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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에서의 좌파의 전략

[편집자 주]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 남한 정권 지지인가 북한 정권 지지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나뉘어 왔다. 이것은 서로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분노, 저항이 부차적이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입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함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이 그 네번째다.

경제학자 슘페터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즈음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이 매우 많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심하기 어렵게 한다”고 표현한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1946년은, 파업으로 인한 노동 손실일이 1억 1천6백만 노동일로 역사상 파업 물결이 가장 집중적이었던 해로 기록됐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봉기와 공장점거로 파시스트를 패배시켰다. 1944년 1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일으켰고, 15만 명 이상의 레지스탕스 전사가 14개의 추축국 사단을 저지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인정했듯이 “노동자들이 실질적인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독일 7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봉기했고, 마르세이유 노동자 위원회는 공장을 접수해 운영했다.

‘해방’을 맞은 조선의 상황은 이런 국제적 분위기의 일부였다. 일본의 잔혹한 지배기구는 패전과 함께 급속히 붕괴했다. 조선총독부가 여전히 있었지만, 관리들의 출근율이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아 그 기능은 거의 마비됐다.

공업부문 재산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자본가들이 사라지자 노동자들이 폭발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민중은 어떠한 정치세력의 개입 없이 자생적으로 진출했다. 부르스 커밍스가 지적하듯이 “서울의 지도층이 11월과 12월이 돼서야 중앙기구들을 설치했을 때, 모든 절차는 추인의 형식이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를 인용한다면 지도자들이 대중보다 뒤떨어졌던 것이다.”

해방은 단순히 일본인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예를 들어 군산 종연조선 노동자들의 성명서에서 이러한 의식을 볼 수 있다.

“해방은 누구를 위한 해방 … 이냐? 노동자에게서 직장을 빼앗고 빵을 주지 못하는 독립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의의가 있으랴. … 노동자 대중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는 그 날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여기에 맹서한다.”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단화·조직화한 공장에서는 자주관리운동이 강력하게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운수업, 상업, 어장, 극장, 학교 등에서도 그랬다. 한 기록을 보면, 1945년 11월 4일 16개의 산별노조에 7백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자주관리운동은 일본인 사업장뿐 아니라 화신백화점 등 조선인 자본가의 사업장으로도 확대됐다. 이는 자주관리운동이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옛 질서를 복구하려는 미군정만이 아니라 당시 스탈린주의 좌파도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진출을 차단했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20일 발표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에서 “조선과 같은 데에 있어서는 평화적으로 혁명의 성공이 가능”하며 “조선은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계단을 걸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급진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영등포지구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과 전평 지도부 주류가 가지고 있는 미군정에 대한 기회주의적 태도와 ‘평화적 혁명론’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도 근본에서 스탈린주의 단계혁명론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급진적 운동에 대한 혁명적 전략을 제출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민족통일전선 결성사업에 참여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인민공화국을 내세우는 사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족통일전선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은 말뿐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945년 11월 24일 열린 제1회 인민공화국 확대집행위원회의 위원 50명 가운데 노동자 대표는 없었다.

E. H. 카가 “민중전선 강령은 통증을 가라앉히는 진통제”라고 말했듯이, 스탈린의 민중전선전략은 아래로부터의 급진화를 차단했다. 왜냐하면 서방 승전국들과 함께 전후 식민지 재분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서방 지배계급과의 신뢰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던 노동자들의 반파시스트위원회는 해체됐고, 심지어 공산당의 강령은 기독교민주당의 강령보다 온건했다.

그리스 레지스탕스가 거의 권력을 잡았다가 스탈린의 압력으로 영국 지배자들과 나찌 잔당에 권력을 넘겨 준 것은 최악의 비극이었다. 그 후 좌파는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장기간에 걸친 독재 정권이 들어설 길을 열어 줬다.

