에 긴급 협상을 제안해 놓고도 협상단에 해고자가 끼어 있다는 이유로 돌연 대화를 거부했다. 노조와의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회사와 어떻게 단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채권단과 회사가 당초 인력감축 목표로 잡았던 인원 6천8백84명을 넘긴 것도 모자라 6월까지 5백 명에서 1천여 명을 더 해고하는 계획을 추진중이라 한다. 게다가 7월부터 상여금 가운데 3분의 1을 반납하라는 강요까지 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회사와 단결하자는 것은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정부와 채권단에 투항하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성재 씨의 투쟁 평가와 대안은 현실적이기는커녕 비현실적 몽상으로 가득하다.
그는 “전망의 불투명함이 다시금 [현장 조합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재 씨의 전망은 더더욱 불투명하다.
대안은 없는가?
그렇다면 GM 매각이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 대우차 노동자들에게 대안은 무엇인가?
김일섭 집행부와 금속연맹 지도부는 “해외매각 반대와 부평 공장 사수, 공장 정상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부평 공장을 사수하고 공장 정상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장 노동자들이 느끼는 갑갑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공장 정상화”를 말한다 해도 그것을 위한 뚜렷한 방법에 관해 침묵한다면 “해외매각 반대”라는 구호는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공장 정상화”는 모두가 바라는 바다.
지금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은 해외매각 반대만이 아닌 더 분명한 대안 제시다. 현재 대우차 처리 방안에는 해외매각이냐 공기업화냐라는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김일섭 집행부는 시종일관 공기업화라는 대안에 관해서는 침묵해 왔다.
내심 ‘공기업화는 비현실적인 주장이다’라고 여긴 채 공기업화를 독자 생존의 한 가지 방법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
공기업화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처럼 비현실적인 생각도 없다. 이미 대우차는 ‘사실상’(de facto) 공기업이나 다름 없다. 정부 기관인 산업은행이 대우차의 채권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다. 문제는 사실상 공기업을 ‘법률상’(de jure) 공기업으로 공식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강제할 진정한 투쟁 수단을 채택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노동자들의 단호한 공장 점거 파업이 관건이다. GM과 정부와 채권단을 벌벌 떨게 만들고 도저히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야만 법률상의 공기업화를 이룰 수 있다.
많은 투쟁 사례들이 이를 입증한다. 1936년 미국 플린트의 GM 노동자들이 영웅적인 공장 점거를 통해 통쾌한 승리를 얻어 냈다. 1970년대 초 스코틀랜드의 UCS 조선소 노동자들도 점거를 통해 폐업을 막았다. 1970년대 초 글래스고 경찰서장은 노동자들의 저항이 두려워서 UCS 조선소 점거를 파괴하기 위한 행동을 감히 할 수 없다고 정부에 보고해야만 했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1998년 IMF의 지시를 받은 김대중 정부의 맹렬한 기세에도 이럭저럭 선방을 해서 비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공장 점거라는 전술 때문이었다. 공장 점거는 승리를 가져올 유일한 투쟁 방법이다.
그러나 김일섭 집행부는 공장 점거를 통한 공기업화를 단 한 번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금속연맹이나 민주노총의 지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한시적”이라는 말이 따라붙었고 공기업화라는 용어 자체도 꺼렸다.
공기업화라는 대안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채 해외매각 반대만을 외치는 것은 마치 노동조합이 ‘투정’이나 부리며 발목을 잡는 것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대안 없이 반대만 해 대는 비현실적인 집단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우려스런 정상화 추진위
그러다 보니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던 해외매각 불가피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전·현직 노조 간부들로 구성된 대우차 정상화 추진위는 “차라리 해외매각이 고용 유지를 위해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정상화 추진위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GM이 대우차를 인수하더라도 부평 공장을 포함한 국내 공장을 일괄 인수하고 고용을 꼭 승계한다면 매각에 반대하지는 않겠다.”
대우차 노보의 한 현장 조합원 말마따나 “지금 조합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망”이다. 대우차 노조의 노보 5월 29일치에서 다른 한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GM 매각이 좋은지, 부평공장이 유지될 수 있는지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노조가 중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공기업화라는 대안이 공공연하게 거론되지 않자 자연히 “고용승계를 전제로 한 해외매각”이라는 주장이 급부상하고 있다.
노동조합 집행부의 약점을 이용해 대우차 정상화 추진위는 부평 공장 조합원의 다수(현재 조합원은 4천 명)인 3천3백62명의 지지 서명을 받았다. 정상화 추진위가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지는 지금으로선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강제적 서명”이라는 김일섭 집행부 일각의 관측은 자기 위안일 뿐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GM 매각을 바라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한 통계에 따르면, 대우차 노동자들은 각각 해외매각에 42.6퍼센트, 선 정상화 후 처리에 35.7퍼센트, 공기업화에 18.6퍼센트 찬성 입장을 보였다.
다만 현장 노동자들은 해외매각을 찬성해서라기보다 “부평공장 존속과 고용유지”라는 말에 더 이끌리고 있는 듯하다.
목표와 대안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대우차 노동자들은 깊고 깊은 고통을 견뎌 왔다. 불확실한 미래의 노예가 돼 있다는 고통 때문에 대우차 노동자들의 마음은 숯덩이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과 같은 심정이 압도하기 마련이다.
대우차 정상화 추진위는 바로 이런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지금 정부와 채권단과 회사는 노동조합에 맞선다는 이유만으로 대우차 정상화 추진위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천군만마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우차 정상화 추진위와 사무노위 그리고 대우차 한마음 직공장들이 “해외매각 반대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며 금속연맹에 항의한 일이 바로 다음 날 〈조선일보〉 사회면의 톱 기사를 장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해외매각에 반대하는 김일섭 집행부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하고 매각의 불가피성을 전문적이고 세련된 필체로 주장한 김대호 과장의 책(《대우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을 호평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마지막 기회
김일섭 집행부는 2월 19일 경찰이 부평 공장을 점령하기 직전 공장 점거라는 투쟁 방법을 사용할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김대중 정부에게 당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공장을 빼앗겼다. 게다가, 모순이게도 김일섭 집행부는 경찰 기습 바로 전 날 회사측에 제안한 희망퇴직안이라는 양보안을 다시 제안했다. 조합원들 앞에서 “희망퇴직안 제시는 잘못이었다.”고 말했으면서도 말이다. 당연하게도 회사측은 양보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평 공장 탈환이라는 구호는 공장을 경찰한테 빼앗긴 노동자들의 분노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장 점거라는 수단을 단지 “고려”하기만 했던 것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4월 10일 경찰 만행은 대중적 분노를 일으켰고 다시 대우차 노조는 국민적 초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김대중이 잠시 여론의 눈치를 보는 사이에 어느 새 매각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대우차 노조와 금속연맹과 민주노총은 김우중 체포 결사대에 이어 GM 매각 저지 결사대를 꾸렸다. GM 매각에 반대하기 위한 국제적인 여론전은 필요한 일이다. 고약하게도, 정상화 추진위는 김우중 체포 결사대가 유럽에서 대우차 딜러와 소비자들을 상대로 대우차 불매 운동을 벌였던 것을 비난했다. 그들의 비판은 회사와 채권단의 입장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매출 회복의 호기를 놓쳤다고 혀를 찼다. 만약 공장 점거라는 투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그 투쟁을 어떻게 비난할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제 홍보 투쟁이 공장 점거의 대용품은 못 된다.
단호한 대중 투쟁만이 고용 안정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공장을 빼앗겼던 오류를 분명히 깨닫고 과감히 단호한 투쟁 수단을 채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유력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