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급진주의는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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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측은 민주노총 간부들에게 성당 구내에서 나가라고 압박을 가했다. 한편, 김승훈 신부는 김대중과 노조 지도자들을 화해시켰다.
전자가 가톨릭 보수주의를 드러내는 일이었다면, 후자는 가톨릭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급진주의(해방신학)라면 김대중 정부에 맞서 민주노총 간부들을 방어하고 정부를 질타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급진적이었다. 이스라엘 또는 유다의 역사에서 '예언자'란 신의 이름으로 역사적 재난을 경고하고 억압과 초착취 그리고 부패 등 잘못된 관행의 시정을 촉구하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지배 계급을 향해 이렇게 질책했다. "...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끊는 자들아, 겨우 한다는 소리가 '곡식을 팔아야겠는데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지? 밀을 팔아야겠는데 안식일은 언제 지나지?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등겨까지 팔아먹어야지' 하는 자들아."
기원전 8세기 말의 예언자 미가는 이스라엘 지배자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 주인도 부려먹는구나."
기원전 7세기 말에 하바꾹은 유다의 지배자들을 이렇게 대놓고 비난했다. "화를 입으리라! 남의 것을 먼지까지 긁어모으고 남의 것을 전당잡아 치부하는 것들아, ... 그토록 수많은 백성을 털었으니, 그 남은 백성에게 이제는 너희가 털리리라. ... 화를 입으리라. 죄없는 사람의 피를 빨아 성읍을 세우는 것들아, 남의 진액을 짜서 성을 쌓는 것들아, ..."
1990년대 초에 군부가 물러난 이후 대부분의 가톨릭은 군사 독재에 항의하던 시절의 예언자 정신을 잊었다. 지난해 말에도 가톨릭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한국통신 파업 노동자들을 박대하고 비난했다. 이후 가톨릭은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을 하는 인권 운동가들에게도 수모를 주고 그들을 밀어 냈다. 유감스럽게도, 이 일들에 대한 가톨릭 내부의 급진적 비판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적은 없다.
가톨릭은 또한 바로 자신의 신앙 대상인 예수의 정신도 대부분 내팽개쳤다. 예수는 당시에 유대교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백안시되던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어울렸다.
당시에 유대교는 세부적이기 이를 데 없는 정결 예규를 확립하고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척했다. 그 예규는 하도 복잡해서 무지한 대다수 사람들(거의 다 농민이었다)은 아예 무엇을 하라는 또는 하지 말라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배가 고파도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서는 안 되었다. 공공세 징수원은 그 직업 자체가 "죄"였다. 양치기도 마찬가지였다. 매춘은 아예 말할 것도 없었다.(창녀가 모두 가난한 여성들이었음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십일조를 못 내는 사람과 사생아·혼혈아도 "죄인"이었다. 병도, 신체나 정신의 장애도 "죄" ― 조상이 지은 "죄"도 포함했다 ― 에 대한 벌로 여겨졌다. 사실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이스라엘의 신 야훼가 그 불행한 사람을 악의 세력에 넘겨 준 탓으로 풀이됐다.
예수는 이러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는 도시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촌락의 농민에게 설교했다. 그는 "복되도다,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 것이니."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했다. 반면에, 그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쉽습니다." 하고 말했다.
가톨릭은 초대 교회의 정신도 저버리고 있다. 2세기 초에 복음서를 쓴 루가는 예수의 권위를 빌어 부자들을 저주했다. "불행하도다, 당신네 부유한 사람들!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으니." 또, 루가는 역시 예수의 권위를 빌어 "제3이사야"라는 구약 예언자의 선언을 상기시킨다. 유대인의 바빌론 포로 시기(기원전 587∼538년)가 끝난 뒤에 활동한 제3이사야는 유대인의 하느님 야훼가 이렇게 해방을 선포했다고 선언했다. "억눌린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오늘날 가톨릭은 이처럼 예언자에서 예수 자신을 거쳐 초대 그리스도교인들로 이어지는 급진적 전통과 아무 관계도 없는, 오히려 이회창이나 김대중 따위에 머리를 조아리는 보수적 성직자들의 경직된 관료 기구가 권위주의적으로 통제하는 종교 단체가 돼 있다.
