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침체와 문재인 정부, 그리고 노동자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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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동자 투쟁에 영향을 미칠 몇 가지 주요 요인들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 침체다. 경제 침체의 구체적 형태는 각국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2008년 시작된 세계경제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데, 나라마다 전개 양상이 달랐다.
한국 경제는 이 침체의 초기 국면에서는 대중국 수출 덕분에 일정한 완충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격심한 공황에 빠진 나라들처럼 노동자 투쟁의 수위가 높지 않았다. 반면 그리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와 내핍 강요 속에서 노동자들이 수십 차례 하루 총파업을 하고, 심각한 정치 위기로 좌파적 개혁주의 (시리자) 정부가 등장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로 한국 경제가 더는 이런 행운을 누리기 어렵게 됐다. 이에 더해, 트럼프 등장으로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과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불안정이 증대하고 있다.
그래서 기업들은 임금 삭감과 고용 축소 등으로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는 압박을 크게 받고 있다. 이미 많은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과 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인데도, 기업주들은 어떻게든 노동자들에게 경제 침체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한다.
이미 2015~16년 노동자 투쟁에는 이런 양상이 반영됐다. 지난해 근로손실일수가 1997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세 부문의 투쟁이 주된 영향을 미쳤다.
첫째, 현대차·기아차 노동자들이 비록 제한된 방식이기는 해도 각각 20여 차례 파업을 한 것이다. 쟁점은 임금 불만이었다. 현대차·기아차 노동자의 임금은 지난 2년 동안 3퍼센트가량 떨어졌다.
둘째, 공공부문 노동자들이(그리고 은행과 보건의료 노동자들도)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을 한 것이다. 철도 노동자들은 74일간이나 파업을 했다. 이것은 2014년 방만경영 해소와 2015년 임금피크제 도입에 이은 공격에 맞선 것으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셋째, 조선업 위기로 구조조정에 직면한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구조조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세계경제 침체가 장기화하고 대중국 수출에 의한 완충효과도 줄어들면서 전에는 그럭저럭 보호받던 정규직 조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위협받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넘기기 위한 구조조정과 임금 공격 등은 지속될 것이다.
문재인의 “사람 중심 경제”는 속빈 강정
경제 침체 중의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흔히 정치적 요인들이다. 순전히 가능성으로만 보자면,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는 노동자 투쟁의 전개 양상에 두 가지 효과를 낼 수 있다.
하나는 변화된 정치 상황을 이용해 투쟁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박근혜가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은 이런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은 지난해 봄 총선 결과로 드러난 반박근혜 정서와 지난해 겨울 박근혜 퇴진운동의 주요 축이었다. 비록 노동자들이 고유의 경제적 힘을 동원해(특히 파업) 투쟁하지는 않았지만, 퇴진 운동의 주요 구성부분으로서 노동자들은 값진 승리를 거두며 자신감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새 정부가 개선을 가져다 주기를 기대하면서 상층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불만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집권 초기인 현재 상황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난 9년이 너무 악몽 같았던 나머지 많은 사람들은 상징적인 조처나 그저 위안의 말에도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그가 봉착할 여러 난관이 있지만, 특히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 침체는 결코 만만한 조건이 아니다.
이에 문재인은 “사람 중심 경제”를 비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속빈 강정이다. “공정과 혁신, 통합의 길’이 부제인 이 경제 비전은 기업 활동과 정의가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완전히 비현실적인 공상이다.
“사람 중심”은 또한 “사람에게 투자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살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문재인 주장의 근간에는 전과 달리 새로운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접근에 경제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누구나 소득에 관계없이 교육 등에 접근할 기회를 국가가 제공하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제의 선순환을 이루고 불평등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숙련노동일수록 고도의 생산수단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또, 신기술이 개발되면 고용이 늘기보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문재인식 경제 비전으로는 노동에 대한 기계설비류의 투자 비율이 높아져 고용이 줄어드는 문제와 이윤율 위기로 나아가는 경향을 결코 막을 수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스타트업이 혁신과 일자리 창출을 주도하고 있[다]”(〈일자리위원회 보고서〉)는 주장도 과장이다. ‘스타트업’은 신생 벤처중소기업을 뜻하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벤처와 지식기반경제 열풍이 불었다가 오래지 않아 거품처럼 사라졌다.
