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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집회를 돌아보며:
폭력 ―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올해 4월 29일 메이데이 집회는 경찰의 폭력으로 얼룩졌다. 메이데이 집회장 바깥에 붙어있던 ‘메이데이를 축하한다’는 경찰의 현수막이 무색하게 경찰은 시위 대열에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경찰은 노동자들이 정리 집회를 하러 시위 대열을 떠난 뒤 기다렸다는 듯이 폭력을 휘둘러댔다.(만약 노동자 대열이 남아 있었다면 경찰들이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학생들에게 달려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밀집해 있던 수많은 학생들이 경찰의 폭력을 피해 달아나다 넘어져서 다쳤다. 경찰은 단순히 시위 대열을 해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려와서는 넘어진 학생들은 곤봉으로 여러차례 내리쳤다. 심지어는 “도망가다 버스 사이에 몰린 학생의 머리를 쉬지 않고 곤봉으로 내리쳤다.” 그들은 여학생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여학생들 여러 명이 곤봉에 머리가 터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한 학생은 “전경들이 미친 것 같았다. 이렇게 진압하는 것 처음 봤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와 언론은 시위대의 폭력을 과장하고 비난하는 데 열중했다. 언론 보도와 시위 사진은 경찰이 시위대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시위대는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한” “극렬 폭력세력”으로 둔갑했다. 언론은 경찰폭력에 의한 시위대의 피해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기성 언론은 늘 시위대를 무시무시한 폭력세력인 것처럼 묘사하느라 애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집회나 시위에 참여해 본 사람들은 시위대가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새발의 피

경찰의 폭력도 문제지만 시위대의 폭력도 문제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롭게 시위한다면 경찰이 폭력 진압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이 시위 진압을 결정하는 기준은 폭력 시위냐 아니냐가 핵심이 아니다. 청년진보당이 〈조선일보〉 규탄 집회를 했을 때 경찰은 청년진보당 당원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했다. 심지어 경찰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을 연행하기도 했다. 2월 말 총선시민연대가 종묘에서 평화적으로 서명 운동을 했을 때도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난장판을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평화롭게 회사 안에서 농성하던 대우 노동자들을 경찰이 새벽에 기습 침입해 잡아 갔다.

경찰은 시위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진압의 대상으로 본다. 경찰은 일상으로 시위 보호 훈련이 아니라 시위 진압 훈련을 받는다. 그 결과는 시위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수많은 열사들이 있다. 1960년 4·19 혁명의 김주열, 1987년 연세대 이한열, 1987년 대우조선 이석규, 1991년 명지대 강경대, 1996년 연세대 노수석 열사 …….

‘김영삼의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노수석 씨의 죽음은 경찰의 강경 진압에서 비롯했다. 또한 1996년 상반기 노동자 투쟁에서 패배한 김영삼은 노동자 투쟁에 대한 반격으로 한총련 학생들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영삼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4천 여 명의 학생들을 연세대에 가두고 물과 음식도 주지 않은 채 강경 탄압했다. 김영삼은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 3만 6천 발을 난사하고, 수해 지역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던 군용헬기를 13대나 동원했으며, 매일 2만여 명의 전경을 동원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쇠파이프 같은 보잘 것 없는 수단에 의존한 채로 갇혀 있을 뿐이었다.

폭력 경찰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김대중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저항할 움직임을 보이자 집권 첫 해인 1998년 메이데이 시위를 폭력으로 막았다. 최루탄을 쏘고 노동자와 학생들을 대거 연행했다. 그리고 올해 메이데이 시위에서도 비무장한 시위대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 뒤 김대중 정부는 메이데이 폭력시위를 비난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주말이나 휴일에 도심에서 벌어지는 집회와 시위를 제한하는 법률을 입안하겠다고 발표했다.

진정으로 폭력적인 것은 이 체제다. 지배자들은 문명 사회에는 폭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며 마치 자신들이 폭력을 반대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가지의 조건 ― 국가의 승인 ― 이 충족되면 가장 극단적인 폭력조차 옹호한다. 그들은 수천만을 학살한 양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걸프 전쟁, 발칸 전쟁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리고 장차 치를 전쟁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매일 쏟아붓는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 법, 질서, 정의 그리고 평화라는 미사여구로 그들의 폭력을 감춘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반대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항상 무장하고 있다. 군대, 경찰이 대표적이다. 소수가 압도적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설득만으로는 부족하다. 폭력이 필수불가결하다. 처음에 지배자들은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에 의존했다. 그러나 총을 든 군대의 노골적인 공격이 더 커다란 저항을 불러올까 봐 두려워 경찰이라는 기구를 만들어냈다. 근대 경찰제도의 효시인 영국 경찰은 노동계급의 거대한 저항운동이었던 '차티즘'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했다. 우리 나라에서 시위진압 경찰인 전투경찰은 1970년 12월 31일에 창설됐다. 1970년은 바로 전 해에 비해 10배로 늘어난 1656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한 해였다.

군대와 경찰은 평소에는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의 군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치장한다. 그러나 지배자들의 권력과 부를 위협하는 저항이 거세지면 금세 폭력적 본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지배자들이 지금 광주민주항쟁으로 부르고 있고, 1980년에는 ‘폭도들의 반란’으로 불렀던 광주 항쟁 때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학살한 것은 바로 군대와 경찰이었다.

시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진정한 원인은 시위대에 있지 않다.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는지 시위대가 쇠파이프나 화염병으로 무장을 했는지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의한 죽음을 경험한 시위대가 경찰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방어적 대응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

필요악

물론, 폭력은 그 자체로 미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설움과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지배자들의 부당한 수많은 조치들을 바꾸기 위해 행사하는 대중적 폭력은 필요하고 정당하다.

그런 점에서 소수가 행사하는 폭력이 대중적인 투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착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체제가 아닌 개인(들)에 대한 개인(들)의 폭력 즉, 대중들의 힘을 대신하려는 테러나 소수의 무장투쟁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구체적인 정세나 맥락, 대중의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폭력 투쟁이 무조건 전투적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 지배자들과 우리 사이의 세력균형, 경찰과 시위대 간의 세력균형에 개의치 않고 행사하는 폭력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폭력은 의도치 않게 시위대에게 피해를 주거나 지배자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줄 수 있을 뿐이다. 4. 29 집회 때 경찰의 폭력 진압에 화를 참지 못하면서도 학생 시위대를 이끈 지도부의 투쟁 방법에 많은 학생들이 의문을 던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거대한 대중이 행사하는 폭력은 지배자들의 억압을 무력화시키고 요구를 쟁취할 수 있는 힘을 지닌 폭력이다. 예컨대, 1987년 6월과 7∼9월에 거대한 대중이 전두환 정권과 경찰에 맞서 행사한 폭력이 이에 해당한다. 아마 이러한 폭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도,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도 쟁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민중의 체제와 경찰에 맞선 폭력도 독재자 수하르토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지배자들에 맞선 폭력은 필요악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억압자들이 체제의 폭력에 맞서 행사하는 폭력이 필요악이라고 주장할 때조차도 우리는 ‘필요’와 ‘악’ 모두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필요’를 ‘미덕’으로 격상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체제의 폭력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폭력을 지지하는 것은 진정으로 폭력적인 이 체제를 끝장내고 폭력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폭력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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