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개정 협상이 의미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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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한미FTA 공동위원회가 단 하나의 합의도 없이 첫 회의를 마쳤다. 그럼에도 이것은 한미FTA 개정 협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 할 수 있다.
트럼프는 한미FTA로 인해 일자리 9만 5천 개가 사라졌고 대(對)한국 무역수지 적자가 거의 두 배로 확대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한국 무역적자 해소가 한미FTA의 목적임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상무장관 윌버 로스도 6월 30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무역 불균형이 가장 큰 분야는 자동차 무역이다. 미국 수출업체에 상당한 비관세 장벽이 있다” 하고 지적했다.
2012년 3월 한미FTA 협정이 발효된 후 지난 5년간 한국의 대미 상품수지 흑자는 1백16억 달러에서 2백33억 달러(미국 상무부 통계로는 2백77억 달러)로 두 배가 됐다. 그런데 한국의 대미 서비스 수지는 2011년 1백10억 달러 적자에서 2015년 1백41억 달러 적자로 적자폭이 확대됐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한국의 대미 직접투자가 미국의 대한국 직접투자보다 더 많았다.
한국 정부는 한미 간 무역에서 한 분야에서는 손해가 있을지라도 다른 부문에서는 이득이 있는 ‘이익 균형’ 상태에 있으며, 상품수지의 흑자폭 확대도 과연 한미FTA 때문인지 따져 보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미 간 무역 불균형 문제는 미국산 셰일가스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복안도 갖고 있는 듯하다.
한미FTA 협정이 노동자 대중에게 순전한 환상만 조장했다는 사실은 한미FTA가 체결되면 일자리가 34만 개 생겨날 것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거짓말로 잘 드러났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으로 이득을 본 쪽은 있었다. 한국의 자동차, 휴대폰,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 수익을 봤다.
미국 자본가들도 이익을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2016년 6월 미국 무역위원회(USITC)가 한미FTA 영향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미국의 상품수지 적자는 한미FTA를 체결하지 않았을 때보다 크게 줄어들었다며 한미FTA가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완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 로열티 수입을 얻는 퀄컴이나 오리지널 제품을 갖고 있는 미국 제약회사들은 한미FTA로 많은 이득을 봤고, 서비스 부문의 다른 기업들도 이득을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미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많은 외국계 기업들이 한미FTA 협정으로 관세가 사라지고 통관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각종 규제가 완화됐고 수혜를 입었을 것이다.
자유무역협정
앞으로 벌어질 한미FTA 개정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 정부는 국익을 앞세워 치열한 전투를 벌일 것이며, 많은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자신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협상 과정에 영향력을 미칠 로비를 벌일 것이다.
그런데 한미FTA가 체결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협상에서도 양국 노동자 대중의 이익은 뒷전으로 밀려날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폐해는 장막 뒤에서 양국 협상 대표단이 합의한 내용이 실제로 적용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한미FTA 발효 이후 5년간의 과정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한미FTA는 공공성이 강한 사회서비스 분야의 민영화와 상업화를 초래하는 협정”이라고 지적했는데, 실제로 한미FTA라는 환경에서 병원 영리자회사 허용, 경제자유구역 영리병원 규제완화, 신의료기술과 의약품 규제완화, 실손의료보험 규제 완화 등과 같은 정책들이 실시됐다.
한미FTA가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줬다는 점은 철도 부문에서 잘 보여 준다. 한미FTA의 부속서에 의하면, “한국철도공사만이 2005년 6월 30일 이전에 건설된 철도 노선의 운송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가 건설한 철도라 하더라도 2005년 6월 30일 이후에 건설된 노선은 민간이 운영할 수 있게 된 셈이고 역진방지(래칫) 조항 때문에 이를 되돌릴 수 없게 됐다. 박근혜 정부는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해 철도 민영화의 길로 나아가면서, 이에 반대하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한미FTA 때문에 (민영화를 막는 법의) 입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한미FTA는 정부의 자발적 민영화를 추진하는 데 힘을 실어 준 요소였다.
또 한미FTA의 “상업적 고려” 조항에 따르면 민간독점 기업들이 다른 기업들과 비슷한 이윤을 추구할 수 있게 해 공공요금 인상을 부추길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지하철 9호선의 요금 인상이다. 과거에는 지하철 요금 결정 권한이 지자체장에게 있었고 실제 운영 손실에 대한 보상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미FTA로 이런 보상이 불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민간독점 기업이 일정한 수익을 남기는 요금을 인상할 수 있게 됐다.
한미FTA는 미국이 한국에, 또는 한국이 미국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불공정 무역협정이 아니라 양국 기업들에게 유리한 기업 친화적인 자유무역 협정이었다. 그렇다고 자유무역으로 손해를 보는 국내 기업들을 보호하려는 보호무역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또 좌파 일각에서 주장하는 민중무역협정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태·민주·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비자본주의적 무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상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를 떠올리게 하는 김현종
문재인 정부는 이 협상을 총괄하는 통상교섭본부장에 노무현 정부 때 한미FTA 협상을 책임졌던 바로 그 김현종을 임명했다. 그는 한미FTA가 시작되기도 전에 ‘4대 선결조건’을 수용했고, 한미FTA 협상에서는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역진 방지 등 독소조항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공공서비스의 악화보다는 대기업의 이익을 우선했다.
김현종은 미국 자본가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도 애썼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보면, 한국 정부의 약가 적정화 방안 등을 미리 미국에 알리고, 미국 측에 유익한 것으로 평가되는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이렇게 자본가들을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미FTA 협상이 끝난 뒤 삼성전자 사장으로 영전했다가 한미FTA 개정 협상에 다시 나타났으니 그를 보면 기시감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