한 나라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흔히 지배자들은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며 다른 나라 경제모델로 돌려막기를 하려 한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1970~80년대에 먼저 경제 위기에 빠진 영국 등지의 개혁주의자들이 아직 건재해 보이던 독일과 일본 경제모델에 눈을 돌리면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알 듯이 1990년대 독일과 일본 경제도 위기를 피할 수 없었고, 그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자 노동조건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유연안정성”,
청와대 정책실장은“대기업 노동자 임금 양보론”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이용섭은 《성장과 행복의 동행·이용섭의 한국경제 바로세우기》(2013)에서 경제가 성장과 분배 두 바퀴로 굴러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독일을 성공 사례로 제시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의 관심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재벌개혁(경제력 집중 완화와 불공정 행위 규제)과 중소기업 지원에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재벌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며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용섭은 일자리 정책의 핵심도 중소기업 지원이라고 한다. 노동자를 위해서는 재교육·재취업 서비스를 지원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시장에서 고용과 해고를 유연하게” 하기 위한 조처다.
이용섭은 “높은 노동유연성”을 강조하면서 그와 함께 “소득의 안정성, 적극적인 고용서비스”를 조합하는 것이 “황금 삼각형 모델”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연안정성”은 노동자들에게 결코 ‘황금’ 모델이 아니다. 박근혜가 고용률 70퍼센트와 노동개혁의 전거로 삼은 네덜란드 모델은 노무현 정부에 의해 “유연안정성”을 보장하는 좋은 모델인 것처럼 처음 소개됐다. 하지만 박근혜 덕분에 이제 많은 노동자들이 그 본질을 잘 알게 됐다.
이용섭이 성공 사례로 제시한 독일에서도 노동자들의 처지는 지난 20여 년 동안 더 나빠졌다. 네덜란드 바세나르 협약이나 독일 하르츠 개혁은 모두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강요하고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을 확대한 노동개악이었을 뿐이다.
청와대 정책실장 장하성은 “공정”과 “평등”을 들먹이며 노골적으로 대기업 노동자 양보론을 펴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 자본주의》(2014)와 《왜 분노해야 하는가》(2015)에서 “정의로운 경제”를 위해 “공정한 분배”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공정한 분배”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부자와 빈자 사이의 부의 분배가 아니다. 그는 복지 예산 확대가 현실성이 없다고 늘어놓은 뒤, “복지를 통한 재분배”보다 “분배의 불평등”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장하성이 말하는 “분배의 불평등”은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불평등”을 말하는 것이다.
장하성은 이 “분배 불평등”의 해결 방안 하나로 “대기업 노동자 임금의 일부를 중소기업 노동자 분배의 몫으로 분배”하는 것을 제시한다. 그는 노동계가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분 일부를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이전하는 방식”을 고민해 보라고도 했다.
장하성은 부의 불평등보다 소득 불평등이, 그중에서도 임금 불평등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히 해결돼야 할 불평등이라고 강변한다. 소득 불평등보다 부의 불평등이 비할 바 없이 더 크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뻔한 목적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시선을 임금 격차 쪽으로 유인함으로써, 불평등 완화의 재원을 자본가들에게 요구하지 않고 노동자들끼리 나누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문재인 개혁의 동반자가 돼야 하는가?
“사람 중심 경제”라는 경제 비전 공약을 보든, 일자리위원회와 청와대 정책실 책임자들의 지론을 보든 오랫동안 불만이 누적된 노동자들의 바람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재인 정부는 장기화되고 있는 세계경제 침체 속에서 노동자들, 특히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 내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삼는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내내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한목소리로 주장했듯이, 정규직 노동조건이 악화되면 비정규직의 처지는 더 나빠지게 마련이다. 국제노동기구(ILO)도 이것이 정규직 보호 조항을 약화시킨 나라들의 한결같은 경험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비교적 명백하다 해서 노동자 투쟁이 자동으로 촉진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 노동운동의 경험을 보면, 우파 정부가 추진하다가 실패한 노동개악 정책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해 관철시키는 경우를 적잖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6월에 취임한 영국의 히쓰 보수당 정부는 고소득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하는 ‘소득정책’을 추진하다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1974년 퇴진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노동당 정부도 다시금 ‘소득정책’을 내놓았다. ‘고소득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해야 저임금 노동자들이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논리로 포장했을 뿐, 보수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동조합 좌파 지도자들이 노동당과 “사회계약(협약)”을 맺어 이를 지지했다.
