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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 중동 전쟁의 화근

이 글은 리영희 교수가 번역·출간한 《80년대 국제 정세와 한반도》(동광출판사, 1984년)에 실렸던 글이다. 최근 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리라 여겨진다.

전쟁 ― 그것도 기습 전쟁 ―을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끊임없이 영토 연합과 살륙을 일삼는 이스라엘은 오늘날 세계의 양심에 박힌 가시가 되었다. 구약성서와 전설을 이데올로기로 빚어 가지고, 서양 문명의 기형아, 나치에게서 받은 유태인 학살에 대한 동정심을 방패로 삼아 아랍 민족에 대한 지배와 학살을 감행해 온 지 30년이 넘는다. 이스라엘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시오니즘이다. 시오니즘의 희생자는 아랍 민족이고 그 중에서도 ‘유대 종교 국가주의’의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이 팔레스타인이다. 아리송한 종교적 비어(秘語)에 싸인 유대인 ‘선민’ 의식의 본질은 무엇이며, 팔레스타인 민족 국가의 말살 정책은 어떤 식으로 계속되어 왔는가? 중동에서 끊임없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세계적 전면전쟁의 잠재적 방화자로 인정받고 있는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국가, 그리고 그 집권 세력의 사상과 심리적 특징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중동 정세는 물론 유대인의 국제 정치상의 지위와 역할을 파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선택한 글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간되는 평론지 New Politics 편집인 드레이퍼(Hal Draper)의 The Origin of the Middle East Crisis(The Israel-Arab Reader Bantam Edition, pp. 287-300)이다.[리영희 교수의 편자 주]

시온주의의 이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시온주의(Zionism)의 이념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유대인은 세계 어느 곳에 어떤 상태로 어떻게 살고 있든 반드시 모여서 하나의 단일국가(생존권)를 구성해야 한다는 부족적·혈연공동체적·종교적 신비 교리다. 그들은, 그들을 배척하는 ‘반유대주의자’가 유대인에 대해 비난하는 말 그대로, 유대인은 세계 어느 곳에 있으나 불가불[결국] ‘이방인’이라고 스스로 주장한다. 이 점에서는 ‘반유대주의자’의 감각은 정확하다. 이것이 시온주의의 첫번째 요소다.

둘째는, 유대인은 어떤 한 ‘국가영토’ 속에 자신들의 ‘국가’를 재구성(재건)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좋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시온주의와는 달리 팔레스타인이 아니라도 어디든 하나의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면 된다고 믿는 ‘유대민족 영토주의’가 그들 일부에서는 있었다. 그러나 시온주의는 그것과는 엄격히 달라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 지구상에서 오직 팔레스타인 ― 을 점거하여 그 곳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의다. 그들이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고대의 유대인 부족국가의 땅(가나안)과 그 인접 지역을 뜻한다. 그 영토가 아니면 안 된다. 이것이 부족·혈연·종교 신비주의가 요구하는 것이다.

셋째로, 이 시온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세워진 유대인 국가에는 그 곳에 살고 싶어하는 유대인이 가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은 반드시 여기에 ‘이주’해서 사는 국가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가 이념이다. 시온주의 용어로 이 이주를 ‘유랑(피추방)자의 복귀적 집결’이라고 부른다. 이 이념에 의하면 다른 곳에 사는 유대인은 문자 그대로 영원히 ‘피추방자’의 삶을 사는 것이며, 따라서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이 사상의 신봉자들은 설득에 의한 귀환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물리적 협박도 불사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주를 망설이거나 거부하는 유대인에 대한 설득이 중상·비방과 협박으로까지 확대된 좋은 실례는, 이스라엘 건국 직후인 1950년대 초에 다비드 벤-구리온 수상이 미국 방문 중, ‘미국 시온주의 조직’ 지도자들이 미국 내 유대인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다며 그 지도자들을 ‘반역자’라고 매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스라엘과 세계 곳곳의 유대인 국가주의자들은 세계의 모든 유대인을 이스라엘 국가로 ‘복귀 집중’시키는 것을 자신의 숭고한 소명이라고 경건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소명을 위해서 신명을 바쳐온 것이다.

