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이 악화하자:
안개에 휩싸인 북·미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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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의 네 번째 방북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비핵화가 충분히 진전되지 않았다는 점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폼페이오 방북을 취소한 더 큰 이유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과의 무역 관계가 해결된 후에” 폼페이오가 북한에 갈 것 같다고 했다. 북·미 관계를 미·중 제국주의 간 경쟁의 종속 변수로 보고 있음을 이토록 솔직하게 밝히는 미국 대통령은 처음 봤다.
트럼프 정부는 선(先) 비핵화를 요구하며 북한을 계속 압박해 왔다. 협상 테이블이 열렸는데도 대북 제재를 완화하기는커녕 외려 추가 제재 조처를 잇달아 강행했다.
북한은 추가적인 비핵화 조처 전에 종전선언을 하기를 원했던 듯하다. 종전선언은 실효성이 거의 없는 상징적 조처일 테지만, 이는 평화협정 협상의 개시 신호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는 6월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 약속을 벌써 머릿속에서 지운 것 같다. 북한이 먼저 핵·미사일 프로그램과 자산을 신고하고 미국이 그 신고를 검증한 후에, 미국도 반대급부를 내놓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서 1년 내에 비핵화하라고 북한을 채근했다.
미국의 선 비핵화 강요, 북한의 반발은 너무 낯익은 장면이다. 북핵 프로그램 신고와 검증 등 세부사항에서 튀어나온 견해차로 협상이 난항을 겪는 모습도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다.
북한의 양보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면서, 중단된 한·미 연합훈련을 재개하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8월 28일 미국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는 연합훈련을 계속 중단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명백한 대북 협박이다.
1993~1994년 북핵 위기 시기에 당시 중단된 한·미연합훈련이 1993년에 재개되자 긴장이 급격히 치솟은 바 있다. 이번에도 훈련이 재개되면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
물론 트럼프는 폼페이오 방북 취소로 협상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을 좀 더 지속할 듯하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데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 정세 등 트럼프가 대응할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시사했듯이, 무역전쟁을 비롯한 제국주의 간 갈등 때문에 한반도와 그 주변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그 영향을 받는 북·미 협상은 “느리고 험난한 과정”(미국 유엔대사의 표현)이 돼 있다. 일시적 긴장 완화는 있겠지만, 이것이 장기 지속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한동안 친여권 전문가와 언론들은 미국 주류 정치권 출신이 아닌 트럼프가 미국 주류 다수와 달리 “본의 아니게” 한반도 평화 체제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6월 북·미 정상회담 합의의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그런 기대가 점점 무색해지는 일이 더 빈번하게 벌어질 것 같다.
문재인의 화해·협력 정책은 어디로?
북·미 협상이 난항을 빚자, 문재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9월 남북 정상회담의 전망도 다소 불투명해졌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에 나서는 등 우향우를 계속하면서, 급격한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로서는 남북관계 발전이 더더욱 중요한 일일 테다. 남북관계 발전은 지지율이 더 떨어지지 않게 막으면서, 남북 화해·협력을 기대하는 노동조합 상층 지도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 연설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 진전의 부수적 효과가 아니다” 하고 강조했다. 남북 관계 발전으로 북·미 협상을 추동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거창한 말에 비해 실천은 보잘것없다.
4월 판문점 선언의 이행은 지지부진하다. 철도·도로 연결 등 공언한 바는 많으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대북제재 때문에 진전된 것이 거의 없다. 개성공단 재개는커녕, 겨우 직원 20~30명이 상주할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도 미국의 반대와 폼페이오 방북 취소의 여파로 개소식 날짜를 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가고 있다.
진보 측의 상당 부분은 이런 문제가 문재인이 미국 눈치를 보면서 끌려가는 탓이라고 여긴다. 물론 그런 점도 분명 있다.
그러나 동시에 문재인 정부의 선택이라는 측면도 엄연히 있다. 문재인은 임기 첫해 스스로 한미동맹을 “위대한 동맹”으로 만들자고 트럼프와 합의했다.
‘한반도는 우리가 주인’이라고 한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야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선 비핵화)에 보조를 맞춰 가며 남북 경협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는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조차 이 대목에서 미국이 안심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결정하면서 국방 예산을 올해보다 8.2퍼센트나 인상했다. 2008년 이래 가장 높은 비율의 군사비 증가다. 이것은 판문점 선언의 “군축” 약속을 무색하게 만들 뿐 아니라, 비핵화를 약속한 북한을 자극하는 조처이기도 하다.
그동안 남북관계를 비롯한 대외정책은 문재인 정부의 최대 강점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주변 정세의 불안정과 문재인 정부의 친미적 선택은 이 정부의 강점을 어느 순간 약점으로 바꿔 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