그러자 전투적 노동운동가들도 노동당의 장단에 맞춰 춤을 췄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대부분 침묵했다. 이를 거슬러 투쟁했던 선원들과 소방수들은 고립 속에 패배했다. 임금 억제가 계속되자 1978년 노동자들의 분노는 마침내 “불만의 겨울”로 폭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환멸을 낳은 노동당의 배신은 대중의 환멸로 1979년 대처 집권을 낳았다.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은 지배계급을 위한 강력한 충격 흡수장치 구실을 할 수 있다. 정부가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사회적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할 때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자 투쟁을 자제시키거나 어느 수준 이하로 통제하면서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에 협력을 제공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빈부격차해소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는 ‘강하지만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노조의 미덕으로 강조한다. “무협영화나 깡패 세계”가 그렇듯이 “힘을 쓰지 않는” 것이 “고수의 경지”라는 것이다. 그는 북유럽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극도로 자제”한다며 이는 “항상 수출경쟁력에 신경을 쓰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류의 주장은 노무현의 실패를 노동자 투쟁 탓으로 돌리는 적반하장식 책임 전가와 함께 노동조합 운동을 향해 강력히 촉구하는 바가 있다. 노동조합이 걸핏하면 투쟁에 나서기를 그만두고 정부와 기업의 “협력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친노 인사 유시민은 “집권 초기 화물연대 파업[부터] 분위기가 엉켰고 전교조의 네이스 반대 투쟁을 거쳐서 싸움이 끝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악몽 같다”고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집권하면서, “사회적 힘의 균형에서 노동계보다 경제계가 더 세다”며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집권한 정부가 너무도 당연한 노동기본권과 학생 인권 보호 요구를 악몽으로 여겼다는 것 자체가 그 정부의 본질을 보여 준다.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겠다던 노무현은 취임 3개월 만에 ‘힘센’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를 비난했다. 그리고 “손배 가압류 남용을 방지”하겠다더니 철도파업에 97억 원 손배를 청구했다.
노사관계 로드맵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사용자 대항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을 제약했다.
“비정규직 눈물을 닦아 주겠다”더니 비정규직 사용 사유를 제한하라는 인권위 권고마저 수용하지 않았다.
노무현에 대한 기대가 금세 환멸로 바뀐 것은 당연했다.
문재인 정부가 취임하자 노동운동 안팎에서 ‘이번에는 정부를 투쟁으로 압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금세 널리 퍼졌다. 노동이 ‘개혁의 동반자’가 돼야 한다고도 한다. 노동조합이 사회적 대화 파트너로서 인정받고 그에 합당한 협력도 제공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대립각만 세우면 얻어 낼 수 있는 것조차 얻을 수 없다며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사용했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라는 모토를 다시 들고 돌아온 문재인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사회통합’이 무엇일지는 뻔하다. 그것은 경제에 대한 “책임감”(이정우 교수의 표현대로)일 것이고, 그 구체적 형태는 노동자들의 양보일 것이다. 정부는 노동운동 내 대기업 정규직 양보론이 상당히 퍼져 있는 약점을 파고들며,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려 할 것이다.
재벌개혁이나 경제 민주화 같은 문재인 정부의 ‘개혁’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종속시키려 한다면 경제 침체 시기 노동자들의 조건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것은 노동자들을 다시금 불필요한 환멸과 사기 저하로 몰고 갈 뿐이다.
노동운동은 왼쪽 자리를 확고히 지키고, 오른쪽을 향해 불필요하게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괜한 신기루와 허상을 좇거나 만들어 내지 말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