유대인 국가주의자들은 그들의 ‘특수민족’ 상태에 진저리가 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는 그만 그 멍에를 벗을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다름없는 민족이기를 바라며, 다른 나라들과 다름없는 국가를 갖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이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즉, 이스라엘은 날이 갈수록 다른 나라들과 다름없는 나라가 되어 갔다.

마이모니데스에서 스피노자에 이르는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 구현된, 유대 민족의 영광이었던 ‘유대적 인본주의’는 이 노골적인 유대인 국수주의 국가에서 오직 극소수에게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오늘의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됐고, 유대인 왕국인 미국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이스라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소수자가 대표하는 부분이다.

팔레스타인 침략의 역사적 단계

최근 레바논 거주 팔레스타인 양민 대량학살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국가의 파괴는 여러 단계를 거쳐서 진행됐다.

역사적으로 그 첫 단계는 시온주의 운동의 대두부터 제1차세계대전 종말까지다. 이 시기는 유대인이 외지로부터 더딘 속도로 팔레스타인에 이주하고 점차적으로 토지를 매입한 기간이다. 이 기간의 말기 무렵에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주민은 총 인구의 약 10퍼센트였다. 이주와 토지 매입이 아랍인이 거주하는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장기적 목표라는 쐐기의 한 모서리를 박는 것이라고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공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까닭에 별다른 저항에 직면하지도 않았다. 아랍인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은 1917년의 ‘밸포어 선언’이 계기가 됐다.

이 지역을 장악한 영국 제국주의는 이 시기에 제국주의적 지배력 유지를 위해 아랍 민족에게 유대민족을 맞붙임으로써 어부지리를 얻는 수법을 사용했다. 시온주의자들은 그 의도를 알고 기꺼이 영국 제국주의에 협력했다. 그들은 이 당시, 자기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배할 수는 없으므로 영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영국의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차라리 서로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는 한 쌍의 공범자 중 ‘똘마니’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이 때는 한편으로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민족 해방 운동이 태동한 시기였다. 이 운동은 영국으로부터(중동의 다른 지역에서는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할 모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아랍민족 해방 운동 지지자의 눈에는 유대인 국가주의가 그 본질 그대로, 다시 말해서 유럽 제국주의의 방조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이 영국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의 팽창을 위해서 했다 하더라도 그 악독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에는 하등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엄연한 사실은, 영국이 유대인 국가주의를 수단으로 이용하여 유대인 정착민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아랍 원주민과의 싸움을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랍 원주민에게는 유대인 정착민이 제국주의적 지배의 앞잡이로 비쳤다 하더라도 나무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이주민에 대한 아랍인의 공격이 때때로 발생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랍인들 사이에는 영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 동맹자로 눈앞에 나타난 자, 즉 자기들 땅에 침입한 시온주의자들에 대한 아랍민족 해방 운동의 물결이 처음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 바로 이것이 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는 전형적으로 비극적인 요소다― 이 같은 술렁임들은 아랍 세계의 진보적 세력들이 아직 허약하고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 겨우 시초 단계에 있던 까닭에, 전반적 아랍 민족 해방 운동에서 사회적·종교적 지향이 강한 역행적 성향을 띠고 나타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통적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음에는 차이가 없다.

세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시기 ― 이것이 가장 결정적 단계지만 ― 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운동의 개시이다. 처음에는 독일 내부에서 전개되어 제2차세계대전 확대에 따라 나치 점령 하의 나머지 유럽 지역에 확대되어 마침내 대량수용 및 학살로 끝나기까지의 기간이다. 종전 직후에 상당히 큰 규모의 소련 내 유대인 박해 운동이 일어남으로써 전쟁 기간 중에 일어난 사태에 박차를 가한 사실도 추가되어야 한다.

