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노동’, 억압,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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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노동자’ 조직의 출범으로 ‘성 노동’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압도 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성 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성매매는 범죄이지 노동이 될 수 없다는 게 흔한 반응이다.
그래서 ‘성 노동’ 인정을 요구하면 곧 성매매를 긍정하는 성차별주의자들로 몰리기 십상이다. 〈한겨레〉 7월 18일치에 실린 페미니스트 정희진 씨의 칼럼은 이런 생각을 보여 주는 한 사례다. 그녀는 지난 6월 29일 ‘전국 성 노동자의 날’ 행사에서 ‘성 노동자’ 운동을 지지한 일부 좌파를 겨냥해 “‘성 노동’이라는 말에 깊이 침윤된, ‘진보’ 진영의 성차별, 계급 차별 의식”을 비판했다.
‘성 노동’ 주장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사회운동가라면 여성들이 돈 때문에 자신의 성을 파는 현실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 노동’ 인정을 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 판매를 긍정적 현상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더러 포함(대표적으로 포주가 그렇다)돼 있다는 사실도 거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좌파적 관점에서 ‘성 노동’ 인정 문제는 포주나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시각과는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 판매 여성들이 성매매 과정에서 겪는 착취와 억압, 소외를 무시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매매가 지속돼야 할 긍정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성매매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성 노동자’ 운동에 대한 지지는 자본주의에서 생계를 위해 자신의 성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성 판매자들에 대한 억압에 반대하는 것이다.
성매매방지법 시행 이후 성매매가 줄었다는 정부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강화된 단속으로 집창촌 수는 크게 감소했지만, 경찰도 인정하듯이 단속은 언제나 성매매를 음성화할 뿐이다.
성을 판매해야 하는 사회적 조건 ― 가난이 주된 요인이다 ― 이 존재하는 한, 어떤 법률적 억압으로도 성 판매는 사라지지 않는다. 좋든 싫든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한 채 도덕만을 앞세우게 되면 성 판매자들에 대한 억압에 뜻하지 않게 동조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성 판매자 처벌에는 반대(‘비범죄화’)하고 성 구매자나 포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다. 정희진 씨의 ‘성 노동자’ 운동 비판도 성 구매자들을 처벌하지 말자(‘비범죄화’)는 주장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처벌을 포함해 포주의 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필요하다. 포주는 자신의 성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 판매자들을 쥐어짜 이득을 보는(그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성 착취자들이다. 포주들이 절박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의 처지를 이용해 그들을 채무 노예로 만들곤 하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포주가 아닌 성 구매자까지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성 구매자들을 강간범과 똑같이 취급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성매매가 진정한 ‘자유 노동’인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폭력’인 것도 아니다. 성매매는 말뜻 그대로 성이 사고 팔리는 현상이다.
성 구매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매매가 남성들의 욕구 때문에 생긴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성 노동’을 인정하는 것은 ‘남성의 성적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라 한다. “가장 낮은 계급의 남성이라 할지라도, 성 판매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배자’가 될 수 있으며, 섹스를 통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정희진 씨의 주장이 전형적이다.
성 판매 여성들은 ‘남성 권력’의 희생자이고 성 구매 남성들은 ‘지배자’라는 주장과 달리, 성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대부분 가난과 억압에서 비롯한 희생자들이다. 보통 성 판매자들의 처지가 더 비참할 테지만, 성 구매자 역시 소외를 피할 수 없다.
흔히 성 구매자들을 남성이라고 가정하지만 오늘날 적잖은 여성들도 성을 산다. 만족스러운 성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증가하고 있지만, 성에 대한 보수적 태도 ― 이성애나 결혼 제도를 통한 성관계가 정상적이라는 통념 ― 는 대다수 나라들에서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성매매는 개별 남성들의 욕구 때문에 생겨나는 게 아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이 억압받는 사회에서 상업적 섹스는 늘 존재해 왔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성의 상품화(성매매는 그 일부일 뿐이다)는 그 전 어느 시대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광범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 단지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기혼자들, 성 소수자들 또는 그 누구든 성적으로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 ― 성을 구매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성을 구매하는 사람들(남성이건 여성이건)의 성 의식은 왜곡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은 그들의 본능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그 원인이 있다. 한편에서는 가난과 억압 때문에 자신의 성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광범하게 양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을 억압해 상업화된 성을 사도록 부추기는 사회가 문제의 근원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성은 경제적 불평등과 성적 억압과 여성 억압이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한 채 성매매를 법적 금지를 통해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을 통해 성매매를 근절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지배자들의 사회 통제에 이용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성매매 금지를 요구한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은 종종 성 보수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고, 결국 보수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다.
성매매가 없어진 세계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세계적 규모에서 벌어지고 있는 빈곤과 성 억압과 여성 차별에 맞서 싸우는 거대한 운동의 일부가 될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