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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평의회 논쟁 -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오늘날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범위와 내용이 급진적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현대 자본주의는 심각하게 비민주적인 체제이다. 금융시장과 다국적기업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전제적으로 지배한다.

홍세화 씨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갇혀 공공성과 사회적 권리를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된 시대는 권위주의 정권 시대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의회 등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도 진정한 의미의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는 우리 운동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들 중 하나다. 실제로, 우리의 운동 조직 방식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민주주의를 반영한다.

그러나, 운동이 다양한 만큼 민주주의의 내용과 형식을 둘러싼 불일치가 존재한다. 운동 안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 합의제와 다수결 원칙 등 민주주의가 무엇을 포함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자율주의 사상 지지자들은 학생회를 학생평의회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거를 기반한 대의민주주의가 그 성과 지점의 한계에 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성공회대 사회과학부 학생평의회 준비모임이 낸 ‘학생평의회에 대한 유쾌한 상상’).
그러나 자율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대의민주주의 속에서 다중의 자기 결정력[이] 교살”(조정환)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우리 운동의 대의제 민주주의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학생회를 학생평의회로 대체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평의회는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회적 격변기 ―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1918년 독일, 1936년 스페인, 1956년 헝가리 등 ― 에 등장했던 평의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평의회들이 압도 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반면, 자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평의회’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직접 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보다 반드시 더 민주적인 것도 아니다. ‘평의회’의 핵심 문제점은 선출되지 않은 개인들이 “직접 참여”의 이름으로 예산 등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불신”받고 있다고 성공회대 평의회론자들이 비판한 학생회는 여전히 절반이 넘는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 구성된다. 그렇게 선출된 학생회는 학생 총회 등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접목시키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표성’은 해당 단체의 사회적 기반을 뜻한다. 몇 십명짜리 단체가 70만 명의 조합원이 소속돼 있는 민주노총과 똑같은 대표성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자율주의자들은 또한 합의에 의한 결정을 요구한다. 물론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모두 합의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놓고 이견이 존재할 수 있고, 그럴 때는 과반수 투표로 결정해야 한다.

한두 사람이 막후공작에 의해 나머지 모두의 결정을 되돌릴 수 있고 필리버스터 식으로 한도 끝도 없이 붙들고 늘어져 아무런 행동도 조직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는 합의제가 더 민주적인가? 아니면, 최소한 대중을 대표하는 단체 대표들에 의한 과반수 투표가 더 민주적인가?

합의제는 노조나 다른 대중 단체들이 참가했을 때 아무런 대표성 ― 투표 등을 통해 ― 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은 운동의 전진에 해악적이다. 사실, 자율주의자들은 운동을 확대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다함께’가 주최한 2004년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조정환 씨는 설득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대화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 배우기 위해 대화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고 우리는 비슷한 목표를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 운동 안에는 전략·전술의 꽤 커다란 불일치가 존재한다.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인 문제를 실천적으로 다루는 데서 이런 불일치는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행진하되 논쟁과 설득은 불가피하다.

대화만 나누자는 것은 우리 운동을 단순히 말의 성찬에 머물게 할 위험성이 있다. ‘무엇을 해도 좋다’는 자율주의 지침은 대중의 자생성 ― “개인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연결망” ― 을 물신숭배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태도는 운동에 사실상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가령,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학생회는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학교측의 의무적인 영어 시험을 거부하라고 옳게 선동했다. 80명 중 70명의 신입생이 그 호소에 호응했다.

그러나 학교측이 압박을 가하자 사회과학부 학생회는 ‘각자 알아서 판단할 몫이다’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다중의 자기결정권”은 그것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사회 구조와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그런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결정하고 그 결정에 기초해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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