이 시기에 관해서는 너무도 많이 알려져 있어서 흔히들 더 알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근시안적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이 있다.

사실 목숨을 건진 유대인에게는 유럽은 연옥이었다 ― 그들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어느 곳으로든지, 하여간 도망을 가야 했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야수성의 역사에서도 가장 흉악한 것 중의 하나인 유대인 피난민의 이 환난은 전 세계의 모든 양식 있는 사람들의 동정을 선풍적으로 얻게 됐다. 세계의 이 동정심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에로의 탈출과 결부됐다.

거기까지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일이 있다. 그 소름끼치는 인간고와 전 세계의 뜨거운 동정에도 불구하고 서구 국가들 가운데서 이 유대 피난민들에게 문을 열어 준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시온주의 운동의 허상

이 몇 해 동안에 미국의 독립사회당 인사들은 히틀러주의의 광기 속에서 목숨을 부지한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미국의 문을 열어 주자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소위 ‘너그러운 나라’라는 거대한 미국에서, 말로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고 하는 그들 사이에 이 불쌍한 유대인들에게 자기 나라의 문을 열어 맞아들이라는 말은 거의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 명료하다. 이 호소에 앞장섰던 저명한 인권·자유 운동가인 모리스 에른스트 변호사의 말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즉, 시온주의 운동 지도자들이 그들의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이들 유대인 피난민들의 미국 입국을 거부하도록 정부와 언론에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고통받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시온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요구한 것이었다.

’백인 기독교 국가 미국’(White Christian America)이 얼마나 이 ‘해결 방식’에 인색했던가! 고작해야 10만, 20만의 이 가엾은 유대인 피난민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바란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나치의 잔악성에 가슴이 찢어졌다는 우리의 자유주의적 미국인은 개방적이지 못했다. 영국인도 마찬가지였다 ― 그들은 겨우 체면치레로 얼마쯤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다른 어느 백인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그 유대인 희생자들은 이 지구상에서 비자 없는 민족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섬세한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한 구실이 있었다. 그것은 시온주의자들이 끈질기게 그들에게 제공한 해결 노선, 즉 “그들은 오직 팔레스타인에만 가고 싶어한다”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 됐던 것이다.

에른스트 변호사가 말하는 이 설명이 어느 만큼이 진실이고 어느 만큼이 진실이 아니냐는 것을 놓고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유대인 피난민들이 정말 팔레스타인 이외의 다른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으려 했는지, 다른 나라들이 문을 열어 주어도 안 가려 했는지, 그것은 어느 나라도 실제로 문을 열어놓고 그들의 마음을 시험해 볼 기회를 주지 않았던 까닭에 따져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어쨌든 유대인 국가주의자들과, 그리고 ‘백인·앵글로 색슨계·신교도’(WASP) 엘리트들에 못지 않게 미국 사회에 가난한 유대인의 무리가 ‘범람’하는 것을 바라지 않던 그 밖의 ‘유력한’ 유대인들의 협조로 그들의 미국 이주의 문은 닫혔다.

처음에 팔레스타인만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로 요지부동하게 몰고 간 다음, 그 후에 마치 그들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나 있다는 듯이 다른 곳에 가겠느냐고 묻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나의 견해로는 이것이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저지른 가장 야비한 범죄 중의 하나다.

