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노동자 연대〉 구독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하로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전면전은 당시의 어느 누구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1949년 들어 38선 상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사실, ‘누가 먼저 침공했는가' 하는 물음은 전쟁의 재앙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씌울 것인가 하는 사후적 물음일 뿐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각각의 통일 전쟁을 꿈꾸고 있었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타도하려 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민주기지론'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국토완정론'을 주장하면서, ‘혁명의 확산'을 선동했다.
1949년 9월에는 ‘아성공격'으로 불리운 전면 봉기를 남한 내 빨치산에게 지시했다. 이 지침은 남한 민중이 얼마나 ‘통일'을 바라고 있는지 스탈린에게 과시한 효과는 있었겠지만, 남한에 남아 있는 마지막 자생적 좌파를 절멸케 했다.
많은 좌파 학자들은 8·15 직후 민중의 자생적 사회변혁 운동과 1950년 6월의 전쟁을 동일한 연속선 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전자는 전쟁 시작 전이나 후나 주요 변수인 적이 결코 없었다.
북한 정권의 무력통일 방침은 남한 민중운동의 독자적 발전과는 궤적을 달리하고 있었다. 소련공산당 내부 비밀 자료를 봐도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1948년 두 분단국가의 수립 이후 김일성[은] … 당시 존재했던 남한에서의 민주적 운동의 광범한 발전을 통한 평화통일 … 가능성에 대한 연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군사적 수단에 의하여 나라를 통일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이승만도 이에 지지 않았다. 그의 북진통일론은 말뿐으로 그친 위협이 아니었다. 전쟁 전 최악의 전투로 기록될 1949년 8월의 전투에서 남한군은 점령하고 있던 북측 고지를 빼앗겼다. 그러자 이승만은 즉각적인 반격으로 철원을 공격하려 했다. 이 공격은 미국의 무마로 저지됐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이 조치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주한미군사고문단 로버츠 장군의 진술을 보면, 당시 38선 충돌의 많은 경우가 “매번 남한의 소부대가 38도선 북쪽을 돌출적으로 침범한 탓에 일어났다.”
남과 북 모두 상대방의 침공을 내심 원했다. 그래야 그것을 빌미로 ‘합법적'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고, 승리를 가능케 할 자신의 주인들 ― 미국과 소련 ― 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커밍스가 말했듯이, “1950년에 양측의 논리는 누가 멍청하게 먼저 움직일지 지켜보는 것이었다.”
북한이 먼저 지옥문을 열었다. 북한은 처음에 급속히 진격했다. 그러나 초기의 부분적 작전 실패와 미군의 공중공격 때문에 진격 속도가 계획보다 늦춰졌다.
북한의 남한 점령을 모종의 해방전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남한 민중의 적지 않은 수가 북한의 점령에 수동적 지지를 보낸 것이 사실이다. 특히 빈농층에서 그랬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 초기에 반봉건·민족해방 전쟁의 성격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빛이 바래거나 부차적 의미만 가진다.
첫째 문제는 북한 정권에 대한 남한 민중의 태도와 북한이 남한 점령을 통해 이식하려 했던 개혁의 내용이다. 북한은 점령지에서 자신의 체제를 그대로 복사해 내려 했다.
상당수 남한 민중이 북한 인민군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증언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 정권 자체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라기보다는 이승만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전쟁 직전 5월 총선거에서 참패해 정권의 존립 자체를 걱정할 만큼 민중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 진주에 대한 남한 민중의 더 주된 반응은 방관이거나 공포감이었다. ‘노동계급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는데도 서울의 노동계급은 대거 수도를 떠나거나 직장을 이탈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밀집한 영등포지구에 대한 전평의 보고를 보면 “고려방직, 제일방직, 경성방직을 포함한 섬유산업 종사 노동자는 서울 점령 전에는 1만 1천7백22명이었으나 8월 9일 현재 3천2백82명밖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북한 인민군이 계속 남진하면서 더욱 확대됐다.
마이클 왈저는 “베트남과는 대조적으로 남한에서 반란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와다 하루키도 “거기서 남로당원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해방전쟁'에 대한 남한 민중의 수동성을 무엇보다 분명히 확인해 주는 것은 김일성 자신의 발언이다. 그는 “우리가 낙동강 계선까지 나아갔으나 남조선에서는 폭동 하나 일어나지 않았”고, “만일 부산에서 노동자들이 몇 천 명 일어나서 시위만 하였더라도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인민위원회를 ‘재건'했다. 많은 지역의 간부들은 지방 토착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들의 혼합으로 이뤄졌으나 실권은 대부분 후자에게 있었다.