물론 당시 남한 스탈린주의자들의 노선이 언제나 ‘타협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947년 후반을 지나면서 극적으로 좌선회했다. 특히 1948년 단독선거 보이콧을 위한 일련의 무장행동들에서 그랬다.

이 좌선회는 사람들이 해방 초기보다 급진화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은 해방 초기보다 수동적이었다. 이런 수동화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의 패배 때문이었을 것이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대대적으로 좌익을 탄압했다. 9월 총파업은 공산당의 “정당방위 역공세”로 출발했다. 3백만 명이 참가한 10월 봉기는 9월 총파업 과정에서 벌어진 경찰과 김두한 같은 우익 정치깡패의 노동자 학살에 대한 자생적 항의로 불붙었다.

여기에는 심각한 식량위기와 같은 경제적 조건들이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영남일보〉는 이런 상황을 빗대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사설을 싣기도 했고, 청송에서 2백여 명이 굶어 죽은 ‘대량 아사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은 9월과 10월의 ‘공세’ 속에서도 미군정과 전면적인 충돌은 회피했다. 공산당의 목적은 결렬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하기 위해 미군정에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미군은 탱크까지 동원해 봉기를 진압했다. 그리고 1천 명의 시위대와 2백여 명의 경찰이 사망했지만, 미군은 단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수동화의 두 번째 이유는, 이 때쯤이면 어느 누구 눈에도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미 남과 북에는 사실상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박세길 씨는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에서 “2.7 구국투쟁[1948년의 단독선거 저지투쟁 ─ 필자]은 남한 민중의 단결의식과 투쟁의지가 … 간단없이 성장해 왔음을 보여주는 일대 쾌거”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물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월의 선거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1948년 한국여론협회의 조사를 보면 조사자의 91퍼센트가 유권자 등록이 강제적이었다고 응답했다. 투표장에는 무장 경찰과 우익 테러단이 진을 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과장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전국 투표율은 90퍼센트가 넘었다. 그리고 이승만도 한민당도 아닌, 무소속 후보들에 대한 지지율이 40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이를 종합해 보면 박명림 씨가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1945년이었다면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더 나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엔 일부는 체념 … 일부는 더 장기적인 모색을 위해 참여”했다. 좌파의 ‘좌선회’는 때를 놓친 것이었다.

단독선거 반대운동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전술도 사람들을 수동화시키는 데 한몫 했다. 그들은 ‘남한 단독정부수립 반대 = 북한 정권 지지’라는 등식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 UN한위 반대 남조선총파업위원회가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보낸 요구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식으로 정권을 인민에게 이양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통일을 바라지만, 미·소 양국으로부터 모두 독립적이고자 하는 광범한 사람들에게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슬로건이었다.

당시 남한 좌파의 ‘좌선회’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련과 북한은 단독선거 저지 투쟁의 ‘격렬함’이 남한의 정통성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데 이용했지만, 정작 자신들 역시 통일정부에 대한 진지한 협상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사태의 전개는 패배가 필연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조선 민중의 힘만으로는 제국주의 질서를 극복하는 게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적인 맥락에서 보면 다른 대안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홉스봄은 “세계혁명의 시대에 서반구 밖 세계에서 혁명, 내전, 외국의 점령에 대한 저항과 그러한 점령으로부터의 해방 … 을 겪어 보지 않은 국가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고 했다.

크리스 하먼이 지적하듯이, “1944∼45년에 영국과 미국의 국내 분위기는 지배계급이 대대적인 탄압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국이 그리스에서 벌인 군사행동은 영국과 미국에 모두 심각한 정치적 폭풍을 몰고 왔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집트 주둔 영국군 부대들에서 일어난 항명 사건들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혁명운동이 일어났을 경우 그것이 한 나라에서만 국한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처칠은 그리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일어날까 봐 무척 우려했다.”

다음에는 미·소도 아닌 제3의 대안으로 ‘중간파-중도파적 길’은 정말로 가능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