이 같은 방법을 통해서 히틀러 살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럽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몰려갔다. 첫째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그들의 존재로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시온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서 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집결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인즉 팔레스타인은 그 당시 영국 통치 하에 있었던 까닭에 실제로 개방돼 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시온주의에 찬성하여 뉴욕보다는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피난민들에게 훨씬 적절한 피난처라고 확신하는 많은 미국 내 유대인들의 막강한 재정적 지원을 얻은 시온주의자들이 규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문을 박차고 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여태까지 영국 제국주의와 똘마니 동반자였던 시온주의 운동은 영국 제국주의와 대립하게 됐다. 공범자의 길이 갈라진 것이다. 등 뒤에 닥친 공포에 쫓기고, 사방의 길이 막혀버린 유대인 피난민들은 시온주의자들이 반세기 전에 구상한 목표, 즉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국가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이용될 인간적 볼모가 됐다. 또한 그들에게는 상당한 세계적 동정심의 뒷받침이 있었다.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한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그 이웃 아랍인들이 할 말은 아주 간단했다 ― “히틀러의 유대인 근절 계획은 중대한 범죄다. 그렇다고 해서 하필 ‘우리’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땅을 내놓아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세계 전체의 문제이지 우리만의 문제일 수가 없지 않는가?” 나는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 보고 싶다.

시온주의의 영토 쟁취 과정

이 단계에 와서는,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탈취하려는 공언된 의도를 드디어 실천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1942년, 소위 ‘빌트모어 프로그램’ 구상으로 나타났다(그 때까지 시온주의자들은 사태를 얼버무리기 위해서 ‘유대인의 고향 땅’에 관해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 계획으로 그 동안 숨겨 두었던 ‘패’를 딱 까고 나오자 일부 시온주의자들 ― 내지는 적어도 스스로 시온주의자를 자처했던 사람들 ― 까지도 격분했다. 유대교 율사 유다 마그네스에 의해서 팔레스타인 유대인-아랍인 ‘복합국가안’이 제창된 것이 이 때이다. ‘유대인 국가’라는 시온주의 공식 계획에 대항해서 제창된 이 구상은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 평화스럽게 어울려 살 수 있는 국가 건설안인데 시온주의자들에 의해서 거부당했다. 그들은 “우리의 목표는 전 영토를 지배하는 것이다”라고 공언하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

그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해 보자. 강대국들(그 중에서도 미·영·소)의 일련의 속임수 외교 끝에 1947년, 유엔이 분할안을 가결했다. 팔레스타인 영토를 양분하여 한쪽에 유대인 국가, 다른 쪽에 아랍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게 하는 결의이다. 이 무렵에는 유대인 쪽으로 지정된 지역에는 실제로 유대인이 다수(60퍼센트 안팎)를 점하고 있던 터여서 그들은 민족자결권이 당연히 부여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순간부터 시온 국가주의 세력은 반동적 행적과 아랍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제거 작업을 개시했다. ‘중동 비극’의 새 무대가 여기서부터 열리게 된 것이다. 유대인에 대해서 감행된 히틀러의 범죄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지만 그것은 최근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범죄 중의 하나이다.

1948∼1949년 사이에 유대인 국가주의자들은 주변 아랍국가들(팔레스타인 아랍 민중이 아니라)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구실 삼아 일련의 입법 조치와 실력 행위로서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그 영내에서 추방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행위는 30년 동안 꾸준히 계속됐다. 유엔 결의 당시, 유대인 쪽에 지정된 땅에 있던 40퍼센트의 아랍 인구가 이스라엘 신국가 창립 때에는 10퍼센트 정도로 줄어 들었다. 아랍인들이 소유해 온 막대한 토지가 소위 ‘합법적’ 방법으로서 그들로부터 문자 그대로 갈취됐다. 1954년의 시점에서는 이스라엘 국내의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서 갈취한 토지에 정착한 상태였다.

