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재건공산당 리폰다치오네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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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읽기 전에 “이탈리아 총선: 중도좌파가 버림받으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득을 보다”를 읽으시오.
추악한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부활하고 인종차별적 우익이 성장한 이탈리아 총선 결과를 보면 좌파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이탈리아에는 강력한 극좌파가 존재했다. ‘리폰다치오네 코무니스타’(이하 재건공산당)가 그것이다.
1991년 12월 창당한 재건공산당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전 세계를 휩쓴 반자본주의·반전 운동 속에서 크게 성장했다.
2001년 7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 반대 시위도 그 운동의 일부였다. 이때 23세의 시위 참가자 카를로 줄리아니가 경찰의 발포로 살해됐다. 이에 항의하는 운동에서 재건공산당은 결정적 구실을 했다. 재건공산당의 호소에 응답해 30만 명이 제노바로 운집했고 전국적인 하루 총파업도 벌어졌다.
이 운동 덕분에 2001년 여름 이탈리아 사회는 좌경화했다. 좌경화 물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2001년 11월 당시 이탈리아 총리 베를루스코니는 (9·11 보복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에 연대하는 집회를 열자고 호소하며 대중 매체를 총동원했다. 결국 3만 명이 그 집회에 모였다. 반면, 같은 날 로마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는 15만 명이 참가했다. 재건공산당은 반전 운동에서도 큰 구실을 했다.
재건공산당은 한때 당원이 8만 명이었고 〈리베라치오네〉(해방)이라는 이름의 일간지를 발행했다.
재건공산당의 리더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혁명을 주장했다.(물론 그조차 모호한 구석이 많았고 실천은 훨씬 더 모호했다.)
재건공산당은 신자유주의에 환멸을 느낀 노동계급 유권자 일부의 주목을 받았다. 재건공산당은 200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185만 표(6.1퍼센트)를 득표했다.
그러나 2006년 재건공산당은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중도 좌파 정당인 민주좌파당 주도의 ‘올리브나무 동맹’과 선거 연합을 맺고, 연립 정부에도 참여한 것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그 덕분에 재건공산당은 득표도 많이 하고 장관 자리도 얻었다. 중도계 세력과의 연합이 선거에서는 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에는 큰 해악을 끼쳤다.
2006년 총선에서 승리해 등장한 로마노 프로디의 중도 좌파 정부는 전임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시행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고, 아프가니스탄과 레바논에 이탈리아군을 파병했다.
재건공산당은 연립 정부의 유지를 중시했고, 그래서 정부 정책에 찬성했다. 심지어 파병에 반대한 의원을 출당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디 정부는 집권 2년 만인 2008년에 무너졌다. 베를루스코니가 다시 총리가 됐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이탈리아 반전 운동은 사기 저하에 빠졌다.
재건공산당은 프로디 정부와 함께 몰락했다. 이제 재건공산당은 의미 없는 세력이 됐고, 2007~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정치 양극화의 수혜는 오성운동이 가져갔다.
재건공산당의 흥망성쇠는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100년 전 폴란드 출신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한 다음 지적을 꼭 기억해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위해 어느 직책을 맡아야 한다면 그에 따르는 위험이나 어려움을 회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일반으로 정부 부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 정당에게는 활동 무대가 될 수 없다.
“부르주아 정부의 성격은 정부 각료 개인들의 성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서 그 정부가 수행하는 유기적 기능에 달려 있다. … 계급 지배가 지속되는 한 부르주아 정부는 사회주의 정부로 변모할 수 없다.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장관으로 바뀔 뿐이다.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가 입각하는 것은 생각과 달리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국가를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가 사회주의 당을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