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극단적 중도파》(타리크 알리 지음, 장석준 옮김, 오월의봄, 2017):
매력적이지만 실망스럽기도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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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등장한 타리크 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좌파적 인사다. 그의 새 책은 주류 정치권에서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들이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결탁하는 현상”을 꿰뚫는다. 알리는 이런 현상을 “자본의 독재가 정당을 좀비로 만든다”고 했는데, 꽤나 적절한 표현이다.
타리크 알리는, 그가 “야당이 없는 나라”라고 부른 영국에 초점을 맞춘다. 알리는 이렇게 지적한다. “영국 노동당만큼 규제 완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요구에 기꺼이 그리고 완벽하게 굴복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사례는 서유럽 어디에도 없다.” 알리는 이 책에서 “블레어 키치 프로젝트” [미국 공포영화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에 빗댄 표현으로 ‘키치’는 ‘저속한, 싸구려’라는 뜻]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블레어가 물러날 때쯤에는 “노동당 의원단 다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를 혐오하게 됐다”고 지적한다.
알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국회의사당 패거리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 선거 때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알리는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를 둘러싸고 벌어진 급진화를 찬양한다. 〈극단적 중도파〉에서 알리는 각각 장(章)을 할애해 유로존과 국민보건서비스(NHS)를 다루고, 나토와 제국주의에 대해 논평하며 미국과 영국이 “짝짓기하는 개처럼 착 달라붙어 있다”고 촌평한다.
알리는 미국에 관해 다루면서, “미국의 쇠퇴가 임박했다는 그릇된 낙관주의”는 “경제결정론과 희망 섞인 관측의 혼합물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중국이 미국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군사적 도전이 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중국이 장차 제국 지위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고 볼 만한 증거는 없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강력한 제국[미국]의 진로는 국내의 엄청난 정치적 격동이나 해외의 심각한 도전 없이는 방향이 바뀔 수 없다.”
알리는 이렇게 지적한다. “2008년 경제 위기 이래로 체제의 약점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계속됐지만 … 회복 불가능한 타격은 없었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 상황이 심각하긴 하지만 파국을 맞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알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과도하게 집중된 자본과 다수 대중의 필요 사이에 모순이 폭발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하지만 알리 자신이 옳게 덧붙이듯, “자본주의는 저절로 소멸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알리는 “세계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꼽는다. 그는 “대중적 운동과 집회 등으로 새로운 운동과 정당을 건설[하는 것]”에 기대를 걸며 “어떤 변화든 그 출발점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차르 지배 하 러시아라는 특수한 조건”의 산물로 간주하고는, 아무런 설명 없이 1959년 쿠바 혁명과 동등하게 취급한다. 두 혁명 사이에 어떤 표면적 유사점이 있든 간에, 둘은 많이 다르다. [그런데] 알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보면, 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기각하는 듯하다. “제조업의 쇠퇴로 전통적 노동계급은 투쟁성을 잃었다. … 패배로 사기 저하된 공식 노동조합들은 극단적 중도파 일부와 연계를 맺고 신자유주의에 무릎 꿇었다.”
그는 베네수엘라·볼리비아·에콰도르의 볼리바르주의 정부들이 희망을 되살리고 있다고 보면서도, 이들 정부의 최근 상황을 분석하지는 않는다. 알리는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 스코틀랜드의 [좌파적 연대체인] ‘급진적독립캠페인’(RIC)을 찬양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럽의 급진 정당들의 성공은 대안 경제 체제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 “생산 설비의 국가 소유와 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특징인 남아메리카 모델은, 중요한 첫 단계[이지만] … 유럽에서 이를 실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유럽연합의 모든 기구들이 어떤 변화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분석, 르포르타주, 알리 자신의 경험담을 망라하고 있으며 재치가 넘친다.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결론은 실망스럽다. 알리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자유주의를 격퇴하려는 시도가 힘을 모으는 중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이를 대체할지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그렇게 할지는 여전히 토론 주제로 남아 있다.”
그는 1913년에 레닌이 쓴 글을 인용한다. “하층계급이 과거의 방식으로 살기를 원치 않는 것만으로는 혁명이 일어나기 충분하지 않다. 상층계급도 과거의 방식으로 지배하고 통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러면서 알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당시와는 아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 러시아 혁명가가 쓴 이 글귀는 여전히 현실을 꿰뚫는다.” [그러나] 알리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책 뒷표지에도 드러났고 1902년 레닌의 외침이기도 했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알리는 문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이 책이 겨냥하는 독자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책을 대중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새롭게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선택 받지는 못할 것 같다. 타리크 알리가 제대로 불을 뿜어냈다면 좌파들에게 큰 힘이 됐을 텐데 안타깝다.
[i] 이 책의 역자 장석준은 지난 20년간 해외 좌파의 동향을 나름의 개량주의적 관점에서 소개해 왔다. 그래서 혁명적 좌파에 대한 편견과 부정확한 사실을 자주 드러내 왔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가령, 271쪽에 있는 각주에서 그는 SWP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고 이언 버철이 그 사건에 항의해서 탈당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고, 이언 버철은 이 ‘사건’에 항의해 탈당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 레닌주의가 21세기에 적용되지 않는다며 탈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탈당한 후에도 버철은 SWP의 연례 맑시즘 포럼에 연사로 오는 등 SWP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책의 저자인 타리크 알리도 지난해 맑시즘 연사로 참여했다.) 이제 장석준 씨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해서 쉽사리 해외의 혁명적 좌파에 관해 곡해하기를 그만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