유엔의 분할 결의로 창설된 팔레스타인 아랍인 국가는 실제로 건립될 사이도 없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휘말려, 전쟁이 끝났을 때는 그 영토의 5개 지역이 이스라엘에 강탈당한 채 영원히 반환되지 않았다. 그 일부인 서부 요르단 지역은 요르단 국가에 병합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아랍인의 팔레스타인 국가는 파괴되고 말았다. 어떤 현존하는 국가 ―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 의 파괴를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물론 반대해야 하지만, 서방 세계에서 번지고 있는 소위 이스라엘에 대한 파괴 위협만을 열심히 떠들어대는 사람들에 의해서 꾸며지고 있는, 이 같은 최근 역사의 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합법적 강도행위

이스라엘 내의 아랍인들로부터의 대규모 토지 강탈 행위는 한 민족 전체에 대한 약탈이었다. 그 방법과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전쟁 동안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살고 있던 마을을 떠난 아랍인은 ‘부재자’로 선고되고, 그의 토지는 시온주의 단체에 의해서 몰수됐다.

시온주의자들의 신화는 “그러한 사항에 해당하는 모든 아랍인이 외부로부터 온 아랍인 침공자들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떠났고 그들에 협조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전쟁이 휩쓸고 있는 땅에서 아랍 침공군이 두려워서 도피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잠시 이웃 마을로 피난을 갔다 하더라도, 그들은 무조건 ‘부재자’가 됐다.

국가 없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영국인에게서 도망쳐야 했고, 아랍 침공군에게서 도피해야 했을 뿐 아니라 시온주의 군대로부터도 도망쳐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데이르 야씬(Deir Yassin) 학살 사건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데이르 야씬은 팔레스타인의 한 아랍인 촌락이고, 그 주민들은 두드러지게 아랍 침공군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 1948년 이르군(Irgun : 유대인 국가주의 세력의 우파)군 1개 대대가 이 마을을 공격했다.

마을에는 무장한 사람도 없었고, 무기도 없었다. 이르군 부대는 순전히 폭력 행사의 목적을 가지고 이 마을을 습격, 남자·여자·어린이 할 것 없이 2백5십 명을 살해하고 떠났다. 시체 1백5십 구가 우물 속에 처박혀 있었고 90구는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이 학살 사건은 실제로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마을에 대해서도 한 본보기로 자행된 것이다.

이 비열한 행동은 우파 군대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이지만 시온주의 공식 군대인 하가나는 그 계획적 학살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이르군은 시온주의 운동의 격분이나 비웃음을 사기는커녕, 오히려 하가나의 환영을 받고 협력 관계로 받아들여졌다.(1982년 레바논 침략 전쟁의 내각 수상인 베긴이 바로 그 때의 이르군 지도자였다. 그는 1967년 이스라엘-아랍 제3차 전쟁 직전에 다얀 장군과 함께 이스라엘 각료로 발탁되어 입각했다.)

이 이르군은 준파시스트적 노선을 취하고 있었고, 곧 하가나 지도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따랐다. 제1차 전쟁이 끝나기 전에 벌써 하가나도 (유대인 국가주의의 좌파로서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이르군처럼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비무장·비공격적 아랍인 마을들에 대한 공격과 점거를 하기 시작했다

데이르 야씬 학살 사건 후부터는 유대인 군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팔레스타인들이 서로 다투어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서 이렇게 도망간 아랍인은 ‘부재자’로 규정되고,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각종 ‘법률’의 이름으로 그들의 토지는 몰수됐다. 이스라엘의 정당은 좌익이건 우익이건 모두 그 ‘법률적’ 강도 행위를 승인했다. 심지어 ‘거주하는 부재자’라는 법 규정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아랍계 시민으로 버젓이 거주하는데 다만 어떤 일정한 날짜에 거주지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법률적으로 ‘부재자’ 판정을 받고, 따라서 ‘합법적으로’ 토지를 박탈당할 수 있는 그런 경우이다.

이렇게 해서 강탈한 토지의 대부분이 키부츠로 넘겨졌다. 그 토지는 마파이(Mapai : 우파 사회민주주의를 지칭하는 계열)뿐 아니라, 이스라엘 아랍계 시민의 딱한 처지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공언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이끄는 마팜(Mapam : 좌파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세력)에게도 분양됐다.