북한이 남한에서 맨 먼저 시행한 정책은 토지개혁이 아니라 ‘의용군 동원'이었다. 의용군 동원은 반(半)강제적이었다.
인민군 전선지구 경비사령부 후방사령관 리형종이 서울에서 내린 〈명령 제1호〉는 각 부대에서 필요한 일부 물품을 “자체에서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민중으로부터 물품 징발을 뜻했다.
이것은 해방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점령군의 모습이다.
‘해방전쟁론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토지개혁의 성과도 의심스럽다. 북한은 5∼20정보의 면적을 기준으로 “무상몰수 무상분여의 원리에 의거”해 남한 점령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김동춘이 말하듯이, “몰수한 토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이미 농지개혁을 추진하면서 토지를 분산시켜 놓아서 농민들이 5정보까지 경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몰수된 토지의 압도 다수도 지주가 아니라 자작농 소유였거나 일부 소작을 준 자영농의 것이었다. 이 점은 남한의 농지개혁으로 이미 지주계급이 급속히 소멸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게다가 높은 현물세는 토지개혁의 부분적 성과마저 상쇄하는 요인이 됐다.
전쟁 직전 남한의 농지개혁은 “남한 농민이 전쟁 발발 후 북한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북한 점령 하에 실시한 농지개혁 작업이 예상했던 만큼 남한 농민들을 이승만 정부로부터 완전히 이탈시키지 못한 배경이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 농림성 남반부 토지개혁지도위원회 보고서에서도 “농촌에서 토지개혁에 대한 분위기가 전혀 조성되고 있지 않았다”고 시인해야 했다.
그래서 북한이 시도한 남한 토지개혁에 대해 박명림은 “공식통계에서만의 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해방전쟁'을 주장했던 이승만 정부 역시 ‘자유'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전쟁 기간 남한 정부의 좌파 활동가와 민간인 학살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승만은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며 서울 시민을 속인 채 몰래 서울을 탈출했지만, 정작 남겨진 시민들을 ‘부역자' 취급했다. 그는 전쟁 발발 나흘 뒤쯤 〈긴급명령 1호〉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생존 목적의 소극적 부역'까지 처단하는 내용이었다.
남한군은 전쟁 초기 형편없이 붕괴했지만, 수개월 만에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김일성·모택동·스탈린의 예상과 달리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남한군과 미군이 반격에 나서 38선을 돌파해 북진했을 때의 상황도 남한의 상황과 비슷했다. 북한 민중의 일부는 남한군과 미군을 열렬히 환영했지만, 대다수 주민들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남한군이 나남과 청진으로 진격했을 때 일반 주민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북쪽으로 피난을 가버렸다. 북한 민중에게 남한군과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유엔군 점령 하의 평양을 방문한 남한 국회의원 이선교는 남한군과 우익에 대한 평양 시민들의 ‘환멸과 비애'를 말한 바 있다. “국군이 들어가서 공장 기타 창고에서 약탈을 하며 거기에 편승해 가지고 평양에 있던 악질도배들이 국군하고 같이 돌아다니면서 … 그 시가에 혼란이라는 것이 한정이 없”었다.
이승만은 전쟁을 기회로 독재정권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금까지 보아 왔듯이, 북한의 남한 점령이든 그 역이든 한국전쟁은 평범한 민중에게는 재앙일 뿐이었다. 남한 내 빨치산을 토벌했던 제5사단장 백선엽이 일반 농민들을 보고 말한 것은 한국전쟁 기간 중 민중의 반응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험한 세파를 겪은 이들이 얻은 지혜는 강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하는 데 뛰따르는 둘째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그것은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라는 당시 환경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과 지원을 애원했다. 슈티코프의 다음과 같은 말은 한국전쟁의 범위를 함축하고 있다. “김일성은 독자적으로 공격을 감행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공산주의자이고, 자제력을 갖춘 사람이며, 스탈린 동지의 명령은 자신에게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한국 전쟁의 성격을 다뤄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