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혁명정당은 별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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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2005년에 영국에서 볼셰비키 정당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겠죠?”
이는 스페인 내전기에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탈퇴했고 오늘날에도 부시와 블레어에 격렬히 맞서 싸우고 있는 어느 베테랑 사회주의 활동가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70여 년의 투쟁 경험조차 그에게 영국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거나 좌파가 혁명에 대비해 조직돼야 한다는 믿음을 주지는 못했다.
단기적 정세만을 놓고 보면 그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이 직접 경험하는 투쟁은 격렬한 수세적 투쟁들이다. 그것이 제국주의적 이라크 점령에 맞선 투쟁이든, 작업장의 조건과 임금에 관한 것이든, 난민들에 대한 적대나 이슬람 혐오주의로 표현되는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이든 간에 말이다.
극좌파들 가운데 진지한 세력들은 올해 4월을 바리케이드 건설이 아니라 리스펙트의 선거 운동에 쏟아 부었을 것이다. 누구든 “오늘날의 영국은 1917년의 러시아가 아니다” 하며 우리를 조롱할 때,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러시아의 상황 역시 언제나 1917년과 같지는 않았다.
러시아 최초의 혁명가들이 19세기 후반에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3백 년의 역사를 지닌 전지전능해 보이는 왕정 유럽 전체를 휩쓴 두 차례의 혁명적 격변에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구질서를 재확립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과 대치하게 됐다.
심지어 칼 마르크스조차 최초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제네바의 망명지에서 러시아의 노동자들을 조직해 짜르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믿은 대여섯 명의 혁명가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든 21세기 영국이든,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보이느냐는 것이 아니라 장차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짜르 제국이 세계 체제의 압력에 떠밀려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이해했기에 올바르게도 마르크스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세 때문에, 사회 상층의 정치 구조가 확고부동해 보이는 가운데서도 기층 인민들 사이의 일상적 관계는 혁명적 변화를 겪었고, 마침내 상층의 정치 구조는 붕괴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기되는 진정한 물음은 수백 년을 이어 온 정치 구조의 안정성을 마침내 무너뜨릴 수 있는 과정들이 과연 진행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혁명적인 정치적 변화에 가장 적대적인 자들이 다른 한편으론 세계화 때문에 사회 기층의 변화가 불가피함을 가장 강력히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한 추세 때문에 산업의 대량 파괴, 연금 축소, 사유화로 인한 복지국가 해체 같은 현상들을 우리가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나라에 기반을 둔 거대 다국적 기업들 간의 맹목적인 경쟁은 핵심 천연 자원인 석유를 고갈시키고 있고 이는 다시 석유 공급을 둘러싼 군사적 갈등을 점점 더 부추기고 있다.
그러는 동안 석유 사용으로 발생하는 온실 가스는 기후 패턴을 뒤바꿔 놓음으로써 모든 방면에서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를 다시 ‘볼셰비즘’의 문제로 인도한다. 한 세기가 넘도록 영국의 지배적인 사회주의 전통은 기존 제도 내에서 벌이는 선거 활동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한편으로 개혁을 위한 선전을 수행하고 다른 한편으로 득표에 초점을 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뜻했다. 파업 지지 활동, 시위 조직, 실업자 시위 건설 등 다른 모든 활동들은 득표 전략에 종속됐다.
선거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계급간의 투쟁에서 일정한 구실을 한다. 선거는 인민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간인데, 지배계급은 대중의 의사를 어느 정도 고려해야만 자신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격한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지배계급은 어느 정도 개혁적인 정부들을 수용할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물론 세계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1년에 영국 노동당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책동들과 1973년 칠레의 민중전선 정부에 맞선 군사 쿠데타와 대량 학살에서 드러나듯 지배계급의 관용에는 한계가 있다).
리스펙트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 블레어에 대한 좌파적 환멸을 표로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방향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사람들을 좌파적 구심 주변에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 상황에서는 리스펙트에 속한 사람들이 사회 변혁의 장기적 전략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는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 방향에 관한 의미 있는 변화를 성취하는 데서 선거는 단지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그래서 영국의 복지국가를 탄생시킨 일련의 개혁들은 선거 일정에 맞춰 이뤄진 것이 아니라 1910∼14년, 1919∼20년, 1942∼47년에 이뤄졌다. 이 시기에 노동계급 투쟁의 수위가 상승하면서, 2차 대전중에 보수당 의원 틴 호그가 말했듯이 “그들에게 사회 개혁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에게 사회 혁명을 줄 것”이라는 위기감이 지배계급 사이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전장을 결코 선거 공간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하는 언론을 이용해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1926년 총파업이나 1984년 광부 파업 같은 거대한 사회적 갈등의 시기에는 인권과 입헌주의의 가면을 주저 없이 벗어던지며,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에게는 비밀 요원들을 침투시키고, 선출된 정부가 자신의 이익을 짓밟으면 투자 기피나 자본을 외국으로 유출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지배계급의 권력에 진지하게 도전하려면 사회주의자들도 그 모든 전선에서 싸우는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모든 작업장과 지역에서 일어나는 온갖 크고 작은 투쟁들에 관여하고, 패배를 승리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한 부문의 승리를 모든 부문의 승리로 확대하려 하는 그런 조직이 필요하다.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은 그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없으며 심지어 리스펙트 같은 선거 연합도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 필요하다. 즉, 다른 모든 저항의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리스펙트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당, 그러나 선거 이외에 더 광범하고 (결국은) 더 중요한 투쟁이 존재함을 이해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이는 레닌이 러시아에서 건설했던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며, 로자 룩셈부르크가 생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독일에서 건설하려 했던 정당이다. 오늘날 영국에서도 그러한 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번역 천경록
[크리스 하먼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계간지 《인터내셔날 소셜리즘》의 편집자다. 국내에서는 《민중의 세계사》(책갈피),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책갈피), 《저항의 세계화》(북막스) 등 여러 권이 번역돼 있다.
그는 8월에 ‘다함께’가 주최하는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연설하기 위해 한국에 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