중동 비극의 희생자들

국경 주변에 거주한 많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가자지구 또는 요르단 국가쪽으로 밀려 나갔으며, 그들이 되돌아오는 것이 발견되면 그 현장에서 ‘불법 침입자’로 사살됐다. 이 같은 수법은 그 많은 것 중의 몇 가지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엄청난 아랍 피난민 문제를 낳았다.

그들은 국가의 주변을 문자 그대로 증오심 ― 자신들이 만들어낸 증오심 ― 으로 둘러싸 놓았다. 그것은 국경선 너머로 자기 고향을 바라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자기들을 쫓아낸 자리에 수천 마일 먼 곳에서 시온주의자들이 데려온 생소한 사람들이 자기 땅을 경작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밥줄이 끊어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증오심이다.

그 외래인의 일부가, 유럽에서 어떤 제3자에 의해서 범해진 범죄 행위의 희생자인 유대인 피난민이라는 사실만으로 이 강도 행위가 정의로 탈바꿈될 수는 없다.

이런 말살 정책의 결과로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10퍼센트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 그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을 뿐더러 도망가지도 않았다 ― 은 점령당한 적국인들처럼 군사 통치 하에 놓이고 온갖 방법으로 차별당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혹인’이라고 불리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혹인들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아랍계 주민이 30년이나 참아온 식의 굴욕을 참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탈당하고 쫓겨난 아랍인들은 국경 지역(가령 가자 지대) 여러 곳에서 이집트의 지배하에서 처절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집트는 그들에게 도움이라고는 거의 주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볼모로 이용할 뿐이었다. 그들은 이집트 본토에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국경 지대에 처박아 둠으로써 그들의 궁핍과 증오심이 이스라엘의 목에 걸린 가시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한편, 이스라엘도 아랍 피난민 문제의 해결에는 낫세르 대통령만큼이나 무관심했다.

그런데 이 피난민들 중에서 자기 땅이나 집을 찾아가 보거나, 자기 땅을 경작하거나 소유물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서 몰래 국경선을 넘어 들어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경찰의 총알받이가 되어 목숨을 잃었고, 이스라엘측은 거꾸로 그런 몹쓸 짓을 하는 소위 ‘침범자’에 관해서 세계에 불만을 털어 놓았다. 소위 ‘침입자’들은 자기들한테서 이스라엘이 강탈한 재산을 파손하거나 곧장 그 강도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조직적·군사적 보복 행동에 호소했다. 30년 동안에 그들이 감행한 이 같은 군사적 보복 조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스라엘 통치자들은 자신의 범죄 행위의 결과로 발생된 문제거리에 대한 해결책을 군사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게 된 까닭에 점점 더 ‘예방전쟁’ 수법을 애용하게 됐다. 예방전쟁은 군국주의적·영토 확장주의적인 정신 상태에 있는 자들이 자행한 전통적이고도 고전적인 수법이다. 이스라엘의 무력 숭배자들도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무력 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여태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랍 국가들에게 감행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의 전쟁의 본질이다.

아랍 독재 정권의 담보로서의 이스라엘

아랍인 피난민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은 오랫동안 계속됐으나 이스라엘과 이집트, 그리고 그 밖의 아랍 국가들 어느 누구도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아랍측을 한때 대표했던 낫세르에게 곤궁에 처해 있는 아랍인 피난민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하나의 효과적 수단일 뿐이었다.

이스라엘측은 그들이 강탈한 토지를 아랍인들에게 되돌려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예멘과 모로코 등지에서 (벤-구리온이 그토록 데려오고 싶어했던 미국에서는 물론) 유대인 해외 거주자들을 대량으로 들여와 정착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수십만의 새로운 유대인 정착자에게 나누어 줄 땅은 넉넉히 있었지만 아랍인 피난민 문제의 협상에서는 분양해 줄 만한 땅은 한 뙈기도 없었다.

명심해 두어야 할 분명하고도 결정적 사실은, 시온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아랍인 한 사람의 재정착을 허용하면 한 사람의 해외 거주 유대인이 ‘복적 집결’할 땅이 없어짐을 뜻한다.

