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선배 여성 사회주의자 이승민 동지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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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승민 동지의 영정 앞에 국화꽃을 바쳤고 몇 달 전부터 마음의 준비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우리 곁에 없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녀가 투병 중이던 올해 봄 내게 얘기한 소망처럼, 금방이라도 이웃인 내게 전화해 ‘동네 맛집 투어를 가자’고 할 것만 같다. 앞으로도 그녀와의 추억이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그녀가 떠오를 것 같다.
내가 20대 초반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갓 입문했을 때, 이승민 동지는 이미 단체 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보다 불과 세 살 많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중학생 때부터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으며 이미 온갖 산전수전 겪은 그는 나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토론과 논쟁에서 상대방의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당찼던 그녀의 태도와 그런 그녀가 이 단체 안에서 조화롭게 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백 마디 말보다 이 단체가 민주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줬다.
신입 시절 나는 이승민 동지와 같은 지부에서 잠시 같이 활동했었다. 내가 지부 모임에서 자본주의의 이윤율 저하 경향 등에 대해 질문 폭탄을 쏟아 내자, 이승민 동지가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며 열심히 설명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다른 동지들도 그랬지만, 그녀는 특히나 신입인 나에게 뭐 하나라도 더 알려 주려고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런 능동성과 적극성을 보고 배운 것은, 내가 사회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됐다.
여러 동지들의 조사가 보여 주듯 그녀 특유의 강단과 자신의 소임을 잘 해내려는 열정은 그 뒤로도 변함없었다.
약골인 그녀가 박근혜 퇴진 운동 당시 하루에도 수백 부의 신문을 판매하며 자신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근성이 여전함을 확인했다. 집회가 끝난 뒤에는 방전된 몸을 겨우 가누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집에 가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꼭 필요한 여러 책들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한때 내 졸저의 담당 편집자이기도 했다. 내가 당장 닥친 일들이 많다는 이유로 약속한 작업을 못 하자, 그녀는 내게 그 작업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그녀답게 지치지 않고 옆구리를 찌르고 독려의 채찍질을 했다. 지금은 그녀의 채찍질마저 너무나 그립다.
이승민 동지는 10개월간의 투병 생활 동안 실낱 같은 가능성이라도 살려 보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 삶의 의지는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덕분에 그녀는 사회주의자로서의 삶을 정리할 시간을 몇 개월이나 연장할 수 있었고, 우리에게도 그럴 시간을 줄 수 있었다.
투병 중에도 그녀는 유쾌했고, 의연했고, 늘 동지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마지막 가는 길조차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다웠다.
이승민 동지의 불꽃 같은 삶이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는 그녀가 십대의 나이에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됐을 뿐 아니라 그 길을 생애 끝까지 한결같이 걸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승민 동지가 나의 동지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그녀가 못다 이룬 꿈은 남은 우리들이 묵묵히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승민 동지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그녀의 동반자 김종환 동지에게 내 온 마음을 다해 위로를 보낸다. 승민의 바람대로 그가 슬픔을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 이승민 동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추모의 글과 사진을 신문사(wspaper@ws.or.kr)로 보내 주세요. 함께 모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