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꽃 필 세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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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웃음”이 하나의 유행이 됐다. 웃음 치료가 등장했고, 웃음 학원도 생겼다. 웃음이 건강의 중요한 요소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얘기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웃으면 좋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이 세상이 가진 절망의 무게다.
이 신문이 읽힐 2주 동안에만도 제3세계에서 5만여 명이 다섯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죽을 것이다.
아이가 치료비가 1천 원도 들지 않는 질병이나 기아로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면,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떨까? 그 어머니가 하루에 10∼20초 정도는 웃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는 나일강이 범람하듯 눈물이 넘쳐흐를 것이다. 1년에 어린이 1천만 명이 그 1천 원이 없어 죽는다.
부유한 국가들은 이 비극을 해결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UN은 빈곤구호비 목표치를 각국 GDP의 0.7퍼센트로 정했다. 그러나 현재 OECD 평균은 0.41퍼센트고, 미국은 0.15퍼센트만 구호비로 쓰고 있다.
그들은 인색할 뿐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하다! 강대국 정부들과 세계은행, IMF 같은 자본주의 세계 기구, 다국적 기업들은 제3세계에 수십 년 동안 외채 상환을 강요해 왔다. 1980년대에 제3세계가 갚은 이자는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세계 모든 아이들에게 중등교육까지 받게 해 주고도 4분의 3이나 남는 액수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를 해결책으로 택했다. 그것은 위기로 생긴 모든 절망을 노동자 민중이 짊어지게 하려는 계획이다. 그것은 복지삭감, 노동 유연화, 대량해고를 뜻한다.
어떤 노동자는 어설픈 윙크를 하며 생긋 웃는 자기 아기를 보며 한순간 행복한 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해고당하기라도 하면 그 아이가 아플 때 제대로 된 약 하나 사주지 못하는 “매정한” 부모가 되지 않을지 밤새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 통일중공업에서 한 부부가 동시에 해고당했다. 그 부부 노동자는 지난 20년 동안 배고픔에 지쳐 손을 입에 문 채 잠든 딸을 두고서 자주 야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냉혹한 자본주의 기업은 그들에게 해고통지서를 때렸다.
가족 생계가 막막해지자 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나 학교 그만두고 돈 벌러 가야 되는 거 아니야?” 그 날 그 가족의 집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을까?
많은 대학생들은 게시판 벽보처럼 부모님의 온몸에 붙은 파스와 깊은 주름살을 보며 엄청 오른 등록금 통지서를 내밀기가 죄송스럽기만 하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도 거의 없고, 있어도 조건이 아주 나쁘다. 그 대학생들은 심장 깊숙한 곳에 바늘을 넣은 듯 항상 아픔을 간직하고 산다.
그 사람이 청년실업자가 된다면 그 바늘의 크기는 더 커질 것이다.
대학생인 내 친구는 코미디 프로 ‘웃찾사’ 팬이다. 그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웃을 일이 없어. 그래도 그거라도 보면 웃게 돼”
노숙인들에게도 한때 웃음꽃 피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그 단어를 잊어버렸다.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 문헌준 대표는 노숙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둔기로 맞은 것처럼 정신이 어리해져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나는 어린이 그룹 칠공주의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의 “아주 작은 행복도 팝콘처럼 부풀”길 절실히 바란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거대한 절망을 강요한다.
그러나 1999년 시애틀 시위로 등장한 반자본주의 운동은 계속 활기를 더해가며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을 찾아가고 있다. 지금 이 운동에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보편적 슬로건이 됐다. 자본주의 다음의 삶은 중요 쟁점 중 하나다.
올해에도 11월 부산에서는 APEC, 7월 스코틀랜드에서는 G8에 저항하는 시위와 대안을 위한 포럼들이 열린다.
이 운동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펼친 저항은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이 희망의 씨앗들을 전 세계에 뿌릴 수 있다. 이 씨앗은 웃음꽃이 만발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