낫세르를 비롯한 아랍 국가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 내부 투쟁의 한 담보였다. 그것은 또한 국내적으로 아무런 진보적 정책이나 계획을 갖지 못하는 관료-군인 정권들의 내정 실패로부터 국민 대중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게 하는 데 유용한 재료였다. 이집트와 요르단에서는 국내의 피난민 문제의 압력은 피난민의 적개심을 밖으로 (이스라엘에) 향하게 하는 방법으로 완화하곤 했다.

이스라엘로서는 아무리 아랍인의 영토를 무력으로 병합해도 시온주의자의 목표로서의 ‘이스라엘의 땅’은 충분치 않은 셈이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땅’은 새로이 병합한 땅의 다른 저 쪽의 아랍인의 땅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묵시적으로 시인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세계 각지에서 데려와야 할 몇 백만의 유대인의 생존 공간을 생각한다면 인접 아랍인의 영토가 무한정으로 필요한 것이다.

1955년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바로 그 필요 때문에 이집트와 아랍 동맹국가들에 대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찾고 있었다. 이것을 안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는 그들을 부추겨서 직접 침략 전쟁을 감행케 했다.

이것이 1956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개의 주요 유럽 제국주의와 손을 맞잡은 이스라엘이 영·불 두 협력자가 수에즈 운하를 강타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이집트를 침공한 전쟁의 본질이다.(이 침략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그 전의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똘마니 협력자였다.)

낫세르의 본성은 이미 세상에 드러난 대로이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낫세르가 과거에 평화의 비둘기였느냐 아니냐, 또는 지금(그 당시) 평화의 비둘기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 아니다. 낫세르가 평소의 허장성세와는 전혀 달리 전쟁에서 무기력을 드러낸 한 가지 이유는 그가 국내 문제에 정신이 없었고 그로 인해 너무도 허약했다는 것이다.

설사 낫세르가 비둘기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유럽 제국주의와 동맹한 공공연한 침략자임을 스스로 온 세상에 드러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사태가 지난 뒤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비난의 화살이 퍼부어졌던 온갖 비열한 영토 팽창주의적 계획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이었음이 입증됐다.

그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모험이 실패한 뒤에도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움켜 쥐려고 버둥거리다가 막강한 국제적 압력에 직면해서야 그것을 내놓았다.

이스라엘의 불안한 운명

이상과 같은 온갖 사실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앞으로 중동 분쟁에서 웬만큼의 아랍인들은 장기적으로 이 투쟁에서 살아남겠지만 과연 이스라엘의 유대인이 살아남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유대인 국가 영토 팽창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새로운 유형의 게토(Ghetto : 외국에서의 유대인 집결 특수 거주 구역), 즉 국가적 영역의 게토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생존양식이 아니며 그들로서도 오랜 세월 동안 싫증이 났을 것이 틀림없는 낡은 생존양식의 한결 역겨운 재탕이다.

이 시대의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시온주의 강경론자들의 집단은 아랍인들에게는 하나의 저주 덩어리이다. 그들이 얼마나 더 많은 전쟁의 승리를 거둘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랍인을 깡그리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며, 하나의 승리를 거둘 때마다 그들에 대한 아랍 인민의 증오심은 커질 것이다.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대등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현대화되려면 앞으로도 10년이나 20년의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이스라엘의 장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전쟁 영웅들에 관한 도취감 이상의 것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된 사실들을 알고 있고 또 말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내에도 얼마쯤은 있다(사실상 많은 사람이 알고는 있으나 말을 할 만한 사람이 적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다음 세대는 몰록(전쟁과 재앙의 신)을 숭상하는 자들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유대 인도주의와 사회적 이상주의의 역사에서 최고의 덕성을 대표한 그런 유형의 유대인들의 말에 좀더 경건히 귀를 귀울였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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