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하먼이 자율주의의 궤적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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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하먼은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의 지은이이고, 1968년 당시 런던대 학생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글은 2003년 11월에 썼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고 조직해야 한다. 구좌파의 낡은 이데올로기적 공식들은 이제 그만 폐기하자.” 오늘날 이런 얘기들이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 내에서 거듭거듭 회자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들으면서, 신노동당의 닳아빠진 의회주의와 1989년에 몰락한 스탈린주의의 음흉한 수법들과 결별하기 위한 시도라고 반긴다.
그러나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조직 방식”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비판하는 대상 못지않게 낡은 사상과 방식을 흔히 받아들인다. 오늘날 운동 내의 여러 ‘자율주의’ 경향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자율주의적 주장의 요지는 각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집중된 구조(위계적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에 종속되지 않은 채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항의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주적 행동은 어떤 형태든 다른 것들과 똑같이 유효하며, 그런 행동들이 자유롭게 발전한다면 현 체제에 맞서는 다양한 저항의 ‘무리’ 또는 ‘다중’을 형성해 마침내 현 체제의 지배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들의 주장은 마르크스 시대 이후에도 여러 번 부활했는데, 가장 최근에는 1960년대 말의 운동 가운데서 부활했다.
1969년에 샌프란시스코의 사회주의자들인 잭 와인버그와 잭 거슨이 쓴 글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 단체인 SDS(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들)의 태도를 잘 묘사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SDS의 압도 다수 구성원들은 집중화와 이데올로기에 적대적이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행동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구좌파’ 사상으로서 배격당했다.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으나마나 하거나 매수된 집단으로 취급받았다. ‘지역 공동체에서 조직하기’와 ‘참여 민주주의’는 그 단체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핵심 용어들이었다.”
1967년의 대규모 급진화는 ‘이피’들과 ‘마더퍼커스’의 성장을 촉진했는데, 그들은 권위에 맞서 정면대결을 설파했지만, 여전히 조직과 ‘이데올로기’를 배격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학생 운동도 똑같이 ‘자생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무(無)구조성’은 수많은 학생들(이탈리아의 경우 노동자들도)이 처음으로 봇물 터지듯 운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는 잘 들어맞았다. 그들은 거리로 나와 건물을 점거하고 정부 기관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던 동안에는 전략·전술·조직 같은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다중’은 결코 기성 권력 구조를 뒤흔드는 것을 넘어 그것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기성 권력은 반격을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의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은 그 운동이 처음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한 해이기도 했다. 경찰이 시카고의 민주당 전당 대회장 밖에서 시위대를 두들겨패는 동안 FBI는 흑표범당 지도자들을 범죄자로 몰아 사살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이제 사람들은 갑자기 구조가 필요하고 사회 내에서 작동하는 힘[세력]들에 대한 이해, 즉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다. 와인버그와 거슨이 썼듯이 “베트남 전쟁 반대 투쟁과 흑인 해방 투쟁은 미국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을 낱낱이 드러냈고, 그것이 타도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처음에는 여러 모로 초이상주의적인 어린이들의 세계 구출 모험을 닮았던 이 운동은 갈수록 엄숙해지고 심각해졌다. 판돈이 훨씬 더 커졌다. 이 때문에 급진 운동은 자신을(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더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성 마오쩌둥주의 단체인 ‘진보적 노동자’(PL)가 미국 SDS에 합류했다. PL은 믿기지 않으리만큼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스탈린주의적인 조직이었다. 와인버그와 거슨에 따르면, “PL에 대한 SDS 터줏대감 회원들의 첫 반응은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PL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일관된 세계관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이점”이었음이 인정됐다. 기존 SDS 지도부와 수천 명의 추종자들은 PL과 마찬가지로 자기 나름의 강경한 소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비록 마오주의에 대한 해석은 서로 약간 달랐지만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율주의’ 정치라고 부를 만한 경향이 한때 있었던 운동이 이제는 스탈린주의의 이런저런 버전들을 수용한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상황은 매우 비슷했다. 1967년에 ‘반권위주의’와 ‘자생성’을 부르짖었던 사람들 가운데 대단히 많은 수가 1970년대 초에는 마오주의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자생주의’ 단체들 중 최대 규모였던 ‘로타 콘티누아’도 1974년 무렵에는 중국 공산당의 조직 모델을 모방하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신좌파]이 하루아침에 낡은 것[구좌파]으로 변태한 셈이다.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다. 계급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라는 것, 따라서 상대편은 끊임없이 아군의 약점을 공략하고 아군을 분열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운동에서든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기존 사회의 굳어진 관념들과 결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더 일찍 결별한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을 자기쪽으로 설득하고 지배계급과 국가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미국·독일·이탈리아 신좌파의] 실수는 자생주의에서 조직으로 방향을 튼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실수는 바로 살아 숨쉬는 운동과 관계 맺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명하달식의 권위주의적 조직 방식을 채택한 데 있다. 이 점은 1970년대 중엽에 주요 자본주의 정부들이 안정을 회복하는 데 일단 성공하고 나자 분명해졌다. 그 뒤로 2년 사이에 유럽과 북미에 있었던 대규모 마오주의 단체들은 모두 파편화되고 붕괴했다. 많은 활동가들이 이러한 파편화를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각각의 파편들은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약했다. 그래서인지, 운동의 ‘자율성’을 숭배했던 세력들 가운데 다수는 오래지 않아 공간을 확보하는 수단으로서 의회주의에 매달리게 됐다.
그러나 이와 다른 대안은 언제나 있었다. 맹종을 강요하는 스탈린주의적 구조 없이도 사상을 명료화하고 조직화를 통해 투쟁들을 조율하는 방법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집중화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우리편이 상황에 따라 필요하면 전진하고 후퇴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중화는 언제나 운동과 관계 맺고, 운동으로부터 배우고 보편화하며, 가장 능동적인 인자들의 유기적 표현이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중앙집중 조직이라는 생각에 무조건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과거사의 냉혹한 교훈은 민주적 중앙집중 없이는 운동에 대한 국가의 중앙집중적 공격에 대한 대응이 결국 맹종을 강요하는 비민주적 형태의 중앙집중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