많은 사제들이 "의식 있는" 평신도들을 경계한다. 그런 평신도들의 단체는 "임의 단체"나 "불법 단체" 또는 심지어 "사조직"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때때로 공개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천주교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려면 교구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 모든 단체는 지도 신부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심지어 수녀원도 지도 신부가 "지도"해야 한다. 의식 있는 평신도들이 자율적으로 세운 단체는 격려받고 고무받기는커녕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다른 신자들은 그 단체의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그러한 평신도 단체들이 자신의 활동을 교회 신문이나 방송에 광고하면, 사제들의 사주를 받은 맹종적인("순명하는") 평신도들이 신문사나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함으로써, 다음부터 그 단체는 본당 신부의 허락이나 추천서를 제출해야 한다. 한편, 사제들은 일찍이 신학생 시절부터 평신도로부터 격리돼 선민의식을 고무받는다.
가톨릭의 권위주의는 1906년에 발표된 교황(비오 10세)의 회칙에 잘 나타나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이뤄져 있는데, 하나는 교계의 여러 등급에 속하는 사목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신자 집단들이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명확해, 교회의 목적을 촉진하고 그 목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을 인도하는 데 필요한 권리와 권한은 오직 사목자들에게 속하고, 신자 집단들의 의무는 사목자들의 지도를 받고 순한 양들처럼 그들을 따르는 것뿐이다."
아쉽게도, 정의구현사제단은 자신을 가톨릭 성직자단의 일부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공식 관료 기구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를 삼가 왔다 ― 파업 노동자와 단식 농성 인권 운동가들에 대한 서울대교구의 비정한 태도에 대해서 그랬듯이.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상당수 사제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가톨릭 고위 성직자(교황과 특별히 보수적인 대주교·주교)를 매우 격하게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공개적인 비판, 특히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하나의 단체로서 비판적 목소리는 내지 않는다. 같은 성직자로서 한 배를 탔다는 의식 때문일까.
가톨릭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종교적 권위주의는 사실 가톨릭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제도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역사 전반에 걸쳐 종교 단체 지도자들이 대부분 상층 계급의 일부로, 체제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 염원을 받아들이지만, 그와 동시에 소외된 사람들이 제 분수를 알도록 해 주는 관념과 제도로 그 염원을 바꿔 놓는다. 그러므로 종교는 억압적이고 비정한 세계에 대한 반대와 동시에 그 세계와의 화해를 표현한다.
세계의 주요 종교는 일부 국가의 공식 종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따금 민중은 체제에 대한 반감을 종교의 언어와 종교 운동으로 표현할 때가 있다. 라틴 아메리카 가톨리씨즘의 한 변형인 해방신학은 피안의 정의를 기다리지 말고 이승의 독재에 저항하라고 고무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종교 운동은 성직자 집단과 갈등을 빚게 된다. 천주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라틴 아메리카 예수회 지도자들을 비롯한 수백 명의 사제들을 해임 또는 면직시켰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민중은 종교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피안의 정의에 대한 약속보다 이승에서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우선시하게 된다.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원하는 많은 크리스쳔(그리고 다른 종교 신자들)도 마르크스주의자들 못지 않게 제도 그리스도교(종교)에 대해 비판적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일부는 자신을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종교 사회주의자)로 여긴다. 그들은 동성애자 혐오나 여성 멸시처럼, 인간 해방을 거스르는 일부 종교 관념들을 배격한다.
그러나 종교에는 몇 가지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애매모호함이 있다. 그래서 미국의 그리스도교 우익("근본주의자들")도 자기들의 신앙을 뒷받침할 근거를 성경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 가령 동성애를 저주하거나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 같은 것들이 있다.
핵심 문제는 종교 사상이 사회에 대한 분석이나 사회 변화 전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의 사상을 갖고 시온주의 문제나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인티파다)를 인식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분석과 변혁 전략을 제공한다. 이 분석과 전략에 따르면, 사회 변혁 운동가들은 종교적 영감에 근거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함께 투쟁하는 한편으로, 이성적인 사회 근본 변혁 사상이 전체 운동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