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시위’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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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0일 청주에서 열린 민주노총 주최 노동자대회는 훌륭했고, 여러 점에서 뜻깊은 집회였다. 그런데 그 집회에서 일부 활동가들과 경찰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그 날 시위가 이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대개 언론은 엔간한 집회·시위는 아예 무시하기 일쑤고, 대규모 집회조차 그 집회 개최의 원인과 집회 참가자들의 요구들은 모른 척한 채 비교적 사소한 또는 매우 하찮은 충돌만을 부각시키곤 한다.
삼성재벌 총수 이건희의 고려대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 파행 사건 때처럼 노발대발하며 길길이 날뛰는 듯할 때도 종종 있다.
불행히도, 운동 내 일부 사람들은 이런 때 언론의 마녀사냥으로부터 사냥 대상을 옹호하기는커녕 덩달아 그들을 꾸짖는 경우가 있다. 폭력 사용만큼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비난 덕분에 주류 언론은 더욱 신나서 활개를 친다. 또한 그들은 운동 전체에 손해를 끼치기 위해 자기들의 마녀사냥에 동조하는 운동내 인자들과 사냥감들을 이간시키며 흡족해 한다.
하지만 대개 폭력을 행사하는 건 경찰이지, 좌파가 아니다. 물론 6·30 노동자대회 때 일어난 일은 이와 반대인 듯하다.
그러나 노동자나 다른 피억압자들의 운동이 경찰이나 국가 또는 우익과 충돌했을 때 마르크스주의자는 운동을 변호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가 정당들과 우익을 즐겁게 해주는 주류 언론의 위선적 질책에 가세해서는 안 된다.
경찰과 법원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국가 기구들의 일부이며, 자본주의적 국가는 노동계급의 적이자 억압자인 자본가 계급의 국가이다. 자본주의적 국가의 주된 기능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자본가의 재산 그리고 자본가의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노동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기관들과 이 체제의 폭력을 넌더리나게 나날이 겪고 있으며, 이에 견주면 시위나 다른 투쟁의 장에서 일어나곤 하는 폭력은 실로 새 발의 피다.
이는 보편 타당하거니와,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더욱 참말이다. 특히 그들이 사용자·경찰·법원에 의해 더 부당하고 더 억울한 차별을 겪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특정 상황에서 실제의 세력 저울을 고려하는 훌륭한 전술 감각의 필요성을 노동운동이나 좌파가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된다.
경찰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는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6·30 청주 노동자대회에서처럼 세력이 비교도 안 되게 더 강력한 시위 진압 경찰과 애써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반전 시위나, 노무현 정부 하의 다른 여러 집회도 세력의 열세에 직면해 시위나 행진 참가자들이 큰 좌절감을 느끼고 때때로 분풀이를 집회 조직자들에게로 돌린 일도 있었다. 2003년 4월 초 국회의사당 앞 파병안 통과 반대 시위 때와 2004년 여름 김선일 피살 항의나 파병 반대 시위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집회 주최측이 경찰 저지선을 돌파해야 한다고 또는 “뭔가 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현명치는 못한 처사였다. 조금만 차분하게 세력관계를 직시해도 경찰력을 압도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행동을 시도하는 것은 기껏해야 자학적(自虐的)임을 알 수 있었다.
때로 좌파 노조 지도부가 아래로부터 강력한 압력에 직면해 대중 투쟁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때 면피를 위해 소수파 폭력을 용인 또는 심지어 교사하기도 한다. 2001년 봄과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 일어난 충돌이 이런 사례라는 심증이 활동가들 사이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의 허세와 물리력 남용은 시위 참가자들의 정서와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를 냈을 뿐이다.
사실, 6·30 노동자대회 행진 끝무렵에 일단의 무장 행동대가 먼저 도발을 하고 전부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아 있던 비무장 대열은 잠시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다함께’ 참가자들을 포함해 이 대열은 경찰 물대포가 발사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각 있게 처신했다. 그들은 미련한 행동을 피하고 연좌를 해 집회를 마무리지었다.
되풀이되곤 하는 이런 경험을 통해 교훈 두 가지를 끌어낼 수 있겠다. 첫째, 이 사회에서 폭력의 주요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이고 주로 폭력을 자행하는 자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는 피억압자들의 편을 들어야 하지, 억압자들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체제의 폭력에 대한 최상의 응답은 노동계급을 최대로 결집시켜 국가가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수파 폭력